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하하. 성격은 여전하네.”
가벼운 표정이었지만, 리안 또한 감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헤일라는 분위기를 전환시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만 웅얼대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둘 사이에 끼면 꼭 기 센 짐승들 사이에 눌린 소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누군데?”
“응?”
“없어졌다는 사람.”
헤일라는 바로 답하지 않고 텀을 두었다. 그녀는 언니에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누군가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에 관해서는 적당히 함구했다. 환자가 있는 집은 으레 그러하듯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과일 가게 둘째 아들.”
산에 오르는 걸 마지막으로 아무도 못 봤대. 리안이 드물게 친절을 베풀어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죽었겠네.”
“아, 언니!”
“왜? 흔하잖아. 산에서 나자빠져 뒤지는 거.”
레테는 가볍게 말하고는 미간을 모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헤일라는 리안을 내보내려고 눈짓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얼른 나가라고 고갯짓하자 리안은 어깨만 들썩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저 고집쟁이.
“그런데 그 애 네가 아는 애 아닌가?”
언니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헤일라는 얼마 전에 저가 조잘거렸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냥 보냈어. 리안도 예전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더라고.’
리안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언니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종종 그런 식으로 칭찬하곤 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연결됐다. 낭패다. 헤일라는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리안을 힐긋거렸다. 지금이라도 제발 나가 줬으면.
“저 새끼가 죽인 거 아냐?”
“……언니!”
레테는 동생 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리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멸시를 담아 말했다. 눈동자에 담긴 경멸이 필요 이상으로 진실했다. 둘은 만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긴장감과 울적함이 동시에 차올랐다.
“설마.”
리안은 그렇게만 답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려나 보다. 안도감이 가슴께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처리할 능력이 있었으면 너부터 묻었겠지.”
“야!”
씩씩대는 건 헤일라 혼자였다. 오히려 악담을 주고받은 둘은 평온하다. 레테는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싸늘하게 명령했다.
“너도 이제 나가. 저거랑.”
그리고 땅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쓰레기는 둘 다 치우고.”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건 리안이었다. 헤일라는 냉큼 사과를 줍고 자리를 정리했다. 언니가 물건을 던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이 정도에서 상황이 정리된 데 깊이 감격하며 마지막으로 언니의 이부자리까지 살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뒤를 돌려고 하는 찰나 레테의 음성이 닿았다.
“그리고, 내일은 타바에를 구해 와.”
레테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방증이었다.
* * *
숲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했다. 사람 손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섰을 때 헤일라는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안을 돌아봤다.
“난 정말 괜찮아.”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리안이 자신을 도울 필요는 없었다. 타바에를 찾아 산을 헤맨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레테의 짜증은 점점 심해지고 지독해져서 오늘도 간단한 짐을 꾸려 나온 길이었는데, 리안이 방긋거리며 따라나섰다.
쉬는 날이라 바람을 쐬고 싶다나. 핑계도 이렇게 뻔한 핑계가 다 있나.
“나도 괜찮아.”
리안은 헤일라를 앞질러 걸어갔다. 밟히는 마른 나뭇잎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평소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아마 더 말려도 소용없을 거다. 그녀는 그냥 리안과 함께 산을 뒤지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엔 정말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픈 목 뒤를 주무르며 다시 나무 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오늘은 꼭 과일을 구해 레테에게 주고 싶었다. 심술이기는 했지만 귀한 과일이니 몸에도 좋을 테다. 언니를 끔찍하게 아끼는 헤일라는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사고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타바에인지 뭔지 하는 과일은 안 보였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곧 하늘에서 자취를 감출 시간이었다. 오늘도 분명 언니가 들들 볶겠지. 리안도 함께 찾아 주었는데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어 의기소침해졌다. 입술이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온다.
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그걸 이렇게까지 해서 구해야 해?”
“언니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타바에는 구하기 쉬운 과일이 아니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나기는 하지만 재배 환경이 까다로워 수급이 많지 않았고, 귀족가에 납품하는 물량이 대부분이라 헤일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깊은 산중에서 직접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테의 심술이 지독한 이유였다. 리안은 보기 드물게 풀이 죽은 헤일라의 얼굴을 감상하면서 걸었다.
“어어!”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고조된 목소리가 울렸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 껍질이 잔뜩 벗겨진 나무 하나에 과일이 몇 개 열려 있었다. 타바에였다. 여섯 개의 모서리가 있고 각진 모양이 책에서 본 그것이었다. 헤일라는 흥분해서 그곳으로 다다다다 뛰었다. 다 큰 처녀가 열댓 살 먹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내가 금방 올라가서 따 올게!”
