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19화 (19/97)

19화.

헤일라는 그 간단한 사실만을 머리에 욱여넣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장 힘으로는 리안을 제압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우욱…….”

헤일라는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는 리안의 팔을 꼭 쥐고 한껏 괴로운 연기를 시작했다. 리안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한 듯 잠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왜 그래? 응?”

“읏, 욱…… 갑자기 또 토, 할 것 같아서…….”

일견 그의 눈빛에 묘한 기대감이 스몄으나 헤일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리안은 순식간에 차분한 모습으로 돌변해 헤일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람을 불러올게.”

리안은 다리 사이에 불룩 솟아 있는 성기를 수습하지도 않을 채 여상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조금만 참…….”

그리고 무자비한 포식자가 침대를 빠져나가자마자, 헤일라는 있는 힘을 다해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이번에는 문 쪽이 아니었다. 그녀가 노린 쪽은, 도자기가 깨진 곳이었다. 꽤 재빨리 몸을 놀린 여자는 저가 깨트린 도자기의 파편 중 가장 뾰족한 것을 골라 집었다. 작은 손이 퍽 다부지게 그 조각을 쥐고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움…… 움직이지 마.”

서투른 협박이지만 목소리는 꽤 앙칼졌다. 리안은 가는 목에 닿은 도자기 조각이 떨리는 걸 건조한 눈으로 지켜봤다. 무채색만 보이는 사람처럼 메마른 표정이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자신이 쥔 패를 가지고 태연한 척 연기하려 노력했다.

“지금 안 내보내 주면 이대로 내 목을 그을 거야. 죽어 버릴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이런 엉성한 겁박에 묶이지 않았다. 리안은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힘을 줘서 목 안쪽으로 옅게 찔러 넣은 조각 때문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는데도 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바짝 독이 오른 표정의 여자가 악을 썼다.

“오지 말라니까! 허억……!”

헤일라는 저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내보이는 리안에게는 이런 방식이 아주 잘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걸 수 있는 희망이 이것뿐이기도 했다. 그를 찌르겠다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헤일라는 자신이 연기로도 그에게 흉기를 들이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남자의 반응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뒷걸음질 치는 일뿐이었다. 곧 등 뒤에 벽이 느껴졌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헤일라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여전히 목에 조각을 가져다 대고 발발 떨고 있었다. 리안은 그 손을 뚫어지게 보다가 흉기를 든 손을 쥐었다. 정확히는 목을 겨냥하고 있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잡았다. 되레 놀란 건 그녀 쪽이었다.

“나쁜 물이 들었네.”

“…….”

“역시 레테랑 같이 살아서 좋을 게 없어. 이런 거나 배우고.”

보고서를 읽는 사람처럼 고저 없는 말투였다. 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유리 조각을 세게 쥐어 남자의 손에 상처가 난 까닭이었다.

헤일라는 놀라 도자기 조각을 놓았다. 그러나 리안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이제는 피가 줄줄 샜다. 제 목을 긋겠다고 협박하던 여자는 리안의 상처에 방금의 배로 덜덜 떨었다. 이러다가 손쓸 수 없이 상처가 깊어지면, 손에 문제라도 생기면…….

헤일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아, 그러지 마! 놔! 그거 놓으라고!”

그녀가 무슨 얼굴로 어떤 말을 하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 또한 한 곳에 계속 머물렀다. 옅은 상처가 나 있는 헤일라의 목. 결국 주룩주룩 흐르는 피에 헤일라가 울음을 터트릴 때 즈음 되어서야 리안은 손을 폈다.

그녀는 상처를 살피려고 리안의 큰 손에 제 손을 더듬더듬 가져다 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고개가 옆으로 확 넘어갔다. 리안이 헤일라의 머리칼을 쥐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리안이 목덜미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헤일라의 입에서 흐르는 고통에 찬 신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네가 아픈 게 정말 싫다고 생각했었는데.”

“윽, 흣…….”

“이렇게 자꾸 네 몸에 상처를 내면, 네 팔이라고 해도 자르고 싶어질 것 같아.”

“…….”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러면 안 돼, 응?”

꾸며 낸 웃음. 또 눈은 서늘한 채 입꼬리만 올린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잡힌 머리칼에서 올라오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그녀는 리안이 고통으로 하여금 대답을 종용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럴수록 입매는 더 굳게 다물렸다.

결국 헤일라의 고집을 꺾지 못한 리안이 머리칼을 잡은 손을 풀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오른손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널브러진 유리 조각들을 발로 밟고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굳은 얼굴로 리안의 품에서 바들대던 헤일라가 바닥을 바라본 건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예기치 않은 기현상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야?”

그가 흘린 핏방울이 낭자해야 할 바닥이 깨끗했다. ……정확히는, 핏자국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당장 지금도 그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흔적들이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 순식간에 원래 색인 백색으로 바닥이…….

“……세니르 신전.”

