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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14화 (14/97)

14화.

“아뇨. 화 안 났어요. ……그럼 언니께선 리안과 같이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아, 네. 그렇죠.”

“그렇구나. 그냥 제가 리안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조금 섭섭하고, 아니, 사실 섭섭할 이유도 없죠.”

헤일라는 횡설수설하면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아르는 그제야 여자의 볼이 조금 붉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왜? 만약 미아르 본인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 상기되었을 텐데 헤일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냥 언니께서 생각보다 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

“리안은 저한테 일 얘기를 잘 안 해요. 가족 이야기도…… 생각해 보면 본인에 관해서도 별 이야기를 못 들었어요. 이런 좋은 방을 선 듯 내어줄 부유한 동료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아마 저한테는 설명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죠.”

“…….”

“돈 얘기도…… 아무래도 남인 저한테 다 털어놓기는 부담스러웠나 봐요. 세상이 워낙 험해서 사기를 치려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도 저를 경계했을 수 있고…… 언니는 아무래도 함께 일하는 분이라 리안이 더 믿는 것 같은데 그게 조금…….”

아, 그렇군. 돈 많은 남자가 싫은 게 아니라…….

미아르는 그제야 헤일라의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 깨달았다. 뿌연 안개가 낀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찾은 기분이었다.

“혹시, 질투하세요?”

쿡, 하는 웃음이 경쾌하다. 붉은 기가 헤일라의 목까지 번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다가 포기했다.

“걱정 마세요. 전 그냥 동업자거든요. 냉정하게 말해서, 돈이 안 되면 얼굴도 볼 일이 없는 사이죠. 그분도 똑같이 생각할걸요.”

“…….”

“그리고 리안 님이 이렇게나 헤일라 님을 아끼시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두 분은 연인이 아닌가요?”

미아르가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면서 나긋한 숨을 쉬었다. 꼭 유혹하는 여신의 모습 같았다. 헤일라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저흰 그냥 친구예요.”

아, 이것도 의외였다.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는 보고가 진짜임을 확인하니 더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몸 한 번 안 섞은 건가? 미아르는 리안이 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을 생각하면 국가적 손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가 보기엔 아가씨도 리안을 꽤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질투도 하시고. 이어진 말에 헤일라의 볼이 조금 더 붉어졌다.

“좋아하는 건 맞는데…… 누구를 연인으로 두기엔 제가 여유가 없거든요. 언니가 있어서요. 언니가 제일 먼저예요. 리안을 좋아하지만 그는 제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어요.”

순진한 아가씨는 조금 찔러 보자 제 속마음을 술술 불었다. 이제껏 이런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어서 그런지 의심 없이 털어놓는 모습이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아아, 언니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어찌 들으면 비아냥에 가까웠지만 헤일라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미아르는 슬슬 헤일라를 자극해 보기로 했다.

“뭐, 남녀 사이의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요.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모르고.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리안 님이 언젠가 다른 여자랑 혼인해서 애를 낳고,”

“…….”

“몸을 섞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뭐 그런 것들요.”

그를 흠모하는 여인이 꽤 많답니다. 헤일라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그만큼 잔인하기도 했다. 바짝 닿는 저음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헤일라는 그다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미래를 그려 보게 되었다. 미아르의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리안은 아주 미려했고, 능력도 뛰어났으며 마음을 열고 나면 마냥 상냥했다. 지금이야 그 다정이 저를 향하지만 언젠가 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애정을 퍼붓겠지.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웃어 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면서…… 입을 맞추고…….

“……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분이 차는 저가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그를 거절한 건 자신이면서 리안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미래가 이토록 끔찍하게 느껴지다니. 헤일라는 불현듯 깨달은 자신의 이중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맞아요. 두 분이 헤어지면 정말 그렇게 될 거예요. 리안 님이 아가씨를 영영 잊어버리게 될 지도요.”

흡, 숨을 삼키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다. 미아르는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차는 것으로 안타까움을 꾸며 냈다. 그녀는 헤일라의 손을 제 손바닥 위에 올리고 손등을 쓸어 주었다.

“하지만…… 제 첫 여자를 잊는 남자는 없답니다.”

첫 여자, 라는 말을 따라 읊조리는 말간 얼굴이 너무 순수해서, 미아르는 옅은 죄책감이 기어 올라옴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필요는 없었다.

“리안 님은 몇 년 전부터 성년이 된 지금까지 아가씨밖에 몰랐잖아요. 한 번도 여자를 안은 적이 없으시죠. 아가씨도 그렇죠?”

