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게다가 타론 제국의 귀족들은 천것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귀족의 피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명이며, 그걸 받지 못한 평민과 노예는 가축처럼 여겼다.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키며 존재를 구분 짓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니 미아르가 헤일라의 팔다리를 잘라 그녀를 취하라고 종용하는 태도는 그들에게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애 언니만 없어지면 되는 일인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흐응.”
미아르는 리안 앞에서 잔뜩 몸을 사리면서도 궁금증이 이는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폭탄을 던지곤 했다. 그게 지금 같은 때였다.
“그래도 생각대로 안 되면요?”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기괴한 신음만 부유하는 침묵이었다. 리안은 아주 잠시 동안 제 찻잔 안에 이는 균열을 관찰했다. 그 안에 비치는 눈동자는 텅 빈 흑색이었다.
헤일라의 옆에 있는 그 기생충 같은 계집이 떨어지지 않고, 헤일라가 여전히 언니를 포기하지 못하고, 리안을 버린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그런 상황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역시 다리 한쪽 정도는 잘라 두는 게 편하시겠죠?”
윗입술을 혀로 핥은 미아르가 리안을 충동질했다. 개미집 위에 물을 부어 두고 반응을 기다리는 잔인한 아이 같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독할 정도로 교활한 구석이 있었던 여자다웠다.
“그럴 일은 없어.”
그는 단호하고 냉랭하게 일갈했다. 헤일라의 몸은 손끝의 거스러미라 해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놓아주시게요?”
“설마. 묶어 두는 일 정도는 하겠지.”
조그마한 헤일라를 안락한 성에 가둬 두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계속 못된 말만 하면 저도 어쩔 수 없겠지. 울면 달래 주고 매 순간 사랑을 속삭이면서 얼러 나중에는 스스로 그에게 자신의 목줄을 쥐여 주도록 유도하면 된다.
배를 몇 번이고 부르게 해서 인질이 될 아이들도 여럿 두어야지. 헤일라는 피붙이에 약하니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을 테다. 그는 눈앞에 그려지는 황홀한 미래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비리게 웃었다. 묘한 음흉함을 눈치챈 미아르가 체통을 잊고 킥킥댔다.
“역시 휴리트 집안 인간들은 전부 오싹오싹해.”
아드님이 아버지에게 미치진 못하는 것 같지만요. 미아르는 낄낄거리면서 제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녀는 공작이 공작 부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는 몇 안 되는 이였다. 아무래도 리안이 제 부친의 ‘그런’ 광기까지 빼다 박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우스운 모양이었다.
미아르의 말에 리안의 눈매가 움푹 파였다. 아비와 저를 비교하는 데 불쾌감이 인 게 분명했다. 치고 빠지기에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그녀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화제를 전환했다.
“부탁하신 물건, 여기 있어요.”
곱게 접어 무언가를 싸 둔 흰 종이였다. 종이를 열어 확인해 보니 붉은색과 푸른색 조각 몇 개가 가지런히 싸매져 있었다. 헤일라와 자신의 사이를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는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있던 그녀의 손수건을 꺼내 주물럭거렸다. 거친 천 조각과 엄지가 마찰해 까끌까끌한 감촉이 스몄다.
“이제 아가씨께 가 보실 생각이 좀 드시는지?”
태울 애는 다 태우지 않았나. 미아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리안은 지금 헤일라를 벌세우는 중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없는 신전에, 그곳이 신전인지도 모르는 고아 계집이 덩그러니 앉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파서 움직일 수 없으니 여종들의 시중을 받아야 하는데, 신전의 종들은 평민의 몰골로 신전에 옮겨졌던 헤일라를 기억하고 멸시할 게 틀림없었다. 그치고는 꽤 귀여운 심술이었으나 상당히 소모적이고 무익해 보였다.
“아직.”
그러나 리안은 유치한 행각을 한동안 이어갈 심산 같다. 고립시켜 놓고 기어이 그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역시나 악취미다.
미아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뒤를 돌았다. 어쨌든 물건을 주고 상응하는 대가를 약속받았으니 그녀로서는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돈 받았으면 됐지. 귀족 출신 신관치고는 상당히 담백한 셈법이었다. 그녀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에게 조용히 일렀다.
“신전으로.”
“예.”
미아르는 문이 닫힌 이후로, 정말 리안에게는 한 톨의 관심도 갖지 않았다. 이다음 돈 될 일 찾기도 바빴다.
* * *
“아직도 못 찾았나?”
세니르 신전 내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었다. 공연장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신전으로 도착한 미아르는 자신의 방 콘솔 앞에 앉아 짜증스레 물었다.
“수소문하고 있지만 차도가 없습니다.”
“하.”