경악이 섞인 목소리였다. 헤일라는 망연한 얼굴로 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국민은 신의 존재를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 신의 검이 기적과 같은 신비함으로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예언이 제국을 지켜 왔기 때문에. 그리고 신의 가호가 함께 한다는 세니르 신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니르는 존재만으로도 신의 증명이라 불리는 신전이었다. 온통 백색 빛만 가득 머금은 신전의 모습은 경외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당연하게도 신의 증명이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떤 형태로 훼손되든 수 분 내로 복구되는 기적.

무엇이 묻든, 어떻게 망가지든 원래 모습을 되찾는 기적이 세니르 신전의 특징이었다. 이것은 제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도 발견된 적 없는 신의 가호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헤일라는 리안의 피가 지워지는 장면을 보고 이 장소가 어디인지 눈치챘다.

“말도 안 돼…….”

신의 영역은 선택받은 자들만 들어올 수 있으매, 부유한 상인이나 일반 귀족들은 감히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눈앞의 기적은 세니르에서가 아니면 결코…….

“너, 뭐야?”

리안을 똑바로 마주 보는 헤일라의 눈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적대감을 품은 눈빛이었다.

* * *

레테는 잠귀가 예민한 편이었다. 타고난 기질이 예민하고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헤일라가 방으로 몰래 들어와 잔머리를 넘겨 주거나 이불을 정돈해 줄 때도 깨어 있는 때가 훨씬 많았다. 단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자신이 싫어서 자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헤일라일 리가 없는 불청객을 위해 자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동생은 이렇게 거칠게 문을 열지도, 무겁게 걷지도 않는다.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예상했던 객이 눈에 들어왔다.

“헤일라 상태가 꽤 괜찮아졌나 보네. 네가 자리를 다 비우고.”

레테가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매달았다. 모르는 이가 보면 다정한 여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온화한 모습이었다. 리안은 그녀를 무감하게 훑고는 순식간에 몸을 붙여 왔다. 독한 약초 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헤일라는 지금 수면초를 먹고 자고 있어.”

“어쩐 일로 환약이 아니라 수면초를?”

“머무는 곳이 어딘지 알아 버려서 싸웠거든. 안 재우면 내가 괴롭히게 될 것 같아서.”

“아아, 조심했어야지.”

말라비틀어진 손이 푸석한 금발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레테의 앙상한 손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팔찌가 걸려 있었다. 웬만한 귀족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고가의 장신구였다.

헤일라를 기만한 대가로 리안에게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기껏 도왔는데 좋은 성과가 안 나오면 내가 속상해.”

“…….”

“좀 더 완벽하게 속였어야지. 나처럼. 넌 항상 마지막이 서투르더라.”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해 놓고 뻔뻔하게 지껄이네.”

원래 약속된 건 헤일라의 뺨을 치는 정도였다. 칼을 휘둘러 며칠간 앓을 상처를 내는 건 리안의 계획에 없었다. 충격받은 헤일라를 꿰어 내 잠시 집에서 빼 와 그녀가 저를 더 의지하도록 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나도 그렇게까지 다칠 줄은 몰랐거든. 어쨌든 잘된 일인 것 같은데? 신전에 가둬 두면 너도 더 편할 테고…… 죽을 정도도 아니었잖아.”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리안이 천천히 레테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윽!”

리안이 순식간에 레테의 목을 쥐고 뒤로 밀어 침대에 파묻히도록 했다. 그리고 빠르게 레테의 몸 위에 올라 옆에 있던 베개를 빼어내 레테의 얼굴 위에 갖다 댔다.

“헤일라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내 허락을 받았어야지. 그 앤 내 건데.”

“웁! 으웁!”

그는 그대로 힘을 가해 지그시 얼굴을 눌렀다. 이대로 오 분만 있어도 질식사한다. 보드라운 면에 눌려 생명이 꺼져 가는 기괴한 소리가 방을 채웠다. 리안은 만족에 차서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레테는 아래에서 바동거리다가 리안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 필사적으로 긁어 댔다.

신음 소리가 점차 간헐적으로 변한다. 리안은 인간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를 떠올리다가,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레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조금 했다. 동생을 팔아넘겨 제 욕망을 채우려는 행태를 고려하면, 레테는 죽은 제 부모의 뒤를 따라 생을 마감하는 쪽이 어울렸다.

“아, 미안. 다른 생각을 조금 하느라.”

“헉, 흐윽…….”

하지만 역시 처음 계획대로 하는 쪽이 저답다. 리안은 누르던 손을 거두고 베개를 아래로 던졌다. 아무리 헤일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해도 차근차근 일을 처리하는 게 옳았다. 그녀가 생각보다 타격을 받아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모든 계획이 틀어질 정도의 변수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죽이기에는, 이제까지 들인 수고가 아까웠다. 이 계집과 몇 년 전부터 거래하면서 헤일라를 움직이고, 또 그녀 앞에서 숱하게 연기해 왔으니까. 그는 널브러져 개처럼 헥헥대는 레테를 내려다보면서 눈을 휘었다.

“다시는 시키지 않은 일을 해서 번거롭게 만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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