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리안은 이제 그만 장난치고 일어나 오늘 하루 머물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떨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헤일라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숨을 들이쉬었다. 체향이 달았다. 머리칼이 보드라워 손으로 쓸어도 보았다.
“읏…… 됐…… 됐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랍게도, 헤일라는 리안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족 보행을 배운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저를 안아 올린 적이 없었는데. 리안은 저답지 않게 당황해 입을 달싹거렸다. 되었다고, 내려도 된다고 거부하려고 하는데…….
“아악!”
“윽.”
헤일라는 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황한 리안은 그녀의 등에 기댄 채 그대로 넘어졌다.
“읏…… 흣…… 미안…….”
울먹임이 밴 목소리였다. 리안은 혼곤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답지 않은 장난을 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나.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샜다.
“푸흣…….”
헤일라는 입을 비죽거리다가 다시 제 위에 있는 리안에게 기어가 그의 팔을 살폈다. 큰 상처는 아니었는지 피가 계속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품에서 익숙한 손수건을 꺼내 남자의 팔에 매 주었다.
“같은 게 또 있었네.”
“아, 응. 항상 쓰는 거니까.”
리안이 얼마 전 정액으로 푹 적신 손수건과 같은 손수건이다. 그는 은근한 눈을 하고 물었다.
“이거, 내가 가져도 돼?”
“뭐 별거라고.”
어디에 사용할지는 꿈에도 모른 채, 헤일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넌 이런 데를 어떻게 알아?”
리안은 어둑한 산길을 익숙하게 해치고 허름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약간 부은 발목을 한 채 헤일라에게 반쯤 기대 이동하는 모습은 의심할 것 없는 병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가 엄살을 부린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 리안에게 바짝 붙어 기댈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일하면서 봤어.”
“그놈의 일은 대체 뭘 하는 거야?”
툴툴거리는 음성에는 은근한 궁금증이 끼어 있었다. 리안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 좀 있다가 날 밝으면 내려가자.”
밤에는 산짐승들이 산의 주인이었다. 헤일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혼자 있을 레테가 걱정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식사와 물, 용변 주머니 등은 모두 준비해 두었지만 말없이 집을 비우면 언니가 걱정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때 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날렵한 움직임이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어디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래?”
그녀 또한 바짝 긴장한 채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구석에서 무언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 벌레.”
천천히 다가가 작은 손바닥의 반만 한 벌레를 집어 들었다. 리안은 기겁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돌렸다.
“너…… 싫어했지?”
어딘가 신이 난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함께 산 날이 얼마 안 되었을 때 그가 식탁 아래를 기어 다니던 벌레를 목격하고 돌처럼 굳었던 사건을 기억해 냈다.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리안은 조막만 한 벌레에 진저리치며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래.”
헤일라는 그에게 다가가려다 말고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고는 장난을 멈췄다. 저 때문에 다친 남자애에게 짓궂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벌레를 던지고 벌레를 집었던 손을 윗옷에 슥슥 닦았다. 리안은 그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저 옷에는 절대 닿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픽 웃고 난 뒤 리안의 옆에 앉았다.
“야, 저런 벌레도 무서워하면 혼자는 어떻게 살려고 그래?”
넌지시 묻는 음성은 담담했다. 헤일라는 다시 리안과의 막연한 이별을 그려 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안의 체류는 기약 없이 길어지는 중이었지만 언제까지나 함께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이 헤일라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리안을, 아니, 그녀의 감정이 어떻든 헤일라는 리안의 발목을 잡을 마음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할 언니라는 존재가 있었으므로. 리안에게까지 그 짐을 지우지는 않을 셈이었다.
“이제 슬슬 더부살이 생활 청산해야 하잖아.”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
“그런 말이 아닌 거 알면서.”
“그렇게 들려.”
“……난 너랑 있으면 좋아.”
그녀의 충동적인 발언에도 리안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헤일라를 응시하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마주치지 못하는 쪽은 헤일라였다. 고집스레 정면만 보는 볼이 조금 부풀어 있었다.
“그럼 계속 같이 있으면 돼.”
꿰어 내는 태도가 여상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곱슬거리는 금발을 손가락에 돌돌 말아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모르는 거 아니잖아.”
“레테?”
“…….”
“아직도 알려 줄 마음은 없는 거야?”
리안은 언제나 자매의 기이한 관계에 관해 물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관계이기는 했다. 일방적인 헌신과 일방적인 착취는 가족이라기보다 노예와 주인처럼 보였다.
“……미안. 말 못해.”
