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4화 (4/97)

4화.

* * *

헤일라는 나무 결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든 닳고 닳은 나무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리안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들릴락 말락 한 한숨만 내쉬고 다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가 떠난 자리를 음울하게 흘긋 보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천천히 문을 열고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마르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일라의 언니인 레테였다.

“어디 다녀와?”

“신전에. 약이 다 떨어져서.”

시장에 들러서 언니 좋아하는 과일도 잔뜩 샀어. 헤일라는 쾌활하게 말하면서 침대 맡에 작은 쟁반을 놓았다. 레테의 식사였다.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뭉근히 끓인 수프와 속이 편한 으깬 감자 요리가 따뜻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흐응.”

레테는 그저 콧소리를 한 번 내고 숟가락을 들었다. 진하게 끓여진 수프를 휘적거리다가 입안으로 한 입 넣고 우물거렸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점성이 입안 가득 고였다.

“어때? 맛 괜찮지?”

헤일라는 계속 조잘거렸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언니의 시중을 드는 동생은 항상 쾌활하게 말을 걸고 언니의 기분을 살폈다. 다리를 쓰지 못해 답답할 레테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일이 제 몫이라 생각하는 아이였다.

“좋은가 봐?”

“언니랑 있어서 좋지, 그럼.”

헤일라는 다정스럽게 레테의 손등을 쓸었다. 멀거니 그걸 내려다본 레테는 앙상한 제 손과 동생의 손을 비교해 보았다. 단단하고 혈색 있는 손톱에 보드라운 손등. 도톰한 살결. 레테는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듯 제 손을 동생에게서 빼냈다.

“……이제 일은 안 나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헤일라는 꽤 큰 식당의 부엌에서 조리하는 일을 맡았다. 비죽비죽 잘려져 있는 긴 앞머리와 허름한 차림새 때문에 고용인은 그녀를 절대 손님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방 구석에서 조용히 음식만 만들었었다.

말도 안 되는 봉급을 받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일해야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 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식당 주인은 아랫것들을 착취하면서도 게을러서 가끔 식재료 한두 개를 빼돌려도 잘 들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켜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헤일라는 그 직장에 감사했다. 언니가 굶지 않도록 식사를 내어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나가지 않지. 헤일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안은 자매의 집에 머무는 대신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돈이 필요했고 리안은 숙박비라 생각하라고 간단하게 맺음 지었다.

그 돈을 모아 두어서 몇 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셈이 섰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헤일라도 일을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레테에게는 간병인이 필요했으니까.

헤일라의 모든 판단과 생활은 레테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리안에게 갖는 부채감보다는 이쪽이 중했다. 헤일라는 자신이 없을 때 레테가 고독하게 죽어 갈까 매일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순간 레테의 눈빛이 변했다.

“너, 그 새끼한테 다리 벌리고 화대 받아?”

단순한 조롱이 아니다. 레테는 날카롭지만 이성적인 얼굴이었다. 일순 헤일라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늠하면서 점점 안색이 파리해졌다. 믿지 못하는 눈이다. 둘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미지근했던 공기가 과열되어 눈앞에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무슨…….”

“다리 벌리고 돈 받냐고 묻잖아.”

“그만해, 언니…….”

“옷 벗어 봐.”

헤일라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와 같은 색의 또렷한 금안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파드득 소름이 일었다. 이러지 말라고 중얼거려도 레테는 옷을 벗으라고 소리 질렀다. 제 눈으로 확인해야 멈출 패악이었다. 이럴 때마다 무서웠다. 선득하고 서럽다가, 또 언니의 숨이 넘어갈까 염려되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벗으라고!”

퍽, 스튜를 담은 접시가 동그란 머리를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 좋은 금발에 누런 스튜가 질질 흘렀다. 먹기 좋게 미리 한 김 식혀 둔 게 천운이었다.

잠시 중심을 잃은 헤일라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언니를 마주 봤다. 여전히 분노에 차 있다. 침대 위에 있는 손이 떨리는 이유는 분을 못 참아서겠지. 헤일라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알았어.”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윗옷 단추를 푸는 손이 달달 떨렸다. 무슨 기분인지 저도 알기가 힘들었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목욕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언니가 옷도 벗겨 주고 머리도 감겨 주었는데. 왜 그때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눈물이 흐르니 뺨에 묻은 스튜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발로 문대면서 언니에게 다가갔다. 레테는 꽤 강한 힘으로 팔을 끌어당겨 동생의 벗은 몸을 샅샅이 훑었다. 목덜미, 가슴, 등허리와 엉덩이, 사타구니까지 모조리 확인한 뒤에야 헤일라를 밀쳐 냈다.

