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런데 그걸 볼 때마다 썩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헤일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아이에게 비정상적인 행위를 강요한 공작에 대한 분노와, 잘못된 가르침으로 엇나가 버린 리안의 가치관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하는 아득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헤일라는 아주 조금의 이야기만 듣고도 리안이 아버지를 죽이려는 이유가 납득되었다. 분명 공작은 아이가 커 갈수록 더 심한 학대를 자행했을 테다. 정상이, 아니었다.
“처음에 네가 좋아졌을 때는 박제라도 해야 하나 싶었어. 그런데…… 역시 난 살아 있는 네가 아니면 안 돼.”
당연한 상식을 엄청난 진리인 것처럼 엄숙하게 알려 주는 모습이 묘했고, 또 동시에 안쓰러웠다. 헤일라는 이런 순간에 늘 약해졌다. 리안이 마땅히 배워야 할 감정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굴 때, 그리고 그게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그녀는 잠시 눈을 꾹 감았다. 갇혀 있는 동안 그가 보였던 과한 집착증과 더불어, 애정을 갈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헤일라, 여기 좋지? 응? 좋은 거지?’
‘아, 아응, 흐아아!’
‘흣, 내가 매일 기분 좋게 해 줄 테니까…… 나랑 같이, 평생…….’
‘싫, 어, 아아!’
‘같이 있자. 나 버리지 마…….’
강제적으로 취하면서도 절절 끓는 눈빛은 어쩌지 못하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파하면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그녀가 자지러지는 부분을 어떻게든 찾아 집요하게 굴면서 끊임없이 반응을 확인하고 몰아붙였다.
마지막에 하는 말은 항상, 영영 함께하자는 애원이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리안의 이런 행동들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헤일라는 그의 불행을 듣고 나서까지 리안을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어? 항상 그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아니.”
“…….”
“평소에는 말을 잘 안 했지. 손을 올리는 게 먼저였거든.”
리안은 사실 아비의 가르침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육체적 고통은 인간을 통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박제. 좋아하는 걸 영영 가질 수 있는 방식이니 역시 나쁘지 않다. 다만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꽤 영리한 편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고를 줄 알았다. 헤일라가 자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듣고 꺼림칙해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 아파한다는 걸 눈치챈 남자는 그걸 효율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타센, 아니 아버지는 날 아주 싫어했어. 밤마다 체벌실로 불러서 나를 매질하고…… 아, 한 대 맞을 때마다 나는 괴물이라는 말을 하도록 훈련시켰어. 여기에 상처도…….”
그가 이전에 산에서 굴러 찢어졌다고 둘러댔던 갈비뼈의 상처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찔렀지. 내가 자고 있을 때. 가까스로 피해서 도망 나왔고, 너를 만난 거야.”
리안과 헤일라는 산에서 만났다. 그가 피를 줄줄 흘리는 걸 보고 간단한 치료를 해 준 게 둘의 인연이었으니까. 정말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을 만큼 큰 상처라 도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아버지로부터 얻은 자상이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헤일라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손으로 두 입을 가렸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물기가 한가득인 금안을 홀린 사람처럼 보면서 리안이 섧게 웃었다. 가증스러웠지만 아주 훌륭한 연기였다.
“어머니가 날 낳다가 돌아가셨거든.”
“그게 이유야?”
그가 힘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해?”
결국, 헤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둥, 너는 결코 괴물이 아니라는 둥 횡설수설하며 히끅댔다.
리안처럼 맞으면서 자란 건 아니지만 헤일라 또한 혹독한 매질과 굶주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당한 학대도 끔찍했지만, 옆에 항상 레테가 있었고, 혼자가 아니어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리안은 계속 혼자였을 것이고,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을 거다. 그녀는 이제 그의 비틀린 애정 표현과 강압적인 행동의 원인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리안은 자신을 위로하는 헤일라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벅차서 그대로 파고들어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얼굴을 부비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신전에 들어와 사이가 나빠진 뒤로는 해 주지 않던 애정 표현이었다.
“고마워, 헤일라.”
