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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11화 (11/97)

11화.

“널 내보내면 네가 영영 나 같은 건 잊고 떠날까 봐 무서웠어. 너랑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언니를 방치했어.”

언니를 위해 산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매일 레테를 가장 사랑한다는 속살거림은 거짓을 바른 달콤한 얼음과자일 뿐이었다. 신이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만큼 텅 빈 최면. 레테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언니가 그렇게 된 건 제 탓이 맞다.

죄가 끝없이 어깨 위에 얹어졌다. 어쩌면 이게 운명이라는 추일지도 모른다. 헤일라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할 말이 있었다. 이제는 끝을 내는 게 좋다는 걸 알려야 했다. 지지부진하게 미뤄 왔던 둘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할 때였다.

헤일라는 절망과 결연 그 어디쯤을 부유하는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안.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고하려는 입술 위에 다급한 손이 얹어졌다. 남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짙었다. 그는 막힌 입을 두고 눈만 끔뻑대는 헤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이를 꽉 물었다. 턱에 진 굴곡이 저조한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쉰 뒤 손을 내렸다.

“너 지금 많이 아파.”

“……난 지금 제정신이야.”

“사흘을 내리 앓고 정신을 차린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억지 부리지 마.”

정신이 나가 버린 여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그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헤일라의 반박을 모두 차단했다.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약을 탄 쓴 물을 갖다가 억지로 마시게 하고는 눕힌 뒤 잠에 들 때까지 옆을 지켰다. 드물게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옆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말을 걸 수 없도록 암묵적으로 눈치를 주었다.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수백 가지의 문장을 머릿속으로 조립하다 이내 관두었다. 결국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처지였다. 그런 만큼 그녀는 시간을 들여 그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레테에게 상처를 주고 후회했던 것처럼, 리안에게도 이기적으로 굴어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언니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헤일라는 가볍게 자책하고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책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옆에 있다. 옆에. 아마도 잠을 깰 때까지 있어 주겠지. 정리해야 하는 인연임에도 리안의 존재에 안도하는 저가 한심했다.

그리고 그가 옆을 지켜 줄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해 보다가, 문득 그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 감사해서 손끝이 떨렸다. 애써 티 내지 않았지만 리안의 눈에 충분히 들어올 만큼의 움직임이었다. 헤일라는 눈을 뜨지 않았고 리안도 금세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 기운 때문에 머리가 점점 둔해지면서 노곤해진 헤일라는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색색 대는 숨소리를 내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둘만 있는 방에 탁, 하고 책 덮는 소리가 울렸다. 평소에 헤일라의 잠든 얼굴을 수 시간 동안 홀린 듯 감상하는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리안은 그저 제 손안에 들린 책의 표지만 빤히 응시하다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책을 두고 침상에 다가갔다. 여전히 땀에 조금 젖어 있는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짓으로 그걸 걷어 내다가 이마에서 볼로, 볼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턱 끝으로 중지를 미끄러트렸다. 그대로 목 중앙에 손끝을 올린 채 몇 초간 미동이 없다가 손 전체를 써서 얇은 목을 쥐었다. 한 손에 목덜미까지 잡힐 정도로 가녀렸다.

힘을 조금만 주면 틀림없이 바스러져 버릴 생명.

리안은 어느 정도의 힘으로 그녀의 죽음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 가늠하다가 움칠 떨고는 손을 떼어 냈다. 저가 생각해도 위험한 순간이었다.

“너는 왜 항상 내가 생각지 못한 일을 벌이지?”

아래에 꿇어앉고 조신하게 손을 모아 침상 위에 올린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실수할 뻔했잖아.”

성가신 아이를 꾸짖는 말투였다. 목을 쥐었던 손을 반복적으로 쥐었다 펴는 움직임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년 때문에……”

감히, 그 버러지를 선택하겠다고…… 그는 헤일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서 음울함을 묻히고 미간을 모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팔을 둘러 온기를 나누어 주었으면서 지금은 단호하게 끊어 내려는 게 여간 괘씸한 게 아니었다.

리안은 손을 뻗어 헤일라의 볼을 쓰다듬고 가만히 대었다. 이런 순간이 익숙한 듯, 몽중을 헤매는 데도 여자는 볼을 묻고 남자의 체취에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고롱대는 소리가 유순하게 흘러나왔다.

“으응…….”

“이렇게 예쁘게만 굴어야지.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그는 큰 손의 온기에 부빗거리는 얼굴에서 퍽 매정하게 손을 빼내고 약하게 코를 튕겼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공격당한 코가 옅게 찡그려지는 반응을 진득하게 살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리안은 그대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녀를 상대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할 필요는 없었다.