헤일라는 말끝을 뭉개면서 눈을 내리감았다. 아롱아롱 맺힌 것은 필시 눈물일 것이다. 리안은 천천히 손을 얽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얽어 들어간 손가락이 뱀처럼 질기고 요요했다.
* * *
리안은 자매의 비극에 관한 실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헤일라 그녀 자신보다 더 깊이. 그럼에도 능구렁이처럼 헤일라의 입을 통해 사실을 알고 싶어 했다. 그 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그는 지독하게 들러붙었다.
레테는 헤일라에게 있어 떨칠 수 없는 하나의 그림자이며 과거이고, 아마 평생 놓지 못할 끈 같은 존재일 것이다. 리안은 언젠가 심복을 통해 알아낸 헤일라의 과거에 관해 떠올렸다.
돈밖에 모르는 부모가 딸 둘을 키워 내 늙은 귀족의 첩으로 팔아넘겨 한몫 챙기려고 했다는 아주 뻔하고 지지부진한 사실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헤일라는 어릴 때부터 미색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언니인 레테는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퍽 미인이었다. 부모는 꽤나 기대했을 것이다. 계집애 둘을 버리지 않고 키운 건 오로지 팔아넘기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헤일라는 재수 없게 돌림병을 얻게 되었고, 부모는 무엇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이윤이 남을지 생각했다. 결론은 헤일라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충분한 투자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유순한 헤일라 쪽이 휘두르기 훨씬 쉽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레테를 사창가에 팔아넘긴 돈으로 헤일라를 치료하고, 이 년 뒤 레테는 병을 얻은 채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그 공백 사이에 자매의 부모는 죽었다. 실종이라 하였으나 리안은 살인이라 단정했다. 아마 둘 중 하나가 죽였으리라. 또는 둘이 함께.
오늘 리안이 다쳤을 때 헤일라가 발작적으로 이성을 잃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남이 다치는 걸 가장 끔찍하게 여기니까.
“응, 괜찮아.”
“…….”
“그런데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떠나라고 하지는 마.”
“리안.”
“나 꽤 쓸모 있지 않아?”
그는 여상하게 저의 쓸모를 운운했다. 상대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는 숙박비라는 명목으로 과한 액수를 다달이 지급하고 있었다. 리안 덕에 힘든 주방 일을 그만두고 레테를 돌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헤일라는 찬물에 감자를 씻느라 손이 다 부르트던 겨울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허리도 펴지 못한 채 감자와 흙 채소를 손질하면서 울었던 것도. 그날 받은 일당이 겨우 한 끼 식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도.
그래서 귀퉁이가 썩은 감자를 주머니에 넣어 훔치다가 뺨을 맞거나 몽둥이로 구타당하곤 했다. 주인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썩은 감자였음에도 헤일라를 화풀이 인형 대하듯 때렸다.
리안을 산에서 발견한 그날도 헤일라는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안은 그녀가 지옥인 줄 몰랐던 지옥에서 발을 뺄 수 있게 도와준 장본인이었다.
쓸모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헤일라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렸다. 원치 않았다. 리안이 자신의 효용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곁에 있으려 하는 게 싫었다. ……그가 상처받는 게 속상해서.
“네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도 상관없어.”
리안은 꽤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헤일라의 마음을 조각내지 않고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니 거니까.”
일순 둘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했다. 리안은 잠자코 있었다. 헤일라는 조금 비참한 기분이 되어 읊조렸다.
“내 모든 건 언니 거야. 그래서 그래.”
헤일라는 멀쩡하게 모든 말을 뱉고 조금 울었다. 처음에는 티 내지 않으려 손끝으로 눈 아래를 톡톡 쳤는데 이제 그렇게는 감출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질질 흘렀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빈 오두막에 처량히 흘렀다.
“헤일라.”
“흐, 읏, 흐윽…….”
“쉬, 괜찮아.”
울다 지친 여자를 끌어안은 리안이 마른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는 조금 땀에 젖어 있는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헤일라는 더욱 깊게 안기며 입을 열었다.
“너도…… 다 알고 나면 내가 싫어질 거야.”
“…….”
“난…… 나쁜 애야…….”
헤일라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멀쩡하게 살아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나쁜 년이었다. 언니 목숨에 빌붙어 살아남은 파렴치한.
“아닐걸.”
“맞아.”
“그래도 상관없어.”
헤일라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색색대는 꼴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리안은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남자였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지.”
그리고 누구 거든 상관없어. 그가 하는 말 모든 게 달았다. 지난했던 모든 세월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헤일라는 리안과 함께 있을 때마다 괴로운 일들을 잊을 수 있어 행복했다. 짓눌리는 기분이 아니라서 모든 순간이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