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23화 (23/97)

23화.

* * *

“미아르 님……?”

침대에 누워 있던 헤일라가 문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미아르는 짓궂은 눈웃음을 지은 뒤 다시 한번 방 안을 휘 둘러보고 완전히 들어왔다. 잠입을 시도하는 자객 같은 움직임이었다.

“네, 저랍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지?”

집주인이 객에게 물을 법한 인사말이다. 이곳이 신전이고 미아르는 신관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일지도 몰랐다. 헤일라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누구인지 들었나 보네요?”

“저번에는 죄송했어요.”

헤일라는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신관이 고귀한 존재이며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법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먼저 속인 쪽이 미아르이니 이제 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고민 상담까지 해 주지 않았나.

게다가 헤일라는 신관과 신전에 묘한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아르가 평민인 자신을 가지고 논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망상임을 스스로 알았지만, 쉬이 교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아르는 평민의 무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처럼 씩 웃었다.

“에이, 됐어요. 속인 쪽도 내가 먼저였고.”

“하대해 주세요.”

“귀한 분의 연인이신데 그럴 수는 없죠. 혹 불편하신 게 있다면 뭐든 저에게 말씀하세요. 시종들에게 일러두셔도 좋고.”

미아르는 이전처럼 예의를 차리며 살갑게 굴었다. 이전에 속였던 일에 관해 사과하고 신전 생활은 어땠는지 친절하게 물어 왔다. 헤일라는 그런 그녀의 꿍꿍이를 의심하면서도 처음보다는 유해진 말투로 답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대접받아 보기는 처음이라 마음이 약간 흐물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오늘은 신전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리안과 약속을 마친 날 바로 떠나려고 했지만 쉼 없이 시달린 몸에는 조금의 휴식이 필요했고, 결국 둘은 사흘 뒤에 돌아가기로 합의를 봤다.

“마지막 날이신데, 신전 구경을 시켜 드리려고요.”

“신전을요?”

“네, 부디 거절하지는 마시길.”

헤일라가 우물쭈물하자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은 여인이 유혹하듯 되물었다. 함께 가요, 네? 하는 음성이 애처로울 만큼 간절하게 들렸다. 헤일라는 간단하게 거절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신전의 안은 귀족이라 해도 쉽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지도 몰라, 신전을 둘러보는 게 굉장한 영광으로 꼽히기도 했다. 물론 레테의 약을 구하는 일로 신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헤일라는 손톱만큼도 영광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라는 작자가 가장 아낀다는 신전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저 그런 건물에, 그저 그런 물건들밖에 없다면 속으로 잔뜩 비웃어 줄 수도 있을 테다.

“그럼 리안이 돌아오면 같이…….”

“아니!”

리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미아르의 표정이 돌연 굳었다.

“여자들끼리 편하게 둘러봐요, 우리.”

“리안이 신전 안을 궁금해할지도…….”

“제집처럼 드나드는 분이세요. 이미 다 봤는데, 또 둘러보자 하면 피곤해하실 거예요.”

아, 그런가. 헤일라는 일리 있는 설득에 간단하게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굳이 리안과 동행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헤일라는 은근히 눈치가 빠른 듯하면서도 리안의 일에 한해서는 꽤 쉽게 속아 넘어갔다. 미아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 몰래 접근했는데 들키면 곤란했다.

“게다가 그분은 저한테 좀 화가 나 있으시거든요. 왜, 저번에 제가 헤일라 님께 다가간 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봐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만약 그 뒤에 헤일라와 리안이 화해하고 타협을 보지 않았다면 리안은 정말로 미아르에게 분풀이를 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어찌어찌 잘 해결되어 그는 굳이 처벌하지 않는 아량을 보였고, 미아르는……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기 위해 다가왔다.

“리안이 많이 화내던가요?”

그의 폭력성을 날것 그대로 지켜본 바가 있기 때문에 헤일라는 미아르가 걱정됐다. 그녀는 진심을 담은 눈으로 미아르의 눈을 마주치며, 무엇이든 저가 도울 일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일렀다. 미아르는 이토록 쉽게 남을 염려하는 헤일라의 순진함에 다시금 놀랐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어차피 신전 안에서 살생은 금하고 있으니.”

“……리안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는 애가 아녜요.”

