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10화 (10/97)

10화.

“곧.”

“그 말만 서른 날째잖아.”

그리고 나도 인제 그만 시달리고 싶다고. 친우와 황제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베르디안은 불만이 잔뜩 끼어 있는 얼굴로 뇌까렸다. 후작 가가 황실과 결탁하여 장기 암시장의 주최권을 유지하고 있는 일만 아니라면 이런 귀찮은 일은 떠맡지 않았을 테다.

리안은 베르디안 쪽을 흘금 보고 다시 헤일라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보드라운 이마에 난 길쭉한 상처를 피해 조심조심 손가락을 놀리니 칭얼대는 신음이 샜다. 베르디안의 같잖은 재촉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어여뻤다. 이걸 두고 다른 곳으로 걸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예뻐.”

그는 홀린 듯 헤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침대에 턱을 괴었다. 베르디안은 못 말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아마 계집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내내 저런 얼굴일 게 뻔했다.

“성년이 되고 이 년 이내. 잊지 않았겠지.”

“그럼.”

“…….”

“타센을 죽이고 다음 공작이 되기에 무리 없는 나이가 됐지.”

리안은 건조하게 답하고는 다시 헤일라의 손을 주물럭댔다. 제 아버지를 명명하는 단어가 차갑기 그지없다. 베르디안은 잘 알고 있어 다행이라는 핀잔만 남겼다. 다행히 황제와의 거래를 머릿속에서 지운 건 아닌가 보다.

황실만큼의 세를 누리는 공작가는 늘, 황족의 날카로운 걸림돌이었다. 의술과 예언의 힘을 독점하고 있는 신전만 견제하기도 힘에 부치는데, 휴리트 가는 강력한 군권을 쥐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들이 다스리는 북부의 사병 규모와 군사들의 실력은 황실 궁의 군사들보다 월등했다.

“저 여자 집에 머무를 때부터 입이 닳도록 말했다만, 타센은 이미 네 거처를 알고 있어. 폐하께서는 타센이 바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네 말을 믿고 기다려 주시는 거다. 그런데……”

“그만. 폐하와 네 인내심이 다 닳았다는 건 나도 알아.”

리안은 조금씩 커지는 베르디안의 목소리가 헤일라를 깨울 것이 염려되어 말허리를 잘라 냈다.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 나도 얼른 아버지의 목을 따서 은쟁반 위에 올려 두고 싶거든. 물론 폐하께 양보해야겠지만.”

게다가 현 휴리트 공작은 황제의 여동생을 약탈혼으로 빼앗은 것으로 유명한 사내였다. 황제는 동생을 겁탈한 리안의 아비를 끔찍하게 증오했다. 그러니 타센 휴리트를 빼닮은 조카를 아끼는 태도는 퍽 의외로운 일이었다. 비록 조카에게 아비의 목을 베어 오라 주문하기는 했지만…….

“나도 얼른 헤일라랑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딱히 상관없어 보인다. 리안은 아비를 죽이는 패륜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공작가의 주인을 자신이라 여기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저 계집을 부인으로 삼아 둔 것 같았다.

굳이 토를 달지 않는 거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난 베르디안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문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지루하다 못해 피로가 쌓이는 기분이다.

“오늘 밤에도 이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

“그래.”

아, 달뜬 숨을 내뱉는 여자를 몰래 탐하려는 셈이 너무나 빤해서 짜증이 올라왔다. 자신은 리안 때문에 황궁과 신전을 오가느라 며칠째 장난감들과 놀지도 못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재미를 톡톡히 보는 꼴이라니.

오늘은 신전의 신관 계집 몇과 질펀하게 뒹굴어야겠다. 베르디안은 스스로 이 정도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을 받드는 여인들은 퍽 달았다. 배덕감에 절어 바동대면서도 질질 싸는 모습은 신관은커녕 짐승 같아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마 저 헤일라라는 여자보다 훨씬 만족스럽겠지.

“그리고 황궁에는 열흘 뒤에 들른다. 그전에는 서신을 보내는 거로 하지.”

등 뒤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리안의 통보였다. 그것도 몇 주간은 베르디안을 전달책으로 더 써먹겠다는.

리안도 그냥 저 계집이랑 같이 뒤졌으면.

베르디안은 저주를 퍼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몸 섞을 신관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는 방을 나서며 분 섞인 한숨을 흘려 냈다.

* * *

사방이 캄캄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데 갉작거리는 어떤 생명이 발꿈치를 타고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환상이었다. 축축한 게 자꾸 목덜미며 가슴에 닿아 저를 핥아 댔다. 남의 손이 닿은 적 없는 아래를 닦고 벌려 희롱하기도 했다.

헤일라는 몸부림치다가 반짝 눈을 떴다. 깨끗한 천장만 보였다. 달뜬 숨과 땀에 젖은 잔머리의 감각만 진하게 느껴졌다.

“헤일라.”

“……리안.”

그녀는 눈을 뜨고 멍하니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언니가 밀쳐서 쓰러진 뒤에, 머리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흐르고…… 막다른 길에 서 벽을 더듬는 기분으로 기억을 이어 봤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절한 게 맞는 것 같다.