* * *

“그 아가씨께는 언제 걸음 하실 예정이세요?”

여자치고는 저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리안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연장의 관람석에 앉아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개인실처럼 마련된 관람석의 긴 소파에 앉아 있는 건 그 혼자였다.

“낯선 곳에서 무서우실 걸 알면서…… 정말 악취미는 여전하세요.”

웃음 섞인 타박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리안은 무대를 내려다보며 눈꼬리를 매끄럽게 휘었다.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끄웨에에엑! 그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대 중앙에 묶여 해부당하고 있는 남자는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몰골이었다. 재갈을 물려 놓은 입의 살점들도 이미 너덜너덜해져 치아가 그대로 내보였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은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거나 저들끼리 담소를 나누었다. 리안처럼 높은 층에 개인 공간을 배정받은 이들은 대리석 난간에 몸을 기울이고, 금테 두른 작은 망원경으로 잔혹함을 낱낱이 살피려고 했다. 게다가 몇몇은 낄낄대며 얼른 성기의 표피를 발라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리안 또한 고통스러운 비명에는 무감한, 권태로운 낯이었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취미랄 게 있나요. 저는 그저 쓰레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뿐이랍니다.”

“돈에 환장하는 영감이 들으면 좋아하겠어.”

루드비히 대신관을 일컫는 말이었다. 순간 미아르의 볼이 움칠 튀어 올랐으나 곧바로 태연한 얼굴을 가장해 냈다. 후후. 여자는 작게 웃으며 리안의 앞으로 나아가 난간에 손을 짚었다. 아래가 아주 잘 보였다. 상체가 구부려지며 자연히 굴국이 진 엉덩이 아래로 붉은 원단의 치맛단이 내려앉아 있었다. 본래 신관이라면 고를 수 없는 색이다.

하기야, 신전에서 금하는 살육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여자였다. 일반적인 신관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기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귀족 출신의 신관 미아르. 그녀는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기로 유명했다. 재물을 끌어모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부도덕하거나 신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서 하는 데 도가 텄다. 이건 신전에 연이 닿아 있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왜 사흘이나 아가씨를 혼자 두시는지 말해 주지 않을 셈인가요?”

미아르가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 뒤로 다시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둘은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일 아니야.”

“어머, 정말 그럴듯한 변명이네요.”

“…….”

리안은 한번 물면 결코 놓지 않는 미아르의 개 같은 성격을 아주 잘 알았다. 대신관마저도 이 성격에 학을 떼 미아르가 밀어붙이는 일이면 그저 따르는 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죽일 뻔했어.”

“……며칠이나 간호했던 아가씨를요?”

“응.”

“와…….”

정말 화끈하시네요! 미아르는 속에 말을 삼키며 살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슬쩍 그의 옆에 앉아 대화를 이어 갔다. 왜냐고 묻는 속삭임이 꽤 비장했다.

“헤어지자고 했거든.”

“……알 만해요. 그런데 확실히 공자님답지는 않은데요. 꽤 아끼셨는데 바로 죽일 생각을…… 원래 그렇게 성급한 편은 아니었잖아요?”

리안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미아르가 저에 대해 다 안다는 듯 떠드는 게 같잖으면서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들이나 하는 짓을 저지를 뻔했다. 순간의 감정에 못 이겨서 일을 망치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실수였다.

“그렇지.”

그녀가 저를 버리려고 하는 게 자신을 미치게 한다면,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게 먼저였다. 안 그래도 리안은 꽤 오래전부터 헤일라의 곁에서 레테를 치우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조력자를 만들고, 많은 상황을 꾸며 내고,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왔다.

그리고 예정대로 몇 달만 참으면 레테라는 방해꾼은 사라진다. 안 그래도 리안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일 뻔한 것에 관해 후회하는 중이었다.

“원인을 제거하면 곁을 떠날 리가 없는 착한 아이인데 내가 성급했어.”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남자는 한층 나긋해진 얼굴이었다. 리안을 꽤 오랜 시간 봐 온 미아르는 그가 전에 없이 관대해졌다고 평하며 난간에 턱을 괴었다.

확실히, 헤일라라는 여자는 어딘가 삐그덕대는 리안을 조금 바꾸어 놓았다.

“뭐어, 그래도 팔다리 중에 하나는 자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우리들이 배운 대로. 리안은 귀족의 됨됨이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배운 자였다. 악랄하고 교활하게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게 그들의 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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