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27화 (27/97)

27화.

“싫었어?”

“넌, 진짜 나쁜…… 나쁜 놈이야…….”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쉬이 울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훌쩍이던 헤일라는 순간 엉덩이 골에 다시 닿는 딱딱한 감촉에 숨을 멈췄다. 도망쳐 보려 했으나 이미 리안이 어깻죽지를 잡아 눌러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번들거리는 아랫구멍이 저도 모르게 벌름거렸다. 울컥, 하고 정액이 새어 나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리안이 헤일라의 목덜미를 혀로 주욱 쓸었다.

“그런 것 같아. 질이 나쁘지.”

“흐, 아……!”

“그래도 날 좋아해 주니까…… 응, 착한 헤일라.”

그녀는 리안의 아래에서 엉엉 울면서도 그가 온몸을 핥아 주며 달래면 진정이 되었다. 점점 길들여지는 자신을 알았으나 빠져나올 새가 없었다. 리안은 헤일라의 자괴감 절은 눈을 보고 샐쭉 웃으며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오늘은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연극을 보러 가자.”

“…….”

아주 예전에 수도에서 가장 큰 극장에서 열리는 유명 배우들의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일간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헤일라는 호수로 가는 내내 리안에게 그 연극 내용에 관해 떠들었던 기억이 있다. 의상실에서 잡다한 일을 하며 주워들은 줄거리를 이어 붙여 엉성했지만, 그는 헤일라의 목소리를 경청했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는 체하며 떠들어 댄 게 후회됐다.

“안 갈래.”

“왜? 보고 싶어 했잖아.”

“안 보고 싶어.”

“이틀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리안이 피식 웃었다. 헤일라는 약간 볼이 발그레해져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이틀 전 리안이 납치하듯 헤일라를 승마장으로 데려갔다. 싫다고 난리를 쳤지만 리안이 물러서지 않을 걸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눈치채고 얌전히 굴었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굉장히 즐겁게 놀았지. 말을 타는 게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윤기가 흐르는 말은 아름다웠고 리안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건 신기한 기분이 들도록 했다. 상쾌하다는 감각을 별로 느껴본 적이 없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리안이 억지로 쥐여 주었음에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어릴 적부터 먹어 보고 싶었던 유명한 제과점의 과자와 케이크도, 생에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 없었던 고급 차도, 유명 악단의 연주회도, 바다 건너 넘어온 보드라운 비단옷도…….

집에 돌아오고 나서 늘 이런 식이었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결핍된 게 무엇인지, 차마 토해 낼 수 없었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이용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여과 없이 과시하며 유혹한다. 아카데미도, 헤일라가 얼마나 학생들을 부러워하는지 알면서 유혹적으로 내밀지 않았나.

저열한 방법이다.

하지만 헤일라는 리안이 미워지는 동시에 간절해졌다. 기형적이고 자연스러운 만족감이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결심을 점점 뭉툭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헤일라가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품게 했다.

그가 강요하는 안락은 사막을 헤매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비렁뱅이에게 바닷물을 한 바가지씩 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마시면 더 갈증이 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대도록 하는. 상냥한 폭력이었다.

헤일라가 거부를 전혀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리안은 싫다고 하면 레테가 있는 집 안에서 정사를 치르려고 들었다. 옷을 벗겨 침대에 찍어 누르는 일은 그에게 힘든 게 아니었다. 실제로 몇 번이나 그에게 안겨야 했다.

그때마다 얇은 벽 너머에 있는 레테에게 신음이 들리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고 리안의 목덜미를 씹어 댔지만, 중간에 멈추는 일은 없었다. 결국, 리안의 뜻대로 헤일라는 제 발로 걸어 그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리안은 언니를 걱정하는 헤일라를 위해 사용인을 두어 레테의 수발을 들게 했다.

오늘도 그래 왔던 수많은 날 중 하루였다. 리안은 호화로운 여관으로 헤일라를 데리고 온 뒤 허겁지겁 탐했다. 그리고 욕망을 원 없이 배설한 뒤에 또 당근을 내밀 듯 제의하는 것이다.

“언니가 기다릴 거야.”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배달부가 바뀌었잖아. 오늘 신문사에 가서 만나 봐야 해.”

“아아.”

은근한 지루함이 묻어나는 탄성이다. 리안은 얼마 전 헤일라가 일간지를 문 앞에 버리듯 두고 가는 배달부를 불러 세운 일을 기억해 냈다.

‘마리는 일 관뒀어요. 말도 없이 그만둬서 이번 달 내내 내가 대신 배달했다고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젊은 여자는 곧바로 뒤돌아 산을 걸어 내려가며 투덜댔다. 헤일라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었다.

이전부터 헤일라가 집에 없을 때 레테가 신문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마리라는 배달부가 레테의 방 안까지 신문을 가져다주었었다. 물론 무료할 언니를 위해 헤일라가 웃돈을 얹어 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우리가 없어도 돌봐 주는 사람이 있잖아.”