“……네.”

리안이 공작저에 살 때 누구보다 방탕하게 굴러먹었음을 미아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교묘하게 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뱀처럼 은근하게 속삭였다.

“만약 저라면, 헤어지더라도 잊히지 않도록…….”

말하던 도중 문이 벌컥 열렸다. 미아르가 있는 방의 문을 이토록 무례하게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흐리멍덩한 헤일라의 음성이 울렸다.

“……리안.”

황궁에 있어야 할 리안 휴리트가 귀신처럼 서 있었다.

* * *

“괜찮으십니까.”

방에서 쫓겨난 뒤 신전의 복도를 걷던 미아르는 질문을 듣고도 대답이 없었다. 심복은 방금부터 혼이 나간 듯한 미아르가 걱정되는지 재차 물었다.

그 누구도 리안이 황궁으로 가던 마차를 돌려 신전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부의 말에 따르면, 그는 헤일라의 방에 미아르가 들어섰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당장 신전으로 마차를 돌리라고 명했다고 한다. 게다가 황궁에서 나온 시종이 염려를 표하자 그 자리에서 목을 썰었다. 옆에 있던 베르디안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든,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미아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쫓아낸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미친 남자였다.

“당분간 호위를 조금 늘리시고 신전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시는 게…….”

“흐음.”

미아르는 옅은 신음소리만 내고 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환복도 하지 않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주변인들이 무어라 걱정을 쏟아 내건 말건, 미아르의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흰 침구 위에 한껏 늘어트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제일 먼저예요. 리안을 좋아하지만…… 그는 제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어요.’

헤일라가 애처로운 얼굴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아르는 몸을 빙글 돌려 손으로 턱을 괴었다.

“착한 애는 아니었네.”

거짓말쟁이였어. 그녀는 재미있는 유희 거리를 찾은 아이처럼 다시 낄낄거렸다.

미아르는 리안이 들이닥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아니라 헤일라의 얼굴만 쳐다봤다.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아름다운 보석에도, 빛이 흐르는 비단에도, 귀한 장신구들에도 눈길을 주지 않던 여자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질반질한 눈으로 그를 봤다.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반짝대는 얼굴이었다.

미아르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사막의 모래도 보았고,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게 빛난다는 보석도 보았고, 신이 내렸다는 보물도 본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빛도 리안을 보는 헤일라의 눈빛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으로 남자를 보면서 그가 두 번째라고 말하는 건 반칙이지.

미아르는 헤일라가 자신을 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리안도, 그를 버릴 준비를 한다는 헤일라도 영 멍청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둘은 서로를 결코 버릴 수 없을 테다. 헤일라가 누군가를 버린다면, 그건 리안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쪽이 될 것이다. 그녀는 씩 웃으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 *

헤일라는 기본적으로 순종적이다. 그건 그녀가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일종의 무기였다.

그녀가 어릴 적,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부모는 복종하지 않으면 학대에 가까운 폭력을 휘둘렀다. 뺨을 맞는 언니를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 무릎을 꿇는 건 일상이었다. 울면서 두 손을 싹싹 빌면 부모는 그제야 언니를 때리던 손을 내렸다.

식사 시간에 상한 빵 하나에도 투정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으면 그들은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레테는 그런 헤일라의 태도를 경멸하며 다그쳤지만 맞는 게 싫었던 아이는 언니의 말을 무시했다.

맞는 게 싫고, 굶는 게 싫으면 순종하는 게 맞았다. 어린 헤일라는 오히려 언니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언니가 맞을 때 울면서 비는 건 멈추지 않았다. 레테가 아픈 건 자신이 아픈 것만큼 싫었다.

어쨌든 그녀는 순종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부모가 레테 대신 헤일라를 선택한 이유에는 헤일라의 순종적인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레테가 그 부모를 죽이는 순간에도 언니에게 순종했으며, 이후에는 평생을 언니에게 헌신하겠다 맹세했다.

결론적으로 헤일라는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무언가를 하는 게 너무 익숙하고,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가 너무 당연해서 화조차 내 본 적이 없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헤일라가 직접 선택한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다리 벌려.”

하느작대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헤일라는 서툰 몸짓으로 그의 명령에 따랐다. 온몸이 벌게진 채 엉거주춤 움직이는 여자가 가여울 법도 한데, 리안은 표정 없는 낯으로 차가운 명령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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