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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25화 (25/97)

25화.

“헤일라, 나…… 아니, 우리는 돈이 필요해요. 그게 있어야 명예도, 권력도 영원한 거죠. 그래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쓰고 있답니다.”

“…….”

“이 세상에 신물을 간절히 원하는 빈민이 아주 많은 건 알고 있죠?”

헤일라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실제로 궁핍과 위험에 항시 노출된 빈민들은 정신적인 고통에도 자주 시달렸다. 가령 사랑하는 부모, 형제, 가족, 연인의 죽음을 겪는다거나, 억울하게 팔다리가 잘려 나간다거나 하는 일들로 괴로워했다. 이외에도 그들이 고통 속에서 감정을 도려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검을 쓰는 데 성공하면 구슬이 나오잖아요.”

아주 비싼. 미아르가 덧붙이며 눈꼬리를 주욱 휘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아 헤일라는 등을 바짝 세웠다.

“감정을 전이시킬 수 있는 구슬.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다른 이를 불행하게 빠트릴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에 홀려 갖고 있던 모든 걸 제 손으로 놓아 버리게 할 수도 있어요! 귀족들에게는 아주…… 탐스러운 황금 사과죠.”

“다른 이요? 구슬을 제삼자에게 쓴다고요?”

경악에 찬 헤일라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신물로 얻은 구슬은 당사자 간의 지극히 사적인 산물로 취급되거나 혹은 정반대로 신의 증명으로 분류되어 신전에서 보관하고는 했다. 그걸 다른 이가 깨트리게 한다니. 상식 밖이었다. 아니, 그건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 될 만한 중죄였다.

“효과는 똑같거든요. 실의, 억울함, 분노, 사랑…… 어떤 감정이든 구슬로 빠져나오게 되면 그 감정의 집약체가 되어요. 그리고 그걸 깨트리면 구슬에 담겨 있던 감정이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게 되죠. 아시는 바와 같이.”

미아르가 잠시 약간 마른 아랫입술을 날름 핥았다. 그녀는 신을 모시는 신관이라기보다는 악마의 하수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대상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가령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분노 같은 감정도 날뛸 수 없는 거 아닌가요?”

헤일라는 평민이었다. 구슬을 깨면 감정이 전이된다는 담백한 사실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슬의 효과에 관해 상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깬 사람이 일찍 생을 마감한다는 속설 정도만 익히 들었을 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구슬을 깬다는 건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 짓이야. 미아르는 애써 마지막 말을 삼키고 숨을 골랐다. 심약한 아기 새가 놀라지 않도록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친절한 신의 사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 * *

“모든 이들은 각각의 감정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요. 이 구슬은 그걸 최상으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답니다. 훨씬 더 쉽게 분노하게 만들고, 훨씬 더 깊게 사랑하게 만들며, 훨씬 더 간단하게 실의를 느끼게 만들어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요.”

이제 이해가 되셨나요? 미아르는 이해가 느린 학생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고 뿌듯함을 느끼는 선생 같았다. 인내심을 갖고 좋은 일을 한 자신에게 약간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헤일라는 그런 미아르에게 찬물을 끼얹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럼 가난한 사람들의 간절함을 이용해서 신전을 배 불린다는 말이네요.”

신전을 둘러보는 내내 온화했던 헤일라의 눈에 경멸이 일었다. 그녀는 미아르에게 잠깐이나마 호감을 가진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착취하고 병에 걸린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신전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가 없는데 정신이 나갔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쓰레기 같은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등가교환이죠.”

“…….”

“그들은 신물을 쓸 기회를 얻고, 우린 그들에게서 구슬을 얻는 거예요. 서로 이득을 보는 셈이죠. 그걸 일방적인 ‘이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미아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구슬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을 선별하는 과정은 꽤 악랄했지만, 앞의 여자는 그걸 모르는데 왜 빈민이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금 싱긋 웃었다. 아무렴 어떻냐는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그제야 귀족으로서의 미아르가 눈에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그녀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럼 저 사람들이 전부 자의로 지원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렇게 많이 죽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자기감정도 잘 모르는데 목숨 걸고 신물을 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주 많이. 기둥 아래를 봤잖아요.”

“검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신전이 사람들을 속였거나…… 전 정말 이해가…….”

“인간이.”

헤일라의 말을 끊어 낸 미아르가 단호하고도 밋밋하게 읊조렸다.

