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21화 (21/97)

21화.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뭐가 불만이야, 응?”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금 내 꼴을 봐!”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발에 달린 족쇄가 달그락댔다. 리안은 무감하게 한 번 시선을 주고 여상한 태도로 답했다.

“이게 뭐.”

“너…….”

“내가 시작하기 전에 말했잖아.”

“…….”

“쉽게 안 끝낸다고.”

이불 아래 살짝 내밀어져 있던 한쪽 다리가 아래로 죽 끌려 내려갔다. 남자는 발목을 억세게 쥔 채로 천이 덧대어져 있는 속옷을 벗겨 낸 뒤 음부가 벌어지도록 했다. 고여 있던 정액이 꿀렁이며 흘러나왔다.

“이렇게. 한번 시작하면 내 자지 가장자리가 헐어 버릴 때까지 할 거였다고, 처음부터.”

“읏, 이거, 놓…….”

“넌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해 주기로 했으니까.”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처럼 결백해 보였다. ‘정말로’ 헤일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있다. 헤일라는 그제야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리안의 눈동자에 정제되지 않은 난폭함이 일렁였다.

“한 번 대 주고 날 떼어 내려고 했으면서 이 정도로 지치면 안 되는 거 아냐?”

“……한 번 하고 떨어져 나갈 마음, 처음부터 없었잖아.”

“…….”

“그리고 날 먼저 속인 건 너야. 나보다 더한 기만으로 사람 바보 만든 건 너라고!”

대화가 도돌이표로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둘이 대화를 시작하면 꼭 이렇게 맺어졌다. 리안이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힌 직후부터 헤일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삼 년 넘게 함께 생활하며, 갈 곳이 없다는 핑계로 눌러 붙어 있던 리안이다. 부모도 형제도 없다는 말로 동정심을 자극해 왔던 사람이 알고 보니 엄청난 권력을 쥔 공작가의 아들이었다고 하면 누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게다가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는 헤일라를 몸으로 찍어 누른 건 리안이었다.

“기만.”

“그래! 넌,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 내 부모님 이야기도…… 다 알고 나한테 그런 거짓, 거짓말…….”

부모 이야기를 하는 헤일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는 그녀는 언제나 유약했다.

“난 그런 적 없는데.”

삐딱하게 입술을 말아 올린 리안이 대꾸했다. 헤일라는 울컥한 목소리로, 그러나 누가 들을까 봐 낮게 읊조렸다.

“너도, 아니 네가, 네 부모님을…….”

죽였지. 차마 문장을 끝맺지 못하는 헤일라에게 리안이 친절을 베풀었다. 그녀는 패륜을 직접 입에 담은 남자보다 더 사색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큰 방에는 둘밖에 없었다.

“그래. 하지만 휴리트 공작은 살아 있어.”

언젠가 리안이 했던 고백이었다. 저가 부모를 죽인 패륜아라도, 괴물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헤일라는 그때 이 애를 끝까지 돕겠다고 다짐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남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 주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부모를 살해한 일에 관해 말하는 그가 너무 지쳐 보였고 또 그 얼굴이…… 레테와 닮아 있어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게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헤일라는 리안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레테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꾸며 낸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리안이 해 온 거짓말과 자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돌이켜 보면 아예 불가능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한테 제대로 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있잖아.”

“…….”

“네가 이렇게 구는데 내가, 내가 어떻게 널 믿어?”

억울함이 덕지덕지 발린 원망의 말들이 그에게 박혔다. 리안은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헤일라는 어쩐지 마주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으나 애써 참았다.

“그래.”

무언가를 결정한 듯 단정적인 투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남자의 변화에 조금 긴장했다.

“네가 말해 달라고 하면 말 못할 것도 없지.”

리안은 내키지 않는 게 역력한 얼굴로, 그러나 꽤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대신에 무서워하면 안 돼?”

헤일라는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이 그녀를 칭찬하듯 머리칼을 한 번 쓸어내렸다.

“너한테 한 말 중에 거짓말은 없었어.”

자신이 원하는 진실 앞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헤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샅샅이 훑는 리안을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죽었고.”

“…….”

“아버지는 내가 곧 죽일 거야.”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헤일라는 꿈에서도 듣지 못할 엄청난 고백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타론 제국의 공작을, 제 아비를 죽일 계획이라 털어놓는 그의 말을 온전히 믿어도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리안이 거짓말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맞다면, 그가 계속 헤일라의 집에 머물렀던 게 설명된다.

