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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9화 (9/97)

9화.

허리를 조여야 한다는 이유로 다섯 살 때부터 습관적으로 자매를 굶기던 부모님도, 언니를 팔아넘긴 돈으로 꾸역꾸역 살아남은 자신도, 그런 주제에 언니를 사랑하는 나에 대한 환멸도 잊을 수 있었다.

마치 구원처럼.

“레테가 죽으면 영영 함께하자.”

그래서 헤일라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모든 게 평온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었고 그저 안온했다. 남자의 품에 파고드는 말랑한 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좋아해.”

그러니 이 말 또한 누가 하였든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여린 음성 뒤로 밤새 우는 소리가 아득하게 퍼졌다.

* * *

그대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둘은 동이 트는 걸 지켜봤다. 리안의 겉옷을 함께 둘러매고 해 뜨는 걸 지켜본 헤일라는 포근한 밤에 꿈을 꾼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뜨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금세 멀쩡해진 리안의 다리에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레테를 걱정하느라 아무렴 어떤가, 하고 넘겨 버렸다. 레테가 어떤 방식으로 화를 낼지 그녀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벌써 피로가 몰려왔다.

“잠시만 밖에 있어.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만. 응?”

헤일라는 불똥이 리안에게 튀는 게 싫어서 그를 문 앞에 세워 두고 먼저 집으로 들어섰다. 심호흡을 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낡은 문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거렸다. 평소처럼 애써 밝은 표정을 꾸며 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온갖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주방, 공기 중에 떠다니는 쿰쿰한 냄새. ……열려 있는 레테의 방문.

“언니!”

비명과도 같은 부름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 혹시 내가 없는 새에 누가 찾아온 건 아닐까. 언니 혼자 있는 집에…… 언니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턱이 덜덜 떨렸다. 혹시나, 아주 만약, 레테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거라면 나는…….

헤일라는 울먹거리면서 계속 레테의 이름을 불렀다. 밖에 있는 리안을 불러야 할까? 판단이 흐렸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의 탁자 아래였다. 숨을 죽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언니.”

레테였다. 레테가 손에 무언가를 꽉 쥔 채로 엎어져 있었다. 헤일라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쭈그려 앉았다. 언니의 생사를 확인하려 뻗는 손에 잔 상처가 빼곡했다.

“……언니, 언니, 언니…….”

피부에 닿은 몸이 차가웠다. 헤일라는 레테를 세게 흔들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희게 질린 레테의 얼굴이 조금씩 움직였다. 살아 있다.

“아, 아, 언, 언니…….”

“…….”

레테는 말이 없었다. 헤일라는 언니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몸을 더듬다가 하의가 조금 축축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흰 잠옷에 누런 자국이 있다. 소변 자국. 헤일라는 큰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웠다. 평소처럼 부축해 욕실로 데려가려 했다. 실례를 한 언니를 리안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

그때, 레테의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왜 돌아왔어?”

집에 하나밖에 없는 무딘 식칼.

“……언니.”

“그 새끼랑 도망간 거였잖아. 그런데 왜.”

“아냐. 아냐, 언니. 정말 아니야.”

헤일라는 레테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면서 설명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익숙했지만 이런 얼굴로 흉기를 들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언니를 달래 보려 했다. 그러나 레테는 여전히 어딘가 부서진 얼굴이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 거잖아. 병들어서 추하게 죽어 가는 나한테 질려서, 지쳐서…….”

“타바에를 구하려고 한 거라니까? 그러려고, 나랑, 리안이랑…….”

빼빼 마른 손이 헤일라의 어깨를 억세게 밀었다. 리안의 이름이 언니를 자극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레테는 무어라 중얼대다가 손을 꽉 쥐었다. 그 박약한 떨림이 칼끝까지 전해져 날카롭게 빛났다.

희멀건 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눈물로 반질거렸다.

“아악!”

항상 뭉툭하고 다정한 음성만 뱉던 입에서 째지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헤일라는 칼을 휘둘러 제 목을 찌르려고 한 언니의 팔에 매달렸다. 레테는 병자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동생을 밀쳐 내고 다시 칼을 자신의 목에 들이밀었다. 칼끝의 궤적이 선명한 핏방울의 동선을 자아냈다.

“제발, 제발! 언니, 흐, 언니…….”

레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죽음을 방해하는 동생의 뺨을 무자비하게 치고 밀쳤다. 헤일라는 꽤 끈질겼다. 레테가 휘두른 칼에 손등이 베여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레테가 저도 모르게, 헤일라의 머리를 칼등으로 가격했다. 억센 힘이었다.

둔탁한 타격음 뒤에 비쩍 마른 여체가 뒤로 넘어갔다. 일순 모든 것이 멈추었는데 헤일라의 몸만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녀는 그대로 넘어져 딱딱한 바닥에 얼굴을 찧었다. 오래되어 나무가 우글우글 올라온 바닥이었다. 찧은 이마에서 피가 새었다.