그녀의 품에 파고들어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음산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네 행동은 잘못됐어.”
한껏 딱딱함을 가장해 이야기했건만, 리안은 영 집중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헤일라는 엉엉 운 다음 머리가 핑 돌아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성을 되찾고 리안을 불러 앉혔다. 두 팔을 허리에 얹은 모습은 자못 비장했다.
“네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런, 이런 건…….”
“하루 종일 섹스하는 거?”
“아니!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하는 게 문제라고!”
헤일라는 얼굴을 붉히고 빽 소리쳤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남자는 적나라한 단어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너도 좋아했잖아.”
“아냐.”
“맞을걸. 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아래에서 물이 질질…….”
“그만!”
그가 불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헤일라는 진지한 얼굴로 사실을 짚었다.
“내 몸이 어떤 반응을 보였건 그건 상관없어. 내가 싫다고 거부했고, 네가 그걸 묵살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약간 굳어졌다.
“이제 내가 싫어졌다는 거네?”
“……그건.”
둘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헤일라의 기세가 약간 주춤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 사이로 리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뭐……?”
“그렇게 안 했으면 날 버렸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조금 미움 받는 쪽이 나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며 제 앞의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헤일라, 나는 귀족이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여자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아비가 어떤 인간이든, 귀족들은 늘 이런 식이지. 잘못이고 아니고는 크게 상관없이.”
“…….”
“그러니 네가 날 떼어 내려고 하면, 난 언제든 ‘이런 방식’을 쓸 거야.”
아이가 생기면 더 좋을 테고. 그가 마지막 말을 정확한 발음으로 읊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헤일라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망연하게 그와 시선을 맞추는 여자는 어딘가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안은 그런 모습까지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나쁜 생각은 버려, 알았지?”
“리안.”
“레테 때문에 이러는 거 알아.”
차마 답하지 못하는 헤일라를 보며 리안이 눈을 휘었다.
“난 그 애를 죽여서라도 널 가지게 될 거야. 그러고도 남지.”
“너…….”
이 정도면 퍽 귀여운 겁박이었다. 동시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예상대로 헤일라는 안타까울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내 옆에만 있어 주면, 그러지 않아.”
“…….”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웃는 모습이 예쁘거든. 그러니까 기회를 주는 거야.”
달콤한 과자로 순진한 아이들의 꿰어 내는 마녀처럼 그가 속살거렸다. 레테를 치워 버리기 위한 판을 다 짜 두어서 돌아가려는 것임에도, 그녀를 위하는 척 가증을 떨었다. 그리고 헤일라는 그의 유혹에 아주 간단하게 넘어왔다.
“……좋아.”
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나려는 순간, 헤일라가 어떤 조건을 붙였다.
“대신 약속해.”
“약속?”
흥미로움을 담은 물음이었다. 헤일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족쇄 풀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그리고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최소한의 안전선이었다.
헤일라는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사고방식이 달랐다. 리안은 정말로 헤일라에게 미쳤고, 무슨 수를 써서든 제 옆에 둘 심산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녀 정도의 평민을 얽어 평생 가둬 놓을 만한 능력이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의 선택에 따라야 했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언니를 지키기 위해 하나의 보루를 갖고 있어야 했다.
“……특히 언니한테 해코지하지 말아 줘.”
결연함이 묻어나는 말투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리안은 그것이 귀엽다고 느끼면서도 괜히 괴롭히고 싶어졌다.
“그래, 좋아. 그런데 내가 만약 그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할 생각인데?”
“……끝이겠지.”
“우리 사이는 그런 걸로 끝나지 않아.”
그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단언했다. 헤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네가 날 안 놔줄 테니까.”
“…….”
“그냥, 내 안에서 너랑은 끝이라는 말이었어. 그거 이외에는 별거 없을지도 모르지.”
리안은 사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레테를 끔찍하게 여기는 헤일라가 또 거슬리는 말을 했다,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이런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들키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그리 허술하게 준비하지도 않았으며, 어찌 되었든 그녀는 영영 그의 소유였으니까.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그저 알았다고 대충 답하면서 헤일라에게 키스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