“언니는?”

담담한 얼굴은 잔잔하기만 했다. 리안은 조금은 실망한 낯이었다. 이 꼴이 되고도 언니를 먼저 찾는 헤일라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돌봐 줄 사람을 보냈어.”

“……응.”

“사흘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어, 너.”

헤일라는 그렇구나, 하는 말만 남기고 잠시 눈을 감았다. 리안은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펴 그 안에 뺨을 묻었다. 누가 봐도 연인을 염려하는 남자의 절박함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깊이 입 맞추고 얼굴을 들었다.

“계속 레테랑 살 수 있겠어?”

리안은 더듬거리며 어렵사리 말 꺼내는 연기를 매끄럽게 해냈다. 레테가 보았다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손뼉이라도 쳐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일라는 그런 리안을 보다가 잔잔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냥 사고였어.”

“헤일라.”

“난 언니랑 계속 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안 변해.”

“……그래. 우선 식사부터 하자.”

그는 부러 딱딱한 음성을 꾸며 내며 작은 종을 울렸다. 신전의 시종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일순 헤일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해.”

익숙하게 명령하는 모습이 꼭 귀족 같았다. 그는 깔끔하게 준비되어 나온 음식을 침대 위 간이 탁자 위에 올려 손수 식혀 주었다. 걸쭉하고 고소한 죽 냄새가 금세 코끝에 닿았다. 헤일라는 빠르게 준비된 음식과 사용인을 흘끔대다가 물었다.

“여기는 어디야?”

“같이 일하는 사람 집. 형편이 나쁘지 않아서 약도 구해다 줬어.”

“혹시 귀족이야?”

방은 한눈에 봐도 넓고 아늑했다. 그가 귀족과 연이 닿아 있을 일은 없겠지만 평생 사치품과는 관련 없던 헤일라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이 정도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장사꾼.”

“아아…….”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런 지인이 있다는 게 의외롭기는 했지만, 제국은 황실의 전폭적인 투자로 주변국과의 상업이 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귀족만큼 부유한 평민 상인도 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 주변에 없었을 뿐.

헤일라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멀뚱히 응시하다가 그가 내미는 음식을 억지로 입에 넣었다. 아주 오랫동안, 씹어 뭉갤 구석이 없을 때까지 머금고 있었다. 삼키는 순간 전부 게워 낼 것 같았다. 뭉그적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리안이 등을 쓸었다.

“잘 먹어야 금방 나아. 상처도 잘 아물고.”

입 주변을 닦아 주는 손과 닿는 눈길이 애틋했다.

“그래.”

언제나 이런 다정이 좋았다. 숨 쉬듯 그녀를 아끼고 돌보는 남자의 눈에는 꿀 같은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부모는 처음부터 주지 않았던, 언니는 이제 주지 않는 사랑에 발끝부터 녹는 기분이었다. 마치 꿈속에서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실제로 오래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리안과 꼭 붙어 함께했다.

그러나 허상은 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녀는 긴 꿈에서 깨어난 순간 깨달았다. 이제는 마냥 안온함에 취해 있을 수 없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헤일라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테를 떠올렸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 거잖아. 병들어서 추하게 죽어 가는 나한테 질려서, 지쳐서…….’

절벽 끝에선 사람도 그보다 위태롭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절박하고 고통에 찬 레테는 본 일이 없었다. 어떤 고통에도 의연하고 냉랭하던 언니였다. 한때는 고고했던…… 닮고 싶었던 나의 우상.

그런 언니가 칼을 휘두를 정도로 이성을 잃기까지 자신은 무얼 했던가.

“우욱…….”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이불 위에 먹던 걸 모두 게워 냈다. 리안은 놀라지 않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듯 두드린 뒤에 하녀를 불렀다. 손이 떨릴 정도로 동요하는 사람은 헤일라 혼자였다.

“괜찮아, 오랜만에 식사하면 이럴 수 있어.”

놀랐지. 속삭이는 리안은 여전히 다정했다. 아기처럼 포대기에 안겨 소중하게 다뤄지면 자연히 동반되는 나태한 안정감. 너무 따뜻해서 그냥 눈을 감고 수면 아래로 잠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방금의 음울한 상념이 옅어졌다.

아아, 헤일라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리안은 잠시 놀란 듯 손을 멈칫했다가 이내 부드러운 뺨에 입 맞췄다.

“나도 그래.”

그녀는 엷게 웃었다. 위선자인 저와 사랑을 주고받는 리안이 가여웠다. 후두둑, 또 눈물이 떨어졌다.

“왜 울어?”

리안은 드물게 당황했다. 먹은 걸 다 게워 낼 때는 침착하게 대처하던 그도 종잡을 수 없는 여자의 감정 앞에서는 더듬거렸다. 물기를 덜어 내는 손길이 서툴다.

“리안.”

“응.”

“내가 잘못 한 거야.”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언니가 불안해하는 걸 알면서도…… 널 좋아해서, 곁에 두고 싶었어. 레테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는 걸 알았는데도 고집 피웠어.”

난 언니가 미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헤일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흐느꼈다. 들키고 싶지 않아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모든 걸 고백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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