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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3화 (3/97)

3화.

날이 더운데도 단정한 검은 머리칼과 옷매무새는 집에서 나갈 때와 같았다. 키가 너무 커서 정면으로 쳐다보면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꺾어 올려다보니 그가 낮게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땀에 젖은 긴 앞머리를 옆으로 살짝 넘기니 아래로 둥그렇고 선한 눈매가 드러났다. 앞머리를 걷어 냈을 뿐인데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둥그런 이마 선과 나폴나폴 귀여운 눈썹, 아래로 약간 쳐져 쓰다듬어 주고 싶은 눈과…… 그 중심이 자리 잡은 선명한 금색 눈동자. 그는 혼자서만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다시 머리칼로 눈과 이마를 덮어 버렸다.

살이 닿으니 쑥스러운지 헤일라의 목이 아래로 수그러졌다. 그녀는 처진 고개를 약간 사선으로 돌리며 웅얼댔다.

“……오늘 일 바쁘다고 했잖아.”

“일찍 끝나서 마중 나왔어.”

“고마워. ……리안.”

리안은 헤일라 자매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몇 년 전 죽어 가던 리안을 헤일라가 구해 준 뒤 쭉 동고동락했다. 언니 레테와는 끔찍하게 사이가 나쁘지만, 헤일라가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헤일라의 짐에 자연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불퉁한 얼굴이지만 싫지는 않은지 그녀도 못 이기는 척 보자기를 넘겨주고는 나란히 서서 걸었다. 항상 같은 길을 지나는 둘은 익숙한 흙길을 지나 낮은 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그녀의 집은 산 중턱에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헤일라는 습관처럼 그의 하루에 관해 물었다. 그 모습이 꼭 제 아이의 하루에 관해 되짚어 보는 어미 같았다. 남자는 그녀를 흘긋 보고 단조로운 어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였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헤일라의 긴 머리칼을 슬쩍 잡아 손끝에 말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때 기다란 상처 하나가 눈에 그녀의 눈에 띄었다. 리안의 손바닥에 피가 굳은 흔적이 있었다.

“야, 너, 여기…….”

“아아.”

“무슨 반응이야, 이건? 안 아파?”

“아파.”

거짓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한. 헤일라는 불퉁해져서는 미간을 모았다. 거짓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상처를 달고 다니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실 그녀는 가까운 이들의 모든 고통을 탐탁잖아 했다. 아픈 이를 가족으로 둔 탓이다.

“조심해야지. 아, 여기 넣어 놨는데…… 잠깐만.”

그녀는 주머니 안을 뒤적거리다가 꼬질꼬질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오래돼서 모양은 이래도 항상 깨끗하게 세탁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리안의 손에 둘러 주었다.

그녀는 꼼꼼하게 처치를 끝내고 다시 걸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요즘은 잘 하지 않던 질문을 입에 담아 보기로 결정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은 이제 좀 친해졌어?”

“별로.”

그럴 줄 알았으나 놀랍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헤일라는 약간 길게 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얼굴에 물건 집어 던지거나 그러지는 않지?”

“응.”

진짜? 정말로? 과거 그가 레테에게 사과를 집어 던졌던 기억이 떠올라 살짝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노련한 조련사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추궁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마음에 안 들어도 말로 잘,”

“폭력은 안 써. 네가 싫어하니까.”

“……그럼 왜 다쳤는데?”

결국, 묻고 싶은 말이 터졌다. 그녀는 볼록한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헤일라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알려 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그런 와중에 다쳐서 오니 걱정이 배가 됐다. 일하는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싸움질한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언니에게 드러냈던 폭력성을 떠올리면 영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야 하는데. 섞여 들 줄 알아야 하는데.

시름에 가까운 상념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났다. 익숙한 잔소리쯤으로 치부하던 리안도 헤일라가 그를 올망졸망한 눈으로 계속 탐색하자, 못 이기겠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름도 다 외웠고, 네가 저번에 준 쿠키도 다 같이 나눠 먹었어. 다들 고맙다고 했고. 문제없어.”

모두 헤일라가 그에게 알려 준 ‘사람들과 친해지는 비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달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그녀의 말을 잘 들었는지 요목조목 설명했다. 그 모습이 퍽 진지해 헤일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손은 짐 옮기다가 조금 다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프지만.”

“알겠어. 말해 줘서 고마워.”

전부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됐다. 일일이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작게 중얼거리자 리안이 피식 웃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는 거야. 나는 네가 일하면서 그걸 배웠으면 좋겠어.”

