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13화 (13/97)

13화.

번득이는 눈을 마주친 심복이 어깨를 움칠 떤 뒤, 헤일라가 머무는 방이 어딘지를 더듬더듬 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 여자, 꿰어 두면 돈줄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는 미아르를 힐긋거리는 심복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두려움이 퍼졌다. 신전에서 권력이라면 대신관 다음으로 누리는 주인님이지만 언제나 문제가 될 만한 일을 기획하는 여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뒤만 따랐다.

“아, 넌 지금부터 내가 말한 걸 한 시간 내로 전부 준비해서 그 애 방으로 들여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서신을 리안 휴리트에게 전달 해.”

“……신전을 나간 뒤에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궁에서 온 서신이라 할지라도 신전에 들이기 전에는 검수를 거쳤다. 미아르는 리안에게 온 황제의 서신을 혹시 몰라 통과 보류로 처리했다. 신전에 객을 두고 리안이 황궁으로 가 버리면 혹 귀찮은 뒤치다꺼리를 맡게 될까 봐 통과를 보류해 두었던 것인데,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탐스러운 적발을 한 여인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미아르의 귀에 지폐 세는 경쾌한 소리가 울리는 환청이 들렸다. 소름 끼치도록 황홀하다.

“준비를 단단히 해.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테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신관을 기다리는 대신 장기적으로 돈이 될 일을 벌여야 했다.

미아르, 그녀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서.

* * *

리안 휴리트가 황성으로 떠난 날 오후였다.

“리안은 언제쯤 돌아오나요?”

문을 열자마자 가녀린 미성이 흘러나왔다. 미아르는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이 리안의 여자임을 눈치챘다.

정갈한 몸짓으로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리던 여종은 잠시 시선을 주고 하던 일을 마저 마쳤다. 그리고 무감한 표정으로 그릇을 모두 옮긴 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일을 끝마치면 돌아온다 하셨습니다. 이외에는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마 사흘째 저 변명만 내리 했겠지. 미아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하면서 헤일라가 안심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어도 흘리지 않았을 모습이 훤했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낮지만 쾌활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여종이 흠칫하고 뒤로 돌아 고개를 조아렸다. 조금 무례했던 언행이 책잡히지는 않을까 염려되는지 긴장한 모습이다.

확실히 헤일라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미아르는 익숙하게 눈짓으로 여종을 물리고 헤일라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고고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두른 채였다.

“미아르라고 해요.”

긴 앞머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 깜빡거렸다. 누구인지 가늠하느라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양이 퍽 귀염성 있다. 헤일라는 갑자기 등장한 여자를 우물쭈물 관찰했다.

“리안이랑 아는 사이세요?”

살랑거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미아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올망졸망하니 놀리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저 구질구질한 머리도 조금 가지고 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여자를 못 살게 굴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그분과 조금 인연이 있어서요. 옆에 못 있는 동안 아가씨를 돌봐 달라고 하더라고요. 일이 생각보다 길어진다고.”

당연히 거짓말이다. 미아르는 여종이 가져온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생긋 웃었다. 그래도 리안이 곧 돌아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쯤 황제의 성화에 못 이겨 황궁에 가고 있을 테고, 오늘 밤이면 미아르가 헤일라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겠지. 그러니 늦어도 이틀 뒤면 신전에 도착할 게 분명했다.

“오늘은 저와 조금 어울려 주세요. 그러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가겠죠.”

조금 화는 내겠지만 미아르는 결과적으로 리안에게도 이로운 일을 할 셈이었다. 그녀는 둘의 사랑을 조금 돕는 동시에 헤일라와 돈독한 친분을 쌓을 예정이었다. 엉뚱해 보일지 몰라도, 이 일을 꾸민 데에는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지금 이 기세라면 헤일라가 차기 공작 부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자가 하는 짓을 보니 평민 계집을 잠깐 끼고 놀려는 심산은 아닌 게 분명하고, 리안은 평민의 신분을 세탁해 공작 부인으로 만드는 미친 짓을 기어이 이루어 낼 위인이다.

고로, 헤일라와 친해지면 이후에 사업을 벌일 때도 도움이 될 테다. 언제 불안정해질지 모를 신전의 입지를 위해서라도-제 돈다발을 위해서라도-헤일라와의 연을 만들어 두고 리안에게 빚을 지워 놓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머릿속 계산기를 다시 두드린 미아르는 멀뚱멀뚱 저를 보는 헤일라를 향해 박수를 짝! 하고 쳤다.

“제가 아주 야심 차게 준비했으니 헤일라 님 마음에도 분명 쏙 들 거예요!”

미아르는 헤일라가 관심을 두지 않는 식사를 치워 버리라고 명한 뒤 그녀를 질질 끌고 긴 소파에 앉았다. 그 앞은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고 뒤에 큰 액자 하나만 걸려있었다.

