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18화 (18/97)

18화.

“리안이…… 나를…….”

헤일라는 그가 그럴 리 없다고 되뇌면서도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해일처럼 쏟아지는 기억들이 잔인하리만치 선명했다. 아래에 깔려 우는 자신, 그런 여자를 사랑스럽다는 듯 핥아 올리던 남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주룩. 다리 사이에서 걸쭉한 정액이 뭉텅이로 새어 나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헤일라의 행동이 모두 정지했다.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자가 주춤주춤 일어나 이불을 걷어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자신이 부정하던 그의 행태가 다리 사이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아아…….”

두려웠다가 화가 났다가, 또 모든 상황을 부정하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은, 그가 그럴 리 없다고 되뇌면서 다리 사이에 흐르는 허연 정액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것으로 끝났다. 시큰한 냄새가 확 끼쳐 코를 찔렀다.

리안은 좋은 사람인데. 날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유일한 존재인데. 절대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인데 왜.

굳게 믿어 왔던 진리는 한순간에 전복되어 그녀를 덮쳤다.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공간에서 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의 그는 다른 사람이다. 헤일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유를 묻더라도 좀 더 안전한, 열린 공간에서여야 했다. 만약 여기서 만나 다투게 된다면…… 그래서 붙잡히면…….

영영 못 나갈지도 몰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아무리 그가 강제적으로 자신을 취했다 해도 영원히 누군가를 감금하는 건 과한 망상이었다.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야. 잠시 나쁜 짓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거야.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겠지. 리안은, 그런 애는, 그런…….

헤일라는 미친 여자처럼 중얼대다가 우선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어쨌든 최대한 리안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불확실해 레테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상당히 걱정됐다.

“아…… 아흐…….”

얼마나 박아 댔는지 일어서자마자 다리 사이가 쪼개질 듯 아렸다. 헤일라는 벽을 짚고 간신히 몇 걸음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균형을 잡지 못해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장식장을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반동 때문에 장식장 가장 위에 있던 도자기가 흔들거렸다.

“아, 안 돼!”

한눈에 봐도 값비싼 물건이었다. 헤일라는 어지러운 시야 안에서도 도자기를 사수하려고 하느작거렸다. 물론 그 노력은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매끄러운 백자가 산산조각 났다. 그 아래를 황망하게 응시하던 헤일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쓸데없이 정교한 모양이 눈에 잘 들어왔다. 분명 값이 나가는 물건일 테다.

……물어 주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리안이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헤일라는 유리 조각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조심조심 조각을 모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절절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다 리안 때문이니까. 리안이 ‘이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도자기가 깨지는 일은 없었을 테다. 전부 리안 탓이다. 리안, 리안…….

헤일라는 비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산산조각 난 도자기 조각이 널브러진 게 꼭 리안과 자신의 관계 같아 덜컥 두려워졌다. 이런 식으로 맺고 싶었던 관계가 아닌데. 이렇게는…….

헤일라는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공허한 물음을 던져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때 방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리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말라붙어 있는 볼, 땀이 번들거리는 목덜미,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아 비치는 젖꼭지가 유독 도드라졌다. 그는 손으로 몸을 더듬듯 눈으로 찬찬히 훑은 뒤 날카로운 조각을 쥔 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헤일라는 급히 일어나 거리를 유지하려다가 다시 뒤로 휘청거렸다. 리안은 그녀를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스쳐본 그의 눈이 서늘했다.

“흐웁!”

허리를 바짝 휘감은 팔이 묵직하게 아랫배까지 눌렀다. 리안은 남는 손으로 헤일라의 뒤통수를 우악스럽게 쥐고 입 맞췄다. 급작스러운 접촉에 그녀의 입이 열리고 두터운 혀가 보드라운 입술을 헤집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안쪽 점막을 공들여 핥고, 타액을 빨아 들이는 질척한 접촉이었다. 혀가 섞이는 소리가 헤일라의 귓가에 닿았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키스였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동거릴 수조차 없었다. 상체는 갈비뼈가 아플 정도로 단단히 붙들려 있었고 쥐어진 머리칼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머리 가죽까지 뽑힐 만큼 억세게 쥐어져 있었다. 아프고 숨이 막혀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우, 아흐, 읍…….”

“아아, 미안.”

