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24화 (24/97)

24화.

그가 헤일라를 경계하는 눈빛을 흘긋 던졌다. 누구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가 미아르의 뒤에 약간 제 몸을 숨겼다. 마치 머리만 숨기면 상대가 저를 찾지 못한다고 믿는 토끼처럼.

“됐다, 내 손님이니 그냥 말해.”

“……실패였습니다.”

“흐응…….”

미아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헤일라에게 짐짓 쾌활한 어조로 얼른 들어가 보자고 속삭였다. 문 안쪽에서 나온 이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헤일라는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묘한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미아르가 손을 잡아끌었다.

“저분들은 누구세요?”

“아아, 신관들이요. 제 아래 기수예요.”

신관들에게도 서열이 있다. 기수로 그것이 정해지지는 않지만 미아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평민은 설명해도 알아먹지 못할 생리였다.

둘은 그대로 리듀카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정말로 텅 비어 있었고, 정중앙에 빛나는 기둥 하나만 자리하고 있었다. 헤일라는 홀린 듯 빛기둥을 바라보았다. 빛이 바닥에서 치고 올라와 신전의 천장까지 닿아 있어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가까이 가서 보세요.”

그녀는 초대되지 못한 손님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주춤대며 다가서자 빛기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발치에 매달린 그림자가 고르지 못한 빛줄기 때문에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점점 다가갈수록 하얀 검 하나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것을 살피다가, 묘한 위화감에 눈을 찌푸렸다. 헤일라는 용기를 내서 좀 더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얼굴을 쭉 내밀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왜 그러세요?”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기척을 느끼고 헤일라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명백하게 긴장한 낯에, 미아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신의 권역에 들어와 으레 하는 긴장과는 결이 달랐다. 헤일라는 위험을 감지한 사람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피…….”

“피요?”

“피 냄새가 나요.”

헤일라는 몇 년간 레테를 간호하며 매일같이 피 냄새를 맡았다. 공기 중에 흩어진 미세한 혈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방금 문 앞에서 만난 신관들. 뒤를 돌았을 때 본 신관의 옷자락에 점점이 묻어 있던 빨간 동그라미들…… 그건 핏자국이 맞았던 거다.

설마 했던 헤일라는 성물 쪽으로 다가가면서 애써 부정하던 게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미아르가, 이 공간이 두려워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여기서.”

의미심장한 물음에 미아르는 금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탐스러운 붉은 빛이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런 걸 세간에서는 감이 좋다, 라고 하죠?”

헤일라는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하면 딸꾹질이 샐 것 같았다.

설마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신에게 바치는 산 제물? 가난한 집안의 처녀 계집을 신전에서 사다가 제물로 바친다는 낭설을 들은 적이 있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 나를? 헤일라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에 관해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난, 난…… 처녀가 아녜요.”

미아르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은 들어 볼 요량으로 계속 쳐다만 보고 있으니 헤일라가 급히 조잘거렸다.

“리안이랑 그것도, 그, 잠자리도 이미 많이 했고요. 제물이 되기엔 자격 미달이라는 거죠. 시, 신께 바치는 건데 좀 더 깨끗한…… 그러니까 순결한 인간을…….”

“…….”

“게다가, 게다가 전 심성도 아주 고약하거든요. 막 깨끗한 그런 인간이 아니라서…… 어릴 때는 도둑질도 두 번이나 했어요…… 죄, 죄가 많은 몸…….”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쓸모에 관해 설명하던 목소리가 주눅이 들어 점점 작아졌다. 진짜 여기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겁도 나고…… 헤일라는 울먹거리면서 미아르를 살짝 올려다봤다. 여자는 묘한 표정이었다.

“지금 제가 여기……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에요?”

“하.”

대체 평민들 사이에서 무슨 말들이 도는 건지. 미아르는 허탈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신전은 신에게 인간을 바치지 않아요.”

“그럼 왜 피가…… 사람 피가 아닌가요?”

“사람 피는 맞고.”

“…….”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우리가 죽인 게 아니니까.”

미아르는 턱으로 헤일라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백색 기둥이 울렁울렁 푸른빛을 띠었다. 속에 있던 하얀 검이 유혹하듯 천천히 돌아갔다.

“……누군가 검을 썼군요.”

“그래요.”

“대체 누가…….”

신전 안의 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관이거나, 신전에 거금을 쾌척한 귀족 정도만 사용이 허가되었다. 헤일라는 기억을 되짚다가, 며칠 전 레테와 이야기 나누었던 게 번뜩 떠올랐다.

“펠든 백작?”