“저…… 리안이랑 무슨…….”

“자! 얼른 들여와!”

정확히 리안과 무슨 관계인지를 묻는 헤일라의 말은 허공으로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제 할 말이 제일 중요한 미아르식의 화법이었다.

* * *

그녀는 대답 대신 텅 빈 공간에 무지막지하게 물건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어……?”

가짓수가 어마어마한 고급 의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귀족들의 연회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드레스부터, 집에서 가볍게 걸치는 네글리제까지 수백 가지 옷이 순식간에 진열됐다.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 장갑, 장신구까지 줄줄이 간이 탁자 위에 얹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헤일라도 어렴풋이나마 저것들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 저기…….”

“어떠세요?”

이걸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을 여인은 없다. 미아르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돼서 헤일라의 어깨를 감쌌다. 미아르가 준비한 보석들은 남녀 불문하고 귀족이라면 눈독을 들일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정말 끝내주죠?”

리안은 헤일라의 옆에 있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평민인 척을 했다고 했다. 멍청하게도! 반짝이는 걸 앞에 들이밀고 살랑살랑 유혹하지는 못할망정 푼돈이나 가져다주며 옆을 지켰다는 순진함이 믿기지 않았다. 세상은 돈이고 사랑도 돈이고 결국 마음도 돈인데!

유혹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미아르는 수고를 좀 들였다. 그녀는 확실한 방법으로 헤일라를 꿰어 낸 뒤 리안의 앞에 곱게 포장해 내밀 작정이었다. 평생을 비루하게 살아온 여자인 만큼 이 방법은 아주 잘 먹힐 터였다.

“……이걸 미아르 님, 아니, 음…….”

“언니라고 부르세요!”

미아르는 헤일라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붙이며 부담스러운 호칭을 종용했다. 귀족들 사이에서야 흔치 않은 호칭이었지만 아랫것들이 친밀함을 드러내기 위해 언니니 동생이니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많은 수를 써서 미래의 공작 부인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단장해 주면 빛을 발할 어여쁜 외모도 마음에 들고. 헤일라는 입술을 빠끔거리다가 네에,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미아르 언니께서 이걸 다 준비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럼요. 전 돈이 꽤 많거든요. 물론 리안 님도요! 그분은 아주 징그러울 정도로 많죠.”

미아르는 정말로 부럽다는 말을 흘리며 둘 앞에 늘어져 있는 보석 중 하나를 골라 내밀었다. 금빛 머리 색과 아주 잘 어울리는 섬세한 목걸이였다. 하지만 헤일라는 멍하니 그걸 보기만 하다가 엉뚱한 질문만 늘어놓았다.

“리안이 부자라고요?”

“네에, 그분은 돈을 갈아 물을 만들어 목욕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을 갖고 계신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닐까요?”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을 해야 할 여자는 딱딱한 표정으로 미아르와 마주 봤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니 가관이다.

“동명이인인 것 같아요. 리안은…… 리안은 그렇게 부자가 아녜요. 제가 알아요.”

헤일라는 말투는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눈빛은 결연하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대해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자세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순간 미아르의 등골에 땀 한 줄기가 내려앉았다.

실수했나?

미아르는 리안이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거지에 가까운 비렁뱅이인 척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함께 살붙이고 살면서 어느 정도 돈 냄새를 풍기기는 했겠지,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돈이 아주 많은 줄은 모르고 아쉬운 말을 하지는 않았나 보다, 하지만 내가 내미는 걸 며칠 누리다 보면 마음이 달라지겠지, 했는데.

이 여자는 부자 남자를 별로 안 좋아하나 봐. 미아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 모양으로 중얼댔다.

리안에게 불리한 사실을 자신이 홀라당 밝혀 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이 여자는 보석이나 아름다운 옷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눈빛이 무감했다.

이럴 수가 있나? 내내 탐욕스러운 귀족과 그 귀족을 모시는 영악한 시종들과 실리를 위해 사람도 살리고 죽이는 신관들 사이에서 자라고 배운 미아르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무엇으로 잘못을 만회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돈이 통하지 않는 평민이라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평소에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서…… 리안이 그렇게 엄청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그 애가 돌아오면……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죄송해요…….”

미아르는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적당히 넘어가긴 했는데, 헤일라는 어딘가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젠장. 신관의 지위를 이용해 적당히 뭉개 오기는 했지만 미아르도 리안은 무서웠다. 그는 정말 수틀리면 신관의 목도 딸 수 있었다. 그녀는 제 목숨보다 돈이 귀했지만 그래도 그런 개죽음을 바라지는 않았다.

“저, 혹시 화나셨어요?”

헤일라는 말이 없었다. 비록 천한 계집이었지만 미아르는 그녀의 기분을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보석도, 귀한 옷감도 아니면 뭐로 환심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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