줄줄 이어지는 잔소리가 언뜻 보면 지나칠 수 있지만, 헤일라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축에 속했다. 리안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죽여 버린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 남자였다. 무력을 사용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 버릇을 고치고 보통의 사람처럼 행동하게 하는 데는 그녀의 공이 컸다. 헤일라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잔소리를 이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하던 말을 덧붙였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랑도 잘 어울려 살아야 할 거 아냐.”

말을 맺어 놓고 조심스레 그의 낯을 살폈다. 리안은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자주 언급을 해 놔야 마음의 준비를 하기 쉬울 것이다. 헤일라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리안을 집에서 내보낼 때가 다 되었다. 언제까지고 제집에서 데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녀는 언제고 그런 의중을 담아 대화를 흘려보내곤 했다. 지금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안은 이에 동요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큰 손이 헤일라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래, 넌 사교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동그란 어깨가 움칠 튀어 올랐다가 곧 그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런 뜻이……!”

“레테가 나으면 모임에도 종종 나가자고.”

그 말에 소금 뿌린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던 헤일라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아, 그는 이제 어리숙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질이 나빴다. 헤일라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레테가 나으면.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헤일라만큼 리안도 잘 알았다. 그러니 레테에 관해 말을 건넨 이유 또한 빤했다.

“아아, 그런데 레테는 요즘 어때?”

제 심기를 거스른 데 대한 유치한 보복이었다. 리안이 원하는 답은 뻔했다. 레테의 발열과 발작이 요 근래 심해진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약간 날카로워진 헤일라는 가볍게 눈을 흘긴 뒤 최대한 얄밉게 받아쳤다.

“좋아지고 있어. 열도 내렸고 오늘 아침엔 죽도 다 비웠는걸.”

“다행이네.”

“아마 더 나아질 거야.”

“그래,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지.”

끝까지 얄미웠다. 그러나 레테에 대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도 더 이상 애매한 방식으로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헤일라는 침묵하는 리안을 흘금 보다가 삼 년 전에 그가 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언니는, 죽이는 쪽이 깔끔하지 않겠어?’

그 말을 하던 소년은 건조한 낯이었다. 서로에게 애정이 없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몰인정한 태도였다. 그는 눈물까지 그렁대며 씩씩대는 헤일라의 반응을 보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눈치채지 못했었다.

물론 함께 지낸 지 삼 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레테에 관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리안은 정말로 꾸준히 레테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가끔씩 은근하게, 레테 없는 세상을 가정하는 모습만 봐도 속내가 빤하게 보였다.

“그런데 신전에 관심 있어?”

별안간 질문하는 리안에 헤일라가 무슨 뜻이냐는 물음을 담아 그를 응시했다. 눈 아래까지 내려간 앞머리 가닥 사이로 동그란 타원형의 선한 눈매가 드러났다. 리안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는 신의 사과를 훔쳐본 무구한 소년처럼 시침을 떼고 제 말을 이어 갔다.

“아까 신전 앞을 유심히 보길래.”

“……그냥. 신관이 되면 원하는 치료는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아아. 그는 알 만하다는 듯 밋밋한 음성이었다. 모든 행위가 언니라는 작자와 연결된 헤일라에 약간의 염증을 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예언이 내려올 거라면 벌써 내려졌을 거야.”

“나도 알아.”

신관으로 선택받기 위해서는 미래를 읽는 예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때는 보통 열다섯 살 전이었고, 그 이후에 능력이 발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헤일라도 레테의 열다섯이 끝나는 해에 신전 앞에서 몸을 말고 틈틈이 기도하던 정성을 멈췄다.

리안이 작은 손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부드럽고 말랑한 손을 적당한 힘으로 단단하게 쥐었다. 헤일라는 못 이기는 척 힘을 풀고 제 손을 맡겼다. 그의 접촉은 암울한 생각을 할 때마다 묘하게 안정을 도왔다.

“식사하고 호수에 가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황금빛의 긴 머리칼이 함께 팔랑거렸다. 리안과 함께 살게 된 후로부터 매일 기다리는 소소한 낙을 떠올리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밤바람을 맞으며 호수에 발 담그는 감촉은 분명 상쾌할 테다.

이전 같았다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쪼그려 앉아 조금 울다가, 집에서는 레테가 퍼부을 폭언을 가늠하면서 음울하게 걸었을 것이다.

리안과 함께 있으면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이 가슴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헤일라는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리안이 자신과 함께 지내 주기를 바랐다.

어차피 그는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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