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의 엄지가 헤일라의 손등을 뭉근하게 눌렀다. 놀란 헤일라가 파드득 떨며 제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제힘으로 빼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당황해 빼액, 소리쳤다.
“수, 수작 부리지 마!”
수작. 레테가 리안을 표현하는 말에는 꼭 저 단어가 들어갔다. 레테는 리안이 헤일라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다며 경멸을 드러내곤 했다. 저도 모르게 내뱉었는데 꽤 상황에 맞는 말이었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재미있다는 듯 헤일라의 머리칼을 몇 가닥 들어 올려 돌돌 돌리는 손가락이 길고 단정했다. 몇 번 튕기듯 부드러운 결을 쓰다듬다가 살살 정리해 주는 손길은 익숙해 보였다. 그의 손끝이 목덜미를 살짝 스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몰라. 나 먼저 씻는다.”
시냇가가 보이자마자 헤일라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욕실이 없는 집에 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목욕할 수밖에 없었는데, 리안이 오고 난 뒤부터는 한 명이 망을 봐 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약속이 되었다. 몸을 씻을 때마다 전전긍긍했던 헤일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서로의 몸을 보지는 않았다. 그냥 수풀 뒤에서 망을 봐 주는 정도였다. 어쩌다 한 번 실수로 그의 몸을 본 적은 있지만…… 헤일라는 그때가 떠올라 일순 얼굴이 붉어졌다. 아주 단단하고 자신과는 많이 달랐던 몸. 자잘한 상처가 언뜻 보였지만 매끄럽고 근육이 잘 잡혀 있었다. 그 몸을 기억해 내자 목덜미까지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 앉아 있을게.”
리안이 눈가를 휘며 웃었다. 아. 씻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도 꼭 저렇게 웃었는데. 다 아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뭉근한 호선을 그리면서.
저런 얼굴을 마주하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만 주억거리게 되었다. 왜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풍덩. 헤일라는 시원한 물에 몸을 담가 열을 식혔다. 굴곡을 띤 나붓한 몸이 물속을 유영했다. 따뜻한 물을 쓰지 못해 얼른 씻고 나가야 감기에 걸리지 않을 터였다. 헤일라는 꼼꼼하게 씻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때, 리안이 지키고 있던 반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몸의 반 이상을 드러내고 있던 헤일라는 깜짝 놀라 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요란하게 울렸다.
리안이 빠르게 몸을 놀려 소리의 주인을 추격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손에서 무언가 반짝, 하고 빛났다.
* * *
누가 물을 뜨러 왔다가 길을 잃었나? 헤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추워. 그녀는 리안이 얼른 다른 이를 쫓아내 주었으면 했다. 약간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사이에 재빠르게 움직여 옷을 껴입었다.
대충 머리를 닦고 소란이 일었던 쪽으로 향했다. 리안이 누군가의 입을 막고 위에 올라타 누르고 있었다. 아래에 깔린 남자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으나 별로 힘을 쓰지는 못했다. 리안은 제 뒤에 다가온 헤일라를 흘긋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단도였다.
“……너…….”
“아, 혹시 몰라서.”
그는 별 의미 없다는 투였지만 헤일라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단도로 뭘 하려고. 헤일라의 정색에도 리안은 어깨만 들썩였다. 그녀는 둘에게 다가가 리안의 아래에 깔린 게 누구인지 살폈다. 분명 다짜고짜 힘으로 찍어 눌렀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 이 애…….”
“으아아아아아!”
헤일라가 뭐라 입을 떼자마자 아래에 깔려 있던 남자애가 리안을 뿌리치고 일어나 달려 나갔다. 많이 놀랐는지 오른쪽 신발 한 짝이 벗겨졌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팔꿈치로 리안을 쿡 찔렀다.
“잘했어.”
“뭐가?”
“일부러 놔 줬잖아. 쟤 내가 아는 애거든. 과일 가게 데미 아저씨네 둘째야. 길을 잘못 들었나 봐.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다음에 신발 갖다주면서 사과해야겠다.”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헤일라는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신경 쓰여 툭툭 털었다. 그러다 땅에서 눈을 떼지 않은 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애가 지나간 발자국이 남은 방향을 바라보는 눈이 어딘가 낯설었다.
“너도 얼른 씻어.”
그의 손을 뒤에서 쥐니 마주 잡아 왔다. 리안은 헤일라의 젖은 머리를 보고는 수건이 있는 자리로 걸음을 옮겨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수건 위로 손을 얹어 천천히 쓸어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거의 다 닦여 물이 떨어지지 않게 되어서야 그는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
그날 만난 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일주일 뒤였다.
* * *
사위는 적막했다. 리안은 퀴퀴한 동굴 안쪽에서 단도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벌건 물이 손에 가득 묻어 찐득거리는데도 동요가 없었다.
“눈은 그대로 두라니까. 다 돈인데.”
베르디안이 투덜거렸다. 제국의 후작치고는 가벼운 말투였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끅끅거리는 남자를 발끝으로 몇 번 쳤다. 리안이 부탁했다기에 직접 ‘회수’ 작업을 하러 왔는데 제 친우는 저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리안은 저가 도려 내어 난자한 눈알을 발로 으깬 뒤 칼을 깨끗하게 닦기만 했다.