“네가 어떻게 구르든 내 알 바 아니야.”

“…….”

“그래도 창녀가 되는 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레테는 동생을 증오했다. 적어도 헤일라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저뿐만 아니라 동생까지 절망으로 난자되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면서도 동생이 완전히 망가질까 전전긍긍했다. 자신처럼 될까 봐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가끔 헤일라는 레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후두둑. 눈에 매달려 있던 투명한 방울들이 떨어졌다. 레테의 일갈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돌지 않았다. 헤일라의 눈이 레테에게로 향했다. 식은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잔머리, 오랜 병치레로 핼쑥해진 볼, 푸석한 머리칼, 그 아래, 이제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붉은 반점들…….

헤일라는 레테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엄지로 느리게 쓸어 주었다. 이마를, 눈 옆을 지나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어릴 적 동생이 흥분하면 그녀를 달래기 위해 레테가 종종 쓰던 방법이었다. 헤일라는 장난기 많은 어린애였고 언니는 혀를 차면서도 동생을 건사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알아.”

하지만 그런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헤일라가 레테의 삶을 갉아 먹고 살아남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그녀는 언니를 사랑하며 영영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흥분감을 가라앉히느라 가쁘게 호흡하던 레테는 눈알을 굴려 저를 쓰다듬는 동생을 느리게 훑었다. 그리고는 매섭게 손을 쳐 냈다.

“저거나 치워.”

헤일라의 눈이 곧바로 엉망이 된 바닥으로 향했다. 오래된 집이라 저렇게 두면 쥐나 벌레가 들끓을 게 뻔했다. 얼굴과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헤일라는 방구석에 준비되어 있는 마른걸레를 들고 왔다.

“잠시만. 금방 치울게.”

뜨거운 수프에 언니가 데이지는 않았는지, 옷에 묻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헤일라가 한 말은 이게 다였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얇은 음성이었다. 헤일라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레테가 자조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죽어 버리면 그 새끼랑 둘이 영영 살 셈이잖아.”

“무슨 소리야. 왜…….”

“글쎄.”

레테는 입꼬리를 약간 올려 웃었다. 최근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몇 년 전, 그래도 둘의 세계가 단단했을 때에나 가끔 흘리던 웃음이었다. 다정하고 무른 동생의 순진함을 조소하면서 꾸짖는.

“레테, 내 언니.”

헤일라는 어질러진 바닥을 닦다 말고 레테의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언니의 마른 손을 쥐고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야.”

“…….”

“언니를 버리는 건 나를 버리는 일이야.”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헤일라는 신이 앞에 있다 해도 이렇게 맹세했을 것이다. 레테는 그녀의 세계였다. 단 하나 남은 혈육이었으며 자신의 희망이었고 동시에…… 죄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오히려 생기를 돋우었다. 레테는 고요한 얼굴로 헤일라를 훑다가 이내 손을 빼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헤일라의 흰 뺨을 문질렀다. 눈물이 옮아 붙은 손끝이 촉촉해졌다.

“그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언니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씻기 위해 호수로 향하던 중 헤일라가 툭 던진 말이었다. 리안은 어두운 길에서 헤일라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살피다가 달갑지 않은 화제에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왜?”

“자기가 죽기를 바랐냐고 묻더라. 또, 그러고 나면 너랑…… 살 거냐고…….”

레테의 허상을 짚는 일이었지만 괜히 쑥스러워 뭉개듯이 이야기했다. 리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번에 심하게 앓아서 무서웠나 보지.”

헤일라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레테가 그렇듯 리안도 레테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따뜻한 손이 헤일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생각을 끊는 리안의 방식이었다.

“사실 본인이 죽기를 가장 바라는 건 레테일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지.”

화를 내기보다는 어르고 달래 가르치려는 말투였다. 이제는 리안에게 결핍되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가족에게 갖는 애정에 관해 먼지만큼의 관심도 공감도 하지 못하는 이였다.

헤일라에게 애착을 가지게 된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건조한 소년이었다. 그러니 이럴 때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알려 주는 게 필요했다. 그녀는 리안과의 대화법을 어느 정도 익히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음에 한 말은 그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차피 평생 나랑 살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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