“……헤일라.”

정적이 흘렀다. 레테는 칼을 떨어트리고는 헤일라 쪽으로 기어갔다. 얼빠진 얼굴이었다. 동생을 천천히 흔들어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삐걱대며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곳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리안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순간 파드득, 창밖에 새 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02. 뱀 둘

“대단한 정성인데?”

신전의 가장 깊숙한 방에 키득대는 소리가 울렸다. 평범한 신자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방. 헤일라는 방의 중앙에 자리한 침대에 몸을 묻고 누워 리안의 시중을 받는 중이었다. 삼 일 내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끙끙댔지만 그는 지극 정성으로 수발을 들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신관의 확신을 받아 낸 뒤로는 기분이 퍽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베르디안은 문가에 서서 리안의 추태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다가 여자의 외양을 구경해 볼 심산으로 둘에게 다가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안은 앓고 있는 여자의 이마만 젖은 수건으로 닦아 줄 뿐이었다. 남의 시중이라고는 생에 처음으로 들어 볼 것 같은 남자는 함함한 미소를 지으며 헤일라의 옆을 지켰다.

“예뻐.”

축축한 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속삭이는 꼴이 가관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볼에 입 맞추는 낯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여자가 웅얼거리면 다정하게 토닥거리면서 지분거리기를 며칠째였다.

헤일라의 흰 목덜미에는 물감처럼 번진 붉은 기가 묻어 있었다. 간호를 한답시고 내내 물고 빤 장본인은 그 옅은 자국을 사랑스럽다는 듯 만지작댔다.

베르디안은 리안의 낯간지러운 행동을 유심히 살피다가 여자의 얼굴을 슥 훑었다. 며칠 앓아 얼굴이 여위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에 띄었다. 반짝거리는 백금발과 흰 피부, 오목조목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수북한 앞머리를 자르면 기구한 팔자는 빳빳하게 펼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래도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릴 만큼의 미인은 아닌데.

베르디안에게 여자는 그저 욕구를 풀 수 있는 보드라운 생명체에 불과했다. 어여쁘면 귀여워해 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기르는 개를 아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기실 모든 인간이 그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가치가 있는 것은 저를 즐겁게 해 주는 인간. 또는 생의 마지막 숨을 할딱이며 살육의 감각에 젖게 해 주는 인간들 정도였다.

그리고 베르디안이 유일하게 친우라 명명하는 리안은, 어릴 적부터 그와 기질이 엇비슷했다. 잔인하고 몰인정하며 어딘가 뒤틀린…….

그는 흐응, 하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리안과 헤일라를 번갈아 보다가 조금 떨어져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변해 버린 리안은 이전보다 재미가 없는 것 같다. 베르디안은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치면서 리안의 행각을 꾸준히 살폈다.

“흣, 싫어…….”

“쉬이, 괜찮아. 나야. 응, 옳지…….”

헤일라는 리안이 치대는 게 갑갑한지 무의식중에도 종종 몸을 뒤척였다.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베르디안은 리안이, 상당히 번거롭게 구는 여자의 몸을 누르고 입을 막아 버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거부를 표하는 헤일라에게 짜증을 내기는커녕, 달콤한 말을 속살거리며 달래기 바빴다. 둘이서만 살면 이런 일은 없을 거라는 둥, 지켜 주겠다는 둥,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말만 해 대면서.

지켜보던 베르디안은 마침내, 리안이 지금 행하는 모든 일이 잠시 유희로 즐기는 연극 같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전에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너, 완전히 돌아 버렸네.”

그리고 리안은 정말로 완벽하게, 이 계집에게 미쳐 있다. 베르디안은 헤일라를 바라보는 리안의 얼굴에서 완연하게 무르익은 광기를 읽어 냈다.

리안은 여자가 품 안에서 칭얼대는 건 다정하게 어르면서, 자신이 아닌 언니의 이름을 부르면 강박증을 앓는 사람처럼 비슷한 말만 해 댔다. 죄다 여자를 세뇌하기 위한 말들이었다. 레테가 얼마나 너를 증오하는지 아느냐고 물으며 너에게는 저밖에 없다고 속살댔다.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붙들고 할 짓은 아니었다.

“조금은.”

리안은 베르디안의 말에 옅게 웃으며 답했다. 베르디안은 그때부터 헤일라에 관해서는 관심을 끄기로 했다. 아무래도 헤일라는 그의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유희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사랑 놀음에 푹 빠진 리안도 당분간은 그럴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네가 언제쯤 약속을 지키실지 궁금해하시던데.”

리안은 황제를 상대로 꽤 뻔뻔했다. 처음 공작의 집을 나왔을 때는 필요한 돈과 인력을, 지금에 와서는 헤일라를 치료하기 위해 신전의 방과 치료사를 맡겨 둔 사람 마냥 요구했다. 언제까지 황제가 리안의 방자함을 참아 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리안은 황제와의 ‘약속’에 관해서는 별 계획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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