맞는데. 미아르는 속으로만 받아치며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나마 신전 안이 아니었다면 이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짓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신전 안에서는 인간을 죽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살생했을 때 신의 저주를 받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살생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은 신이 창조한 것. 창조주의 공간에서 피조물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된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경전에서는 이 때문에 신이 저주를 내린다고 서술해 두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전은 타국과의 교류를 위한 담화의 장이나, 전쟁 중 황제의 피난처로 자주 사용되었다.

“네, 네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럼 이제 나가 볼까요?”

미아르가 손바닥을 두 번 치자 옷가지와 장신구를 든 시종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장면에 눈만 끔뻑이자 미아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여러 옷을 권했다. 전부 흰색이었지만 다소 화려하고 야릇한 디자인들이라 옷을 고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헤일라는 가죽 벨트에 깔끔한 장식 하나만 달린 새하얀 튜닉 드레스를 선택했다. 어깨의 금색 피불라 브로치가 그녀의 눈동자 색과 아주 잘 어울렸으나 눈동자는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미아르는 그 모습을 보고 왜 얼굴의 반절을 가리고 다니냐며 아쉬워했다. 헤일라는 그저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미아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종의 귓속말을 듣고 급히 헤일라를 이끌었다. 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헤일라의 환심을 조금이라도 더 사 둬야 했다.

* * *

“자, 여기가 셀테리움이랍니다. 신관들이 매일 저녁 모여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에요. 저 중앙에 걸려있는 펜타곤 모양 보석은…….”

미아르가 설명하는 내내 헤일라의 입은 다물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웅장함과 화려함이 벽이며 바닥, 하다못해 천장까지 뻗어 있었다. 머물렀던 방도 호화로웠지만,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너무, 너무 예뻐요…….”

“후후, 만족스러워하시는 걸 보니 기쁘네요.”

헤일라는 문득 제 모습이 얼뜨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을까 염려되어 입을 딱 다물고 침착하려 애썼다. 그러나 처음의 다짐과는 정반대로 현세의 공간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미아르는 그런 헤일라를 보고 알 만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경계심은 잘 벼려져 있지만 둥근 천성이 비죽비죽 솟아올라 속내를 감추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 게 꽤 귀여웠다. 미아르는 오늘 헤일라를 완전히 뒤로 넘어가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꽤 들떴다.

“이다음은 성물을 보러 갈까요?”

“성물이요? 신의 검?”

성물을 입에 담자마자 헤일라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미아르가 후후 웃으며 헤일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보석이며 사치에 대해 손톱만큼도 모르는 평민 계집은 이 정도 아량에도 몹시 흥분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하기야, 신전을 둘러보는 것과 성물을 눈에 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진짜 보여 주시려고요?”

“물론이죠. 저는 꽤 유능한 신관이랍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신전은 정말로 넓어서, 반 시간 정도는 정원을 통해 걸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전의 가장 안쪽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세니르 신전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리듀카, 신의 심장이라 불리죠.”

지붕이 첨탑 형식인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둥근 돔 모양 지붕의 건물은 색 또한 유독 튀었다. 온통 붉은 벽돌들로 촘촘하게 쌓아 올려진 건물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조금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성물을 보관하고 있는 성스러운 장소라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지키고 있는 시종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누가 지키나요? 성물…… 신의 검을 누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아아.”

미아르가 씩 웃었다. 그녀는 태양이 뜨고 지는 이유에 관해 묻는 어린아이에게 세상이 뒤집혀도 바뀌지 않을 진리에 관해 읊는 사람처럼 조곤조곤 알려 주었다.

“성물은 결코 이 문을 지나지 못해요. 신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물건이 제 영역을 떠나는 걸 좌시하지 않는답니다.”

“…….”

“그러니 이 앞에 인간 따위를 세워 지키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죠.”

헤일라는 처음으로 미아르가 진짜 신관처럼 보였다. 신처럼 고귀해 보여서라기보다는, 신의 본질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어서, 그랬다.

“자, 들어가서…….”

그녀가 헤일라를 문 쪽으로 이끌려고 할 때였다.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겹겹이 주름진 프릴이 달린 머리쓰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튜닉은 헤일라가 입은 것과 같은 고급 재질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져서 발목까지 내려왔다. 두르고 있는 망토 또한 끝단에 맺혀 있는 섬세한 자수가 돋보였다.

헤일라는 미아르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이제까지와는 자못 다른 차가운 음성으로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이었나?”

“예.”

“결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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