저기를? 리안에게야 쉬운 일이었지만 밤톨 같은 여자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높이였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조금 다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어디 하나가 부러지거나…… 그렇게 되면 산을 내려가기도 힘들 텐데.
만약 이 산에서 자신의 신변이 잘못되어도 헤일라는 레테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리안은 궁금증이 일었다. 지독한 실험 정신 같은 것이었다. 다리를 다쳐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여자를 상상했다. 묘한 만족감이 배에 묵직하게 똬리를 틀었다.
* * *
“야아!”
리안이 몽상하고 있는 사이 헤일라는 이미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찔한 높이였다. 헤일라는 생각보다 능숙하게 과일에 닿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줄기가 억센지 따는 데 애를 먹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과일을 흔들어 댔다. 열댓 번 정도 강하게 자극을 주니 와직 소리를 내며 과일이 가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불길한 소리가 리안에게까지 닿았다.
투툭.
과일과 함께, 그녀가 매달려 있던 두툼한 가지도 함께 부러졌다. 내심 이 상황을 고대하던 리안도 움칠 떨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헤일라가 떨어질 자리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행동한 뒤에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따를지도 계산하지 못한 채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몸과 제 몸이 겹쳐졌다. 무자비하게 무게를 더해 추락한 몸이 리안의 몸을 뒤로 넘겼다.
“아악!”
“윽.”
둔탁한 소리와 둘의 탄성이 섞여 울렸다. 저도 모르게 일을 친 리안은 눈을 꾹 감고 침음을 흘렸다.
“리안?”
헤일라는 저를 받치고 있는 몸을 더듬었다. 따뜻한 몸.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는 리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피…….”
강하게 넘어지면서 뾰족한 무언가에 살을 찢겼는지 리안의 팔과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리안은 황망하게 피 묻은 손을 더듬는 헤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른 비키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헤일라는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파르르 떨더니 무언가를 확인하듯 다른 곳을 더듬댔다. 작고 말랑한 손이 남자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으며 확인했다. 당황한 리안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 모습만 지켜보다가 그녀의 손이 허벅다리를 더듬을 때 바짝 굳었다.
“일단…….”
“아, 피, 피가…….”
리안은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말을 건넸지만 헤일라는 혼란한 사람처럼 울먹이기만 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을 때는 헤일라가 리안의 상처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릴 때였다.
“정신 차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헤일라는 호흡을 힘들어했다. 리안은 몸을 일으키고 맞은편 어깨에 손을 올려 눈을 맞췄다.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명료한 목소리로 숨을 천천히 쉬어 보라고 말하자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나 괜찮으니까.”
“응, 응…….”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어스름이 낀 산은 어둡고 위험하다. 리안은 욱신거리는 다리의 상처를 가늠했다. 산을 못 내려갈 정도는 아니다. 그러다 생각의 향로를 전환했다.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언제나 헤일라의 하루를 통째로 갖는 일을 그렸다. 그리고 타바에를 구하러 나갔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헤일라와 산에서 머무르게 되는 건 그의 계획에도 있는 일이었다. 단지 생각보다 빠르게 기회가 찾아왔을 뿐.
그의 동업자도 둘이 돌아오지 않으면 마땅히 신호라 여기고 약속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리안은 오늘 산을 내려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어…… 걸을 수 있겠어?”
“좀 힘드네.”
“그럼, 그럼 업혀!”
헤일라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더니 몸을 낮게 쪼그려 조그마한 등을 내보였다. 업히라고 말하는 순간 내비쳤던 결연함은 한없는 진심을 담고 있어 웃음이 삐져나오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저도 절뚝거리면서 누구를 업고 가겠다고. 리안은 속으로 혀를 차다가 낑낑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어 느긋하게 일어나 헤일라의 뒤에 섰다. 곧 짊어질 무게를 가늠하는 헤일라가 침을 꼴딱 삼키는 모습이 훤히 비쳤다. 리안은 그것을 가엾게 여기다가,
“으앗!”
퍽 소리가 나게 헤일라의 위에 엎어졌다. 저보다 훨씬 단단하고 무거운 남자를 등에 이게 된 헤일라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리안의 다리를 손으로 받쳐 안정성 있는 자세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악! 흐악!”
자꾸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샜다. 리안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지켜보다가 가늘고 긴 목에 팔을 둘렀다. 고개에 얼굴을 묻고 조금 웃었지만 안간힘을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