리아이 영애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해 검을 쓰겠다 선언했다는 남자. 헤일라는 설마 하는 눈으로 반응을 살폈다.

“네, 그 멍청한 남자. 결국 죽어 버렸답니다.”

너무 뻔해서 지루하다는 태도. 헤일라는 백작이 검을 쓰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꽤 큰 충격을 받았는데, 상대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만 까딱댔다.

“하지만 백작은 리아이 영애를 진짜 사랑한다고…… 그래서 성물로 그걸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잖아요.”

“네에, 그랬죠.”

“그런데 왜 죽은 거예요?”

“…….”

“왜, 왜 실패한 건지 모르겠어요. 자발적으로 쓰겠다고 했는데 실패할 이유가……!”

“순진하신 분.”

미아르가 고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기둥 쪽으로, 헤일라를 지나쳐 다가갔다.

“이리로.”

내민 손이 마냥 깨끗했다.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고운 손이 헤일라를 홀렸다. 그녀는 천천히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미아르는 그대로 헤일라를 훅 끌어 기둥의 코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지척에서 보니 기둥은 훨씬 거대했다. 그리고 기둥의 빛이 쏟아져 나오는 아래는, 놀랍게도 뻥 뚫려 있었다.

“헤일라 님은 특별하니 비밀을 하나 알려 드리죠.”

“…….”

“보답은 됐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호탕하지만 상당히 노골적인 언사였다. 헤일라는 찝찝했지만 백작이 어째서 성물을 쓰는 데 실패했는지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실 된 마음을 도려내 준다는 신의 검. 거짓된 감정을 도려내려 하면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거짓된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개죽음을 감수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성물이 알려진 바와 다른 기능을 하는 걸까?

헤일라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다가 기둥 아래의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라는 미아르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저거, 저거 설마…….”

“쉬이,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부정하지 않는다. 헤일라는 숨을 흡 들이쉬면서 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의뭉스런 신관에게서는 이미 두 걸음 물러난 뒤였다. 갑자기 주변의 온도가 훅 떨어진 것 같았다.

“설마 처음 보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죄송해요. 저는 매일같이 보는 거라 조심성이 부족했네요.”

“정말, 저 안에 있는 게 전부…….”

시신인가요? 헤일라가 차마 마지막 단어를 내뱉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아르는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요. 신전의 자정 작용 덕에 내일이면 싹 사라져 있겠지만…… 아, 저 기둥 안으로 넣으면 무엇이든 하루 만에 다 없어지거든요. 숨겨진 비밀 장소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시신이 매일 저렇게 무더기로 쌓인다고? 헤일라는 구토감이 치밀어 올라 욱욱댔다. 미아르가 깜짝 놀랐는지 한걸음에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무 다정하게 토닥여서 오히려 더 메스꺼웠다.

“어머, 어머, 정말 많이 놀라셨나 보네.”

“욱, 우윽…….”

다행히 토사물들은 금세 바닥에서 지워졌다. 이전에 리안의 피가 지워지던 형상과 같았다.

“미안, 미안해요. 이 비밀을 알게 되면 다들 신기해만 하길래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다. 미아르가 만나 왔던 귀족들은 검을 보면 그저 감탄을 쏟아 냈고 그 아래의, 하루면 썩어 사라지는 시신들을 보고는 신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기둥 아래에 잠든 인간들의 무지몽매함에 혀를 차는 행동은 덤이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구역질을 해 대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태생부터 자신 이외의 타인을 고깃덩어리 정도로 교육받아 온 귀족다운 발상이었다.

그녀는 결국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헤일라를 친히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싱그러운 풀향기가 진동하는 정원 쪽으로 와서야 구역질은 잦아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헤일라가 먼저 물었다.

“……이해가 안 돼요.”

“뭐가요?”

“그 안에 있던 시체들이요! 그렇게 쌓일 만큼 많은 시신이 왜 신전에 있는 거예요? 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실제로 신전의 신물을 쓰는 인간은 오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였다. 기회가 있는 부유한 귀족들은 굳이 신물을 써서 죽음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고, 신관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평민은 돈이 없으니 아무리 간절해도 신물을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펠든 백작의 선언이 큰 파급력을 가져왔던 것이었다.

미아르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끙, 신음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순진한 아가씨가 알아먹을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평민들은 그걸 정말 믿나 보네요.”

“무슨…….”

“신물처럼 돈이 되는 걸 우리가 그냥 썩힌다는 게 말이 돼요?”

신물은 성스러운 신의 검이다. 신을 모시는 신관이 입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불경한 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