헤일라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야 그의 입술에 상처를 내고 입을 떼어 낼 수 있었다. 리안은 피가 뚝뚝 흐르는 데도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눈은 전혀 웃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괴이쩍었다. 그래.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다. 한 꺼풀 벗겨진 다른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종아리에 힘을 바짝 주고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온 방문을 응시했다. 분명 리안이 열고 들어왔다.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치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성보다는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를 지배했다.

의외로 쉽게 밀려난 그를 제치고 달렸다. 헤일라는 정신없이 밭은 숨을 내쉬며 문까지 뛰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철컥.

철컥철컥철컥철컥.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뒤에서 허리를 감아오는 팔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따뜻한 느낌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이 목덜미에 스쳤다. 리안은 휘어진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부볐다. 아이가 투정하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집에서 뛰면 안 돼. 네가 가르쳐 줬잖아.”

“이, 러지 마. 나 이제 집에 가야 해. 여긴 내 집이…….”

레테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언니의 이야기는 그를 자극할 게 분명했다. 헤일라는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배 위에 얹어진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행동에 대해 반추해 보았다.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관해서도 헤아렸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제 탓도 있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큰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등허리에 느껴지는 딱딱한 물성에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서워?”

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헤일라의 목선과 귓가를 입술로 지분거리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가는 몸을 안아 올려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헤일라는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물건의 감촉에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잔뜩 겁을 먹고 있는 게 맞았다.

“무서워할 거 없어.”

“…….”

“너한테도 좋은 거야. 그냥…… 즐기면 돼.”

그는 진심인 듯 다정하게 웃었다. 파드득 소름이 돋았다. 리안이 여체를 안아 올려 성큼성큼 걸어 침대에 눕혔다.

“아악……! 싫어!”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자의 반항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리안은 헤일라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제가 할 일을 착착 진행했다. 첫날밤 신부의 옷을 벗기는 신랑처럼, 조금 수줍은 듯 뺨이 붉었다. 그게 더 헤일라를 두렵게 했다.

“너, 너 완전히 정신 나갔어. 아!”

“하하.”

리안은 그냥 웃기만 했다. 나름 충격을 받으라고 뺨을 후려쳐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헤일라의 붉어진 손을 보고, 작게 속살거리기만 했다.

헤일라는 씩씩거리면서 배꼽까지 풀어진 단추를 절망적으로 바라봤다. 꾸물거리며 옷을 여미려고 하는데 리안이 손목을 쥐고 붉어진 손바닥을 빤히 보더니 혀를 내밀어 날름, 하고 핥았다. 부드럽고 축축한 살이 뭉개지며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감촉이 낯설었다.

싫다기보다는…… 이상했다. 타액이 묻은 지점이 약간씩 차가워졌다. 열감이 사라지고 남은 선선함이 헤일라의 기분을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 * *

“귀여워.”

얼빠진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보는 헤일라는 정말로 귀여웠다. 남자는 하늘거리는 옷을 후두둑 소리가 나도록 찢은 뒤 바닥에 던졌다. 원피스 형식의 옷이 사라지자 몸을 가리고 있는 건 아래 속옷뿐이었다. 헤일라는 완전히 드러난 가슴에 기겁하면서 바둥거렸다.

“안…… 히익!”

츕츕대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리안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헤일라의 두 손을 누르고 가슴에 입술을 댔다. 옅은 색소가 도는 젖꼭지를 가볍게 물다가 가슴을 깊게 물었다. 적당한 크기에 모양이 잘 잡힌 가슴이 입안에서 엉망으로 뭉개졌다가 퍼지기를 반복했다.

찌릿거리고 싸한 감각이 헤일라를 물들였다. 리안은 능숙하게 가슴을 지분대며 자극했다. 다리 사이에 열감이 몰렸다. 채 가시지 않은 당혹감 때문에 도리질 치던 헤일라는 제 가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리안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다가 제 가슴께에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는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아, 흣, 이거, 이거, 뭐…….”

할딱거리기만 하던 여자가 다른 말을 웅얼거리자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던 남자는 헤일라가 몸에 새겨진 화인을 이제야 발견했음을 깨닫고 이마를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쁘지?”

“…….”

“매일 새로 새겨 줄 테니까…….”

미친 소리를 하는 남자는 설레는 얼굴이었다. 아, 헤일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리안은 헤일라가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에 잠시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원래 미친놈이었던 거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몸을 취하고, 그걸 자랑이라고, 저런 해사한 얼굴로…….

아무리 그를 애틋해하는 헤일라라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도망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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