“그럼 이건 우리가 가져간다?”
루데인 후작가에서 주최하는 암시장에서는 인간의 장기가 매매 대상이었다. 신전에서 치료를 받을 돈이 있어도 이식할 장기는 언제나 부족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암시장에서 장기를 사고팔았다. 물론 그들의 뒤에는 거래를 묵인하는 황가와 신전이 있었다.
현 루데인 후작인 베르디안은 직접 밀매에 참여한 적은 없던 리안이 시신 한 구를 넘기겠다고 했다기에 궁금증이 일어 찾아온 참이었다.
“아직.”
“여기서 더 상하면 제값 못 받을 텐데.”
그는 공작의 아들인 리안이 아비와 척을 지고 가문을 나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고 있었다. 죄질이 더러운 수배범들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 놓고 브로커들에게 파는 일을 주로 했다. 그 브로커들은 고깃덩어리를 해체해서 암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의 반절은 웬 계집애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리안이 눌러앉아 산다는 다 쓰러져 가는 집의 주인이라 했다. 이름이, 헤일라라고 했던가. 얼마 전에 리안이, 정말로 주기 싫다는 얼굴로 조잡한 쿠키 하나를 건네며 말했던 이름이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피를 두어 방울 볼에 묻히고 해사하게 웃는 낯이 기괴했다. 상념에 잠겼던 베르디안은 리안의 얼굴을 보고 잠시 주춤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부터 의뢰받은 건은 시신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는 법이거든.”
헤일라가 가르쳐 줬어.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알이 뽑힌 남자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남자는 몇 분간 속에 고여 있던 토사물을 게워 내고는 꺽꺽댔다. 눈이 파이면서도 저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알지 못해 속으로 비명만 질러 댔었다.
“읏, 큽…… 크흑…… 사…… 사려…… 살려 주세, 으…….”
남자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꾸물꾸물 기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피 섞인 침이 줄줄 흘렀다.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안타깝다 느끼지는 않았다.
리안은 신음 소리를 들으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 혈향 가득한 숨이 꽉 찼다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미안. 그건 안 돼.”
“아, 으, 아아, 흐으으…….”
“요즘 계속 헤일라를 쫓아다녔잖아. 창문 너머로 흘긋거리다가 나랑 눈 마주쳤었지?”
“으, 자, 잘못…… 했, 어요…… 아, 아…….”
리안은 몇 시간 전에 이 남자의 눈에 담겼던 헤일라의 벗은 몸을 떠올렸다. 동그란 물방울처럼 부풀어서 귀여워진 젖가슴에 낭창한 허리선, 그 위로 금발이 쏟아져 꼭 인외존재라 착각할 만큼 고아했다.
저도 처음 본 몸이었다. 한 번 본 걸로 좆물이 질질 흐를 만큼 애가 달았다. 이 새끼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헤일라는 알지 못했지만, 이 남자는 한 달 전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집 주변을 맴돌거나 헤일라의 동선을 파악하려 애쓴 증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무엇보다.
“너, 이전에도 고아 계집애 한 명을 따라다녔었잖아.”
보호자가 없는 여자 하나를 납치해 강간하고 죽인 이력이 있는 놈이었다. 나름대로 뒤처리를 잘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도시에는 눈이 많았다. 들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는 이들이 문제 삼지 않은 것뿐이다.
리안은 이런 쓰레기가 헤일라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얼른 헤일라를 붙잡는 것들을 정리하고 안락한 곳에 가둬 두고 싶다.
일단, 이 버러지부터 처리하고.
베르디안은 눈을 뽑아 팔라고 저를 구슬렸지만 헤일라의 나체를 담은 눈을 이 세상 어딘가에 구르도록 둘 수는 없었다. 난자하여 깨끗이 없애는 게 마땅했다. 그리고 눈 다음은, 무가치한 생명을 없애 헤일라와의 모든 연을 끊어 내야만 한다.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나니까.”
리안은 바둥거리는 남자를 누르고 다리 사이에 축 처진 성기를 잡았다. 미리 준비해 둔 무딘 칼을 꺼내 기둥을 잘라 냈다. 스걱 스걱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렸는데, 베르디안은 역겹다며 투덜대면서도 눈을 떼지 않고 히죽댔다.
“아아악! 악! 아악!”
“시끄럽네. 역시 거기서 안 하기를 잘했어.”
그 애는 비명 소리를 싫어하니까. 리안은 성기를 천천히 잘라 내며 피식 웃었다. 마침내 성기가 완전히 몸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남자의 숨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리안은 그 남자의 머리칼을 쥐고 입안에 잘린 성기를 그대로 처박았다. 그리고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천으로 입안을 메우고 다시 재갈을 물렸다. 기도가 막혀 기괴한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아마 몇 분 이내로 저 남자는 숨이 부족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제 성기에 목이 막혀 죽는다니. 이보다 더 개죽음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