신문 건네는 거 정도는 고용인들이 하게 둬. 리안은 헤일라의 변명을 짧게 쳐 내며 웃었다. 그녀 또한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우물대기만 했다. 어느 정도는 집에 돌아가기 위한 변명이 맞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은 공연 못 봐. 집에 갈래.”

그녀는 리안이 이미 아주 비싼 자리로 표를 구해 두었음을 알았다. 언제나 큰 금액을 들여 좌석을 선점해 두고 헤일라가 가지 않으면 돈을 허공에 날리게 된다고 기죽은 척을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더 이상 휘둘리기 싫었다.

방금까지 너무 지독하게 시달리기도 했고, 또…… 아침에 레테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게 계속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 그럼 다음에 가자.”

마음이 넉넉해진 사람처럼 흔쾌히 헤일라의 거부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낯설다. 헤일라는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쪼르르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리안은 쿡쿡 웃었다. 뒤따라 욕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욱, 우욱…… 윽…….”

레테의 각혈이 시작된 것은 다음날 새벽의 일이었다. 끙끙대는 신음에 잠기운이 바싹 달아난 헤일라는 노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언니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보를 부여잡고 있는 레테를 발견한 뒤 침착하게 하얀 천을 턱 아래에 대어 주고 비상약을 꺼내 물에 섞었다. 물을 데울 시간이 촉박해 차가운 물에 풀었더니 가루가 녹는 게 더뎌 애가 닳았다.

“언니, 이거 좀 마셔, 응? 조금 차가우니까 조심해서…….”

헤일라가 간신히 스푼으로 덩어리진 가루 알들을 뭉개고 언니를 일으켰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처럼 이불을 흠뻑 적실 만큼 피를 토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헤일라는 물컵을 쥔 손을 더 다부지게 쥐었다. 평소에 없던 일도 아니잖아. 잘 넘어갈 수 있어.

속엣말을 중얼대며 레테의 아랫입술에 약이 떠져 있는 스푼을 살짝 대어 주었다. 세 스푼, 네 스푼 정도 마신 뒤에는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지켜보던 헤일라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물약을 입에 넣으려던 레테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큽, 커억…….”

발작의 징조다. 얼른, 얼른 환약을…… 무엇을 챙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데도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했으니까. 오늘따라 무언가, 아주 잘못될 것 같다는 불길함이 일었다. 손이 잘게 떨린다.

“헤일라.”

“……리안…….”

드물게 놀란 눈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형편없이 흐느끼는 헤일라를 꼬옥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약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그걸 준비해 올 때까지 그녀는 언니의 옆을 지켰다.

발작을 완벽히 잠재울 방법은 없다. 그저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다량으로 음용한 뒤 운이 좋기를 기도해야 했다. 레테가 가지고 있는 병은 그만큼 지독하고 무서운 병이었다.

처음에는 가끔 몸이 뻐근한 정도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몸의 근육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한다. 병상에 누워 있다 보면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는 호흡 조절이 힘들고 병이 심해지면 발작이 찾아온다고 했다.

온몸이 흉한 반점으로 모두 뒤엉키고 나면 발작하다가 죽을 운명이라 모두 혀를 찼다. 신전에 가서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듣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신전에서 치료받을 수 없는 평민에게는 사형 선고와 진배없다는 말이었다.

“언니, 내 목소리 들려? 응?”

그럼에도 레테는 꽤 잘 버텨 주었다. 독한 구석이 있는 여자는 무수한 발작에도 악착같이 호흡을 되찾고 또렷한 동공으로 다시 제 동생을 마주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헤일라는 경련하는 언니에게 리안이 준비해 온 환을 먹이고 꽉 안아 주었다.

쿵쿵쿵, 지나치게 빠른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려 혼란스러웠다.

“흐, 헉, 헤, 일라, 헤일…….”

“응, 응, 나 여기, 여기 있어. 언니…….”

초점이 흐린 병자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마른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그 손을 제 볼 위에 올려 얼굴을 쓰다듬도록 했다.

“하으, 어디, 어디…….”

“언니 옆에, 옆에 있잖아. 나 여기 있는데 왜…….”

좀처럼 의식이 회복되지를 않았다. 레테의 코와 입에서 자꾸 탁한 색의 피가 흘러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쉬어 가는 목에서는 갈라진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속에서 신물이 역류해 구역질이 샜다. 무슨 감정인지 헤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내면을 되짚어 볼 여유는 없었다. 헤일라는 언제나처럼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언니의 손을 쥐었다. 눈은 뜨고 있는데 죽기 직전의 생선처럼 생기 없이 파닥이기만 하는 레테가 낯설었다. 각혈과 발작을 일으킨 지 한 시간이 넘어가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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