“인간이 거짓말할 수 있는 상대는 인간뿐이에요. 신 앞에서 피조물들이 거짓을 고해 봐야 같잖은 재롱밖에 안 된다는 거죠.”

“…….”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답니다.”

얼이 빠진 눈으로 자신을 보는 어여쁜 여인을 두고, 미아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예쁜데 평민으로 태어나서 그런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조금 더 똑똑하고 야심 있는 여자였다면 함께 사업이라도 도모해 볼 텐데. 아무래도 구슬리기는 그른 것 같다.

미아르는 그냥,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마음으로 헤일라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펠든 백작에 관해 물었었죠? 자, 우리 잘 생각해 보자고요. 그는 아주 욕심이 많고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대부호였죠. 태어나면서부터 조부가 쌓아 둔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갖고 싶은 모든 걸 가졌어요. 부모들 또한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그를 끔찍이 사랑했답니다.”

“…….”

“또 운이 좋게도 그는 꽤 반반한 얼굴을 갖고 있어서, 웬만한 여인들을 모두 자빠트릴 수 있었어요. 가지고 있는 재물을 조금, 제 외모를 조금, 허세 가득한 귀족식 에스코트를 조금 섞어 내기만 하면 모두 간드러진 웃음을 보여 주었거든요. 그런데 저보다 하나 잘난 것 없는 집안의 리아이라는 영애는 그에게 눈길 한 번을 안 줬어요.”

그녀는 헤일라가 알지 못할, 종이 너머의 일들에 관하여 상세히 읊어 주었다. 미아르의 평대로 ‘순진한 평민 계집’인 헤일라는 그 이야기에 혼이 빠진 채 경청했다.

“지독하게 구애했죠. 정말 지독하게.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들어도 치를 떨 만한 방법으로. 왜냐하면 펠든은 정말 자기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날이 가도 가도 영애의 마음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치고 지쳐 악에 받친 펠든에게 리아이가 속삭였어요.”

미아르가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헤일라에게 바싹 다가가 귓가에 속살댔다.

“성물을 이용해 당신의 마음을 증명해 주세요.”

“…….”

“리아이를 가지지 못할 바에야 망가트릴 작정이었던 백작은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죠. 하지만 헤일라, 그가 정말 사랑했던 게 리아이였을까요?”

신의 검은 ‘향하는 대상이 분명한, 진실하고 강렬한 감정’만을 소거해 준다. 정확히 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구슬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이미 세간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대상을 잘못 말하게 되면?

그제서야 눈치챈 헤일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인간을 사랑할 위인이 못 됐어요. 리아이를 향한 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정도.”

헤일라는 머리로는 미아르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이 제 마음에 관해 착각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눈치챘는지 미아르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인간은 의심이라는 칼로 자신을 베지 않는 법이랍니다. 남을 찌르는 방법만 알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예요.”

“…….”

“물론, 똑똑한 인간은 신이 내리는 징벌까지 이용하지만.”

“그게 무슨…….”

“리아이 영애 말이에요.”

적발의 여인이 탐스러운 머리칼을 찰랑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정말 펠든이 죽을 걸 몰랐을까요?”

“다 알고 백작이 검을 쓰게 했다는 건가요?”

“또 그런 표정이네요. 날 의심하는 얼굴이야.”

정곡을 찔린 헤일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아르는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헤일라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의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둘의 눈이 선명하게 마주쳤다.

“어찌 되었든 잘 알아 두세요. 신은 선한 인간의 편이 아니야.”

“…….”

“영리한 인간 편이지.”

곧 공작 부인이 될 테니 이 정도는 알아 두어야 할 테다. 미아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헤일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헤일라를 고이 방 안까지 모셔다 놓고 나갔다.

그리고 리안이 돌아왔을 때, 헤일라는 부러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할 필요도 없는 경험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아 모두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리안과 헤일라는 집으로 돌아왔다. 레테가 있는 곳으로.

* * *

사실 헤일라는 리안과 결혼해서 신분 상승을 한다든가,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손을 잡고 걷는다든가 하는 꿈 같은 건 꿔 본 적이 없다. 언젠가 떠날 사람, 자신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콱 박혀 있었다.

이 다짐은 그가 공작가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더 굳건해졌으면 굳건해졌지, 결코 물러지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겠다 다짐한 건 이 때문이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제 마음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집착이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리안의 마음도 언젠가 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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