28화.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된 건지 잊어버리지 마. 넌 평생 나 못 버려.’
언젠가 악에 받쳐 레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나 당연해서 화도 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언니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못…… 못 버리게 한다고 했잖아. 쉽게, 절대 안, 죽, 흐윽…….”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헤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흐려졌다.
“이러지 마, 죽지 마…….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나 정말, 정말 노력했는데…….”
자격 없는 양육자들이 자신을 상품 취급할 때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던 언니였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유일한 가족.
“내가 잘못했으니까…… 죽지 마…….”
나의 존재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언니. 기어코 나는 레테를 살리지 못하는 건가? 나 때문에 죽는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헤일라는 정신없이 울며 허덕댔다. 그 와중에도 미안하다고 강박적으로 되뇌며 레테의 손을 놓지 않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안이 침대 옆에 주저앉은 여자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헤일라.”
“아, 흐으, 언니, 언니…….”
“헤일라. 진정해, 응?”
“흡, 어, 어떡해, 언니, 언니가 안 움직여…….”
“그래.”
안 움직이네. 예의 그 무기질적인 눈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레테를 훑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 속에 녹아 있는 비린 만족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곁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옷깃을 붙드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싫어, 안 돼, 안 돼, 언니, 흐으, 언니, 죽으면…….”
“살리고 싶어?”
온유한 목소리가 섬광처럼 헤일라의 귀에 꽂혔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가늘게 떨리며 돌아갔다. 그의 손에.
“살릴 수 있어.”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헤일라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간신히 숨을 되찾은 사람처럼 헐떡였다.
“어, 어떻, 어떻게…….”
“사실 계속 수소문하고 있었어. 파란 집에서 레테가 앓는 병에 잘 듣는 약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파란 집. 귀한 약을 구할 수 없는 평민들이 주로 향하는 불법적인 의약품 거래소였다.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의원 역할을 도맡아 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챙긴다.
신전과 황궁에서 평민을 위해 건립한 의료원은 정해진 병만 치료해 주며 약도 신전에서 허가한 약만 제공하기 때문에 아무리 부유한 상인이라 한들 난치병을 치료하기 힘들었다. 파란 집은 그 점을 이용해 제 배를 채우는 곳이었다.
“마침 어제 찾았어. 방금 사람을 보냈으니까 곧 돌아오겠지. 조금만 기다리자.”
헤일라라고 해서 찾아보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찾는 데에도 돈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들고, 찾는다고 해도 그들이 제시하는 비용을 지불할 처지가 안 됐다. 십 년간 일한 돈을 다 가져다 바쳐야 필요한 약 열 알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을 때 파란 집은 포기했다.
“리안…….”
“다 괜찮아질 거야.”
생각지 못한 구원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거절은 사치였다. 제 목숨이 아닌 언니의 목숨이 걸린 일에 자존심이며 염치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헤일라는 그가 단단하게 얽어 오는 손을 맞잡았다.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지만 애써 잠재우려 눈을 감았다.
“나만…… 믿으면 돼.”
그러면 다, 괜찮아. 그가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 * *
“……고마워.”
“완치된 것도 아닌데 뭘.”
그는 정말로 겸연쩍은 기색이었다. 크게 힘써 준 사람치고는 과한 겸손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언니는 오늘 죽었을 거야. 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아주 약간의 연명 치료를 했을 뿐이야.”
여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리안이 일깨운 탓이다. 헤일라는 긴 한숨을 내쉬고 지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항상 그랬는걸.”
“…….”
“언제나 언니는 죽음에서 돌아왔어. 오늘처럼. 그러니까 앞으로도…….”
“헤일라.”
“문제없어.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지만,”
“시끄러워!”
헤일라가 붉어진 얼굴로 뇌까렸다. 충혈된 눈에 간신히 멎었던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
“믿는 거밖에는 못해. 그것밖에 못하잖아!”
방문한 의원은 레테에게 환약 한 알과 물약 서너 스푼을 복용하게 한 뒤 호흡과 맥박, 그리고 몸의 반점들을 꼼꼼히 살피며 진찰했다. 몸 여기저기를 살짝 씩 눌러 보면서 무언가를 종이에 체크 해 두는 얼굴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혹시 병세가 심각하다고 말하면 어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 헤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욱여넣으며 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무래도 약으로 호전될 만한 상태는 아닌 듯합니다. 신전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다면야 또 모르는 일이지만…….’