그녀는 퍽 간단하게 털어놓은 리안에게 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입술을 물고 뜸을 들였다. 부모를 죽이려는 이유에 관해서 캐물어 그의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보다도…… 그의 슬픔을 알고 이해하면 용서하게 될 까봐 두려웠다. 게다가 리안의 불행을 귀로 직접 들으면 어떻게든 감싸 주고 싶을 것 같았다. 그녀는 유약한 성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아무렇지 않아?”

“뭐가?”

“실수로 죽인 거랑, 때만 노리다 뒤를 쳐서 죽이는 건 꽤 다르다고들 생각하던데.”

그는 여전히 관찰하는 눈이었다.

아, 그렇구나. 헤일라는 그제야 리안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

“그냥 슬퍼.”

무언가 울컥하는 게 그녀의 속에서 튀어 올랐다.

“……세상에는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많으니까. 내가 널 그런 이유로 미워할…… 리가 없어. 그냥 네가 불쌍해서 슬프기만 하다고.”

자식을 물건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제 부모를 떠올리는 눈이 점점 흐려졌다. 헤일라는 평생 동안 부모가 죽기를 바랐고, 복수심에 찌들어 썩어 가는 몸으로 그들을 죽인 언니를 이해했다. 그래서 레테를 도와 시신을 처리했던 거다. 그러니 그녀가 리안을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다행이다.”

리안은 한결 편해졌는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헤일라를 껴안았다. 오랜만에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내 긴장이 풀린 그녀도 힘을 죽 풀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럼 신전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공작 정도가 되는 권력자가 아니면 신전 출입은 어려웠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드물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결국, 전부 털어놓기로 한 남자는 헤일라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설명했다.

“내 친척이 날 도와주고 있거든.”

친척? 되묻는 목소리가 퍽 천진했다.

“내 어머니의 자매.”

헤일라가 헙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휴리트 공작이 공주와 혼인했음을 모르는 제국민은 없다. 게다가 하나뿐인 공주의 자매는, 이 나라의 황제였다. 그녀는 너무 먼, 아니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리안이 그녀를 더 꽉 얽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네.”

“…….”

“넌 나랑 못 헤어져.”

그가 그렇게 말해 봐야 헤일라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와 자신의 신분 차이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너무 한꺼번에 들이닥친 충격적인 사실들에 머리가 얼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안과 자신은 안 될 사이였나 보다.

헤일라는 그렇게 자조적으로 웅얼거리다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흉흉하기 짝이 없다. 이제 리안의 광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헤일라는 이게 아주 위험한 신호임을 눈치챘다.

“나 또 궁금한 거 있어.”

한쪽 눈썹을 올린 그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그녀를 빤히 들여다봤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리안은 굳이 뒤에 말을 다 듣지 않고도 의중을 눈치챘다. 신분이나 재력을 이용해서 충분히 자신을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 참아 온 것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리라.

“아.”

그가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어 몇 개를 고르다가 상냥하게 말했다.

“배운 대로 하면 네가 너무 가엽잖아.”

헤일라의 얼굴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그러나 그것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리안은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리안이 다섯 살 정도 먹었을 때였다. 그는 날이 좋은 봄날, 귀여운 토끼를 발견하고는 잡아 가두었다. 돌보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우리를 만들어 먹을 것을 주고 매일 쓰다듬었더니 그 토끼는 길이 들어 아이의 무릎으로 다가오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리안은 토끼를 보면 기분이 좋았고 조금은 간질거리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감정이라고는 아프다, 싫다 정도만 학습해 왔던 아이는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토끼에게 이름을 지어 준 뒤에는 퍽 기분이 상쾌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는 아버지가 명령한 대로,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매일 보고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럼 그 토끼를 영영 네가 가지면 되겠구나.’

리안의 말을 들은 아비는 작게 속삭이며 아들을 제 서재로 안내했다. 그 방 안에는 여러 동물이 있었다.

‘저렇게 만들면 된다. 네가 직접 만들어 주어야 의미가 있겠지.’

데면데면하지만 하늘 같은 아버지였다. 저가 따라야 할 방향이라 학습하였으며 의구심을 가진 적 없었다. 그래서 리안은 공작의 말대로 했다. 그 토끼는 공작의 방에 있던 수많은 동물 중 하나처럼 박제되어 리안의 방을 장식하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