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20화 (20/97)

20화.

가까스로 호흡을 찾은 레테가 제 목을 쥐고 더듬거렸다. 리안은 부드러이 레테의 금발을 쓸어내렸다. 헤일라의 머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머리 색에 그의 다정함이 섞여 들었다. 소름 끼치는 손길이었다.

“너, 하, 역시 미친놈이야.”

“하하.”

리안은 퍽 유쾌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재미있는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나처럼 진창에서 구른 년이 미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기적 아니겠어? 공작 아들로 태어나 호사 누리고 산 누구와 비교하면 섭섭하지.”

“그 미친놈한테 동생을 착실히 팔아넘기면서도 뻔뻔해. 그 점이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만.”

리안은 무익한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은지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주머니에서 종이에 곱게 싸인 무언가를 꺼내 레테에게 건넸다. 목을 가다듬으며 그걸 펴 본 레테의 얼굴이 옅게 찌그러졌다.

“매일 붉은 조각을 하나 먹고, 삼 일에 한 번 검은 약초를 먹으면 돼. 각혈을 유도하는 독, 그걸 해독하는 명약이니까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러다가 죽으면?”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

리안이 안타까움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흐응.”

“이번에 성공하면, 넌 바라던 대로 신전에서 평생 치료받으면서 살게 돼. 물론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사를 누리면서.”

헤일라는 영영 못 보겠지만. 리안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그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레테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둘이 가장 처음 ‘거래’를 시작했을 때 리안이 알려 주었던 바니까.

“신전으로 날 보내야 한다고 헤일라를 꿰어 내려는 셈이구나.”

“비슷해.”

레테는 평온해 보였다. 실상 레테의 치료를 담보로 헤일라의 모든 것을 취하려는 속내를 빤히 알았음에도 분노하지 않는 낯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안 될걸. 날 떨어뜨리고는 살지를 못하는 애라서.”

“……마치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 같은데.”

“현실이 그래.”

오만한 눈빛. 리안은 가끔, 헤일라에 한해 저런 눈을 하는 레테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동생이 자신에게 보이는 책임감에 저열한 희열을 느끼는 게 고스란히 비쳤다. 헤일라 앞에서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동생을 증오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순간에는 꼭…….

리안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헤일라를 사랑하는 것도, 헤일라가 사랑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리안 휴리트 하나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 작정이었다.

“모르는 일이지.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

“네가 죽으면 평생 함께 살기로 약속했어.”

오늘 그와 대면하고 처음으로, 레테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것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리안은 짜부라진 벌레를 으깨는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짐밖에 안 되는 언니가 아무리 발악해 봐야, 마지막에 옆에 남는 건 나라는 걸 그 애도 아는 거지.”

레테의 고개가 아래로 조금 기울었다. 리안은 그녀가 아주 조금쯤은 비참함에 찌그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쿡.”

그러나 돌아온 건 천박함을 띤 웃음소리뿐이었다. 레테와 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고요함이 폭풍처럼 둘 사이를 헤집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레테 쪽이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

“근데, 내가 살아 있는 한 헤일라는 절대 날 못 버려.”

레테가 제 윗옷 가장 첫 단추를 끌렀다. 그리고 옷을 약간 젖혔다. 목 끝까지 올려져 있던 천이 내려와 쇄골 아래쪽까지 드러냈다.

“이거에서 절대 못 벗어나.”

흉측한 반점이었다. 검은 반점들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미 병증은 생명의 모서리까지 침범한 게 분명했다. 리안은 저 병을 알고 있었다. 지독한 불치병.

보통 매음굴의 여자들이 주로 걸리는 성병 중 하나였다. 저 병을 얻으면 매음굴에서도 쫓겨나게 될 정도로 지독한 병이었다. 반점이 몸에 퍼진 뒤에는 몸이 썩어 들어간다. 한 점의 동정도 비치지 않고 관찰하는 리안이 우스운지 레테는 낄낄거렸다.

“이건 동생을 살리려는 갸륵한 우리 부모의 몸부림 때문에 얻은 거거든.”

늙은 귀족의 후처로 헤일라를 보내 한몫 챙기려 했던 부모들. 그리고 헤일라가 걸린 돌림병.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 돈. 헤일라보다 외모가 못한 레테를 사창가에 팔아 돈을 마련한 부모. 그 돈으로 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몸을 찾은 헤일라.

병을 얻은 대신 자유의 몸이 되어 부모를 죽인 레테. 가족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사는 가여운 헤일라. 그래서 헤일라는 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라 할지라도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시켜서 그 구질구질한 머리로 몇 년간 돌아다니는 꼴을 보라고.”