그녀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한 묶음으로 틀어 올리는 종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단장을 돕던 종이 나가자마자 그녀의 심복 하나가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황궁과 귀족들에게는 철저히 숨기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그건 나도 알아!”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통에 바짝 얼어 버린 심복이 뒤로 물러섰다. 미아르는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서랍을 열어 성심성의껏 귀걸이를 골랐다. 가장 좋아하는 붉은색을 짚으려다가, 신관복이 흰색임을 감안해 사파이어가 박힌 깔끔한 귀걸이를 골랐다. 그걸 손수 귀에 끼우는 여자는 마치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얼마나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새끼길래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건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정잡배처럼 걸걸했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치장한 제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일어섰다. 퍽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 낯이었다.
“일단 이번에 나온 예언들 전부 수집해서 황궁에 전달해.”
“……예.”
그래 봐야 반쪽짜리일 걸 알면서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땅히 나타나야 할 신관 하나가 빈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으니까.
“저, 그런데 정말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않으면?”
말꼬리를 잡아 따라 하는 입매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끝까지 황실에 숨길 수는 없지 않…….”
“끝까지 숨겨야지.”
“…….”
“그러지 못하면 사실을 못 숨긴 네놈들 목부터 날아가는 거고.”
미아르의 얼굴에서 표정이랄 게 싹 가셨다. 어느 때보다 진심 어린 태도였다.
이건 신전의 입지가 걸린 일이니까.
예로부터 신전은 황궁과 귀족 사이에서 꽤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예언의 힘을 갖고 있지만 의술에 관한 독점권만 쥐고 있을 뿐, 절대 권력을 탐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아니, 사실은 그럴 수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신의 가호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으니까.
물론 몇 세기에 한 번은 정말 강력한 힘을 가진 예언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꿈을 꾸며, 강렬하게 염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 관한 미래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런 신관만 나타난다면야, 신전은 그 어떤 황제가 나타난다 한들 겁먹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국의 대소사에 관한 예언만을 받으며 그조차도 모든 신관이 받은 것을 합쳐야 완성되었다. 고르지 않은 예언의 능력. 그렇기 때문에 신전은 언제나 신중해야 했다. 그들이 이전부터 의술을 독점적으로 관리해 온 것도, 예언 이외의 다른 패를 쥐기 위해서였다. 예언의 힘이 약해졌을 때를 대비해야만 하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약한’ 정도가 아니었다.
“하…… 루드비히,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새끼…….”
“……미아르님.”
미아르의 입에서 대신관에 관한 불경한 욕설이 나오자 심복이 슬슬 눈치를 봤다. 그러나 도끼눈을 한 눈매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예언의 힘을 가진 신관의 수는 열일곱. 한 명이 죽으면 제국의 아이 중 하나에게 예언의 힘이 발현되어 신전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열일곱 명보다 많은 적도, 적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일 년 전 대신관이 죽은 다음 날 새로운 아이가 신전에 들어오는 게 순리였다.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나타날 것이라 모두 장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신관들 또한 새로운 신관에 관한 예언을 내려받지 못한 채 일 년을 흘려보냈다. 결국 신전은 서른 날 안으로 밝히려 했던 대신관의 죽음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 절망적인 사실은, 지금 신전에 있는 열여섯 신관의 예언 능력이 점점 형편없어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아르, 그녀 자신까지도.
“하…… 미치겠네.”
그녀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몇 개의 반지들을 쓰다듬으며 절망을 담아 읊조렸다. 아무래도 나타나지 않는 그 열일곱 번째 신관이 누리는 가호가 남달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예언의 능력을 흡수하고 있는 듯했다.
아아, 신전의 권력이 쇠하면 지금처럼 돈을 쓸어 모으기도 힘들어질 테고, 또, 이런 보석을 잔뜩 선물 받을 기회도 점점 줄어들 텐데.
미아르는 자신이 환장하는 돈 냄새가 멀어지는 게 끔찍했다. 보석도, 옷도, 저를 보고 선망하는 사람들의 눈빛도 여전하기를 바랐다. 신을 모시는 신관이라기보다는 탐욕스러운 상인 같다지만, 상관없었다.
돈만 있으면 신앙심도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권력도, 신권도 결국은 다 돈으로 휘두를 수 있다면 돈이야말로 신이 아닌가? 미아르는 점점 멀어지는 제 신을 다시 찾아올 방법에 관해 생각하며 방금 묶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녀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돈 냄새 나는 일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거라고 되뇌면서.
방을 나온 미아르는 거침없이 신전의 흰 대리석 위를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따르던 종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혀를 입천장에 붙였다 떼 소리내기를 반복하며 고심하듯 이마를 찌푸렸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가늠할 때 자주 드러내는 버릇이었다.
“……그 여자.”
“예?”
“헤일라라는 여자 말이야.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