파란 집에서 어떻게든 치료해 줄 수 없냐는 리안의 물음에 의사는 난색을 표했다. 파란 집이라 해서 모든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신전의 의술을 따라잡을 만큼의 돈도 능력도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쩌면 파란 집의 의사가 언니를 완전히 고쳐 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에 들떠 있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결국, 헤일라는 짧으면 두 달 안에 언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선고를 들었다. 뒤에 따라붙는 의사의 목소리는 금이 간 것처럼 이명에 가려졌다. 그녀는 엉엉 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결국 리안의 부축을 받고 겨우 침대에 앉을 수 있었다.
“신전에 가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반면에 리안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아, 그런 말을 듣기야 했지.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신전은 귀족과 황족, 그리고 신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평민은 결코 들일 수 없는 것이 법도였다. 그걸 헤일라보다 더 잘 아는 리안이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확신에 찬 말투. 헤일라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옅은 희망을 감지하고 몸을 바싹 굳혔다.
“……얼마 전에는 힘들다고 했잖아.”
신전에서 돌아온 뒤 헤일라가 어렵사리 물은 적이 있었다. 신전에 헤일라를 들여 치료한 것처럼 레테도 그렇게 해 줄 수 없느냐고. 염치없고 뻔뻔한 부탁임을 알았지만, 점점 나빠지는 레테의 병세에 절박해져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정말 안타까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헤일라를 데리고 들어갔을 때는 대신관이 잠시 자리를 비워 한산했던 때였고, 레테처럼 귀한 약과 어려운 치료가 동반되는 환자는 몰래 들여도 금세 티가 난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장기적인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헤일라와는 경우가 다르다고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파고 들어갈 여지 없이 불가능함을 납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들어. 이대로는.”
“방법이, 있는 거야?”
그래. 생각해 보면 리안은 귀족이었다.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왔지만 그래도…… 그라면 다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헤일라는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리안을 붙잡았다. 그가 놀라서 흔들리는 몸을 재빨리 부축해 주었다.
“뭐든, 뭐든 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리안.”
무언가 침잠해 있는 듯한 눈이 헤일라를 지그시 응시했다. 가늠해 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눈빛이다. 그녀는 그것을 읽어 내고 다급하게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이는 없지만…… 만약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거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되는대로 내뱉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퍼부었다. 그만큼 간절한 일이다. 그녀는 자존심을 모두 내던져 가며 빌었다.
“제발 우리 언니 좀 살려 줘, 응?”
“……헤일라. 신전에는 귀족만 출입할 수 있어.”
“알아, 아는데…….”
“그리고 너와 내가 혼인하면 너는 귀족이 되겠지.”
혼인? 헤일라가 멍청한 얼굴로 그 두 글자를 따라 했다. 예상치 못한 단어에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로제아르라는 지방이 있어. 그곳의 유서 깊은 백작가는 대대로 금발의 아이만 태어난다고 해.”
“리안, 잠시만, 난…….”
“만약 휴리트 공작가와 연을 맺을 수 있다면 변방 귀족인 그들이 고아 둘을 양녀로 받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어, 헤일라.”
“…….”
“그렇게 되면 너는 나와 혼인할 수 있을 테고, 레테는 신전 출입의 자유를 얻은 뒤 내 지원을 받아 치료도 받을 수 있겠지.”
머리를 쇠망치로 맞은 것 같다. 헤일라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을 잡으려 노력했다. 언니를 살리는 대가로 자신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되새기느라 바빴다. 아니, 아니지.
내가 무언가를 ‘내놓는다’는 표현이 가당키나 한가?
“파란 집을 찾아서 레테를 낫게 해 주고 싶었어. 그런 다음 너에게 청혼하려고 했지. 알아. 이런 상황에서 혼인해야 레테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저열해 보이는지.”
“…….”
“하지만 정말로…… 난 네 진심을 얻고 싶었어. 온전히 네 의지로 나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파란 집의 의원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해서…….”
그는 무언가 굉장히 잘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 마치 잘못을 저질러 놓고 어미에게 혼이 나는 건 아닐까 싶어 손톱을 뜯는 아이 같았다.
“귀족들은 이해타산에 아주 충실한 생물이야. 너와 내가 혼인하지 않는다면 입적을 허락할 이유가 없어서…….”
“아니, 잠시, 잠시만.”
헤일라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끊어 내자 그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는 눈에 애가 닳아 있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는 울컥 울어 버릴 것 같아 침을 한 번 삼켰다.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 거야?”
“…….”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 너랑, 나랑 혼인을 하자고? 말도, 아니,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네가 그렇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