외모를 꾸미지 않는 것도 오직 레테 때문이었다. 레테는 어느 날, 헤일라의 머리칼을 잡아채 서걱서걱 잘라 냈다. 지저분하게 잘라 만든 앞머리를 보고 황망해하는 헤일라를 두고, 그녀는 저가 되었다고 할 때까지 그 꼴로 다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도 이상으로 앞머리가 길어질 때마다 쥐어뜯듯 머리칼을 잘라 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조용히 복종하는 쪽을 택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곧 여상한 태도로 말을 받아쳤다.

“글쎄. 그래도 신전에 기어들어 가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헤일라가 널 버리기를 간절히 바라야 할 거야.”

“…….”

“징그럽도록 실리를 따지는 편이니 잘 알겠지만.”

“그래…… 하지만 신의 뜻은 우리의 바람에 있지 않다고들 하니.”

제국의 유명한 격언이었다. 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당장 레테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방을 나갔다.

잠시 사늘한 공기가 여자의 주변에 감돌았다.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레테는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모든 표정을 지우고 천천히 풀어진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는 모든 게 지루한, 초연한 노인 같은 나른함을 두르고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하긴.”

너나 헤일라나 사랑에 눈이 멀어서…… 레테는 입을 위로 쭉 찢어 비죽 웃었다. 저를 경멸스러운 눈으로 깔아보던 리안의 눈빛이 떠올랐다. 신전을 담보로 그녀를 겁박하던 모습도. 그 속에 담긴 동생에 대한 염려도.

레테는 그 점이 너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신전에서 받는 치료 따위, 레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데. 그녀가 정말 원하는 건 언제고 단 하나였다.

“그 애는 내 거야.”

헤일라가 누구를 선택하든 그녀는 영영 제 것이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매여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신의 안배.

레테는 남자가 집 밖으로 나간 걸 침대와 붙어 있는 창문으로 확인한 뒤, 그것을 힘겹게 열었다. 총총, 난간에 앉아 있던 작은 새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의 손길이 익숙한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가냘픈 손 위로 올라왔다.

레테는 능숙한 손길로 새의 왼발에 묶여 있는 끈을 풀어냈다. 협탁에 놓아둔 물컵 안에 끈을 넣고 몇 번 흔든 뒤 꺼내 이불 위에 펴 놓으니 점점 불어나며 작은 종잇조각이 되었다. 그 위에는 울긋불긋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흐응.”

레테는 문자를 주욱 읽어 내린 뒤 흐물흐물해진 종이를 잘게 찢어 새의 앞에 내밀었다. 전서구는 축축한 조각이 제 먹이라도 되는 양 빠르게 먹어 치웠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그녀는 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날아가지 않는 새를 향해 속삭였다.

“얼른 네 주인에게 돌아가렴.”

어울리지 않는 친절한 음성이 작위적이다. 작은 새는 여전히 고개를 까닥이기만 하면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테는 드물게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가기 싫으니? 응?”

그러고는 손 위에 작은 생명을 얹은 뒤 창밖으로 부드럽게 던졌다. 미물에게 향해야 할 곳을 일러 주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공작가로.”

그 새끼의 아비가 기다리잖니. 마지막 말을 다 읊조리기 전에 새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레테는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던 새를 더듬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창문을 부드럽게 내려 닫았다. 나붓하게 침대에 등을 기대는 모습은 고요함을 머금고 있었다.

레테는 자신이 지금 무슨 기분인지 느리게 되짚어 보았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머릿속에 선들이 제멋대로 뒤엉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저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속내는 신도 모를 만큼 깊고 아득하니.

03. 탈피샘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준비했는데.”

풀이 팍 죽은 목소리. 하지만 헤일라의 눈에는 가증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침대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알량한 수작이다. 그녀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침묵을 지켰다. 리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계속 이렇게 굶으면 몸 상해.”

“내 몸 걱정을 하긴 하는구나.”

비아냥을 담아 잔뜩 꼬아 놓은 목소리가 그를 힐난했다. 리안이 자신의 입으로 지위를 실토한 다음 날부터 또 열심히 흘레붙었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남자는 침상에 털썩 앉았다. 가지런히 대령 되어 있는 음식들을 흘긋 보고 다시 헤일라를 마주 본다.

“그럼 오늘도 이것들은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겠다는 말이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앞만 응시했다. 리안은 잠잠히 지켜보다가 표정 변화 없이 간이 테이블을 잡았다.

와장창! 곧이어 식기들이 깨지고 음식이 질펀하게 나뒹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확인한 헤일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미 리안이 테이블을 들어 바닥에 내던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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