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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1화 (프롤로그) (1/97)

1화.

프롤로그

들어 올리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때는 한낮인지 따듯하게 데워진 공기가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어우러져 포근했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평화로운 오후처럼 느껴질 만큼 안온한 봄날.

헤일라 또한 잠에서 깬 직후, 몸에 닿는 보드라운 침구의 촉감과 깨끗한 향기 때문에 한껏 몽롱해졌다. 베개에 누운 채로 조금 고개를 돌리니 언제나처럼 나른하게 눈매를 접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아, 눈이 마주쳤네.

헤일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로 퍼지듯 빙빙 돌았다.

그는 기쁜 듯 침상 옆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동시에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무자비하고 끔찍한 기억들이다.

……전부 꿈이었나?

괜스레 작게 중얼거려 봤다. 이렇게 평온한데, 그런 기억들이 현실일 리가 없을 것 같아서. 진짜 있었던 일이라면 리안이 이렇듯 다정하게 이마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겠지. 헤일라는 이마에 닿았다가 뺨으로 옮겨진 큰 손에 어리광 부리듯 얼굴을 파묻었다. 잔뜩 부비니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워.

정말 다행이다. 전부 꿈이었던 거야. 환상이고 허상이었어. 이 애가 그랬을 리 없는데 내가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거야. 바싹 마른 입술이 오물거리면서 옅은 미소가 배었다.

리안은 헤일라의 상태가 퍽 괜찮다고 느꼈는지 안심한 표정이었다. 다가선 남자 때문에 침대가 푹 파였다. 저 큰 덩치로 눈치 보며 조심조심 움직이는 게 사뭇 귀여웠다. 헤일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손끝으로 감각하려 팔을 움직였다. 그러면 그는 분명히 갸르릉 대는 고양이처럼 제 품에 파고들 것이다. 덩치에 맞지 않는 사랑스러움을 두르고.

“하읏…….”

하지만 손을 움직이려 힘을 주었을 때, 무수한 칼질이 만들어 낸 자상이 다시 한번 근육을 끊어 놓듯 고통을 흩뿌렸다.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

헤일라는 왼손을 후벼 파는 고통에 할딱거리며 눈을 꽉 감았다가 떠 보았지만, 감각은 허상이 아니었다.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내려 고통의 진원지를 살폈다. 두텁게 얹어진 치료용 천 위로 스며들어 있는 핏물이 선연했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야.

차분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헤일라의 귓가에 윙윙댔다. 숨소리가 발작적으로 가빠졌다.

“아파?”

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상한 태도였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톱 아래에 잔가시가 박힌 것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의 낯이었다.

그게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라 눈 아래가 바르르 떨렸다. 무구했던 눈동자에 고통과 경멸이 날뛰기 시작했다.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모든 기억이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진 탓이다. 당장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바즈락거리다가 오른손이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보드라운 가죽 수갑은 침대 헤드와 연결되어 있었다. 끈은 진한 노란색이었다.

난 샛노란 색이 가장 좋아.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볼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충격 탓에 저도 모르게 움찔댄 왼쪽 손목에서 다시 고통이 올라왔다. 울컥 찌푸린 얼굴에 큰 손이 닿았다. 리안은 미간에 잡힌 주름을 살살 펴면서 어르는 투로 말했다.

“약 잘 먹고, 밥 잘 먹고, 내 말 잘 들으면 금세 나아.”

저건 거짓말이야. 환영이 속살거렸다. 그건 헤일라도 알았다. 자상으로 절여진 손목이 저도 모르게 달달 떨렸다. 영영 왼쪽 손목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점점 선명해지는 의식과 함께 몸의 감각도 더 강렬해졌다. 그는 헤일라를 시험하듯 그저 옆에서 토닥이기만 했다. 가증스러운 남자. 리안에 대한 원망과 참을 수 없는 고통 중 무엇 하나를 누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남자도 그걸 알고 은근한 몸짓으로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는 턱 끝이 달달 떨릴 정도로 왼팔 전체에 통증이 퍼졌다.

“환초…… 환초라도…….”

그러나 삼십 분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한 쪽은 헤일라였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주룩 흘러 턱 끝에 매달릴 즈음에는 리안에게 부탁한다는 수치심도 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살점이 조금씩 떼이는 감각들이 끔찍했다.

차라리 수면으로 다시 안식을 찾았으면. 헤일라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리안의 옷깃을 꼭 쥐어 봤다. 절박함이 담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절절매는 여자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파?”

“아…… 리안……. 손, 이, 너무……흐, 아프…….”

“아픈 걸 원하는 게 아니었어?”

매끄럽게 웃는 낯은 아름다웠다. 아, 저건 누군가를 아래로 처박을 때 짓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렸다. 자신을 기만하는 남자의 뺨을 치고 싶으면서도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사정하고 싶다. 징그러운 이중성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 쪽으로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리안은 고통을 경감시킬 그 무엇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벌. 벌이다. 헤일라는 어렴풋이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빼어 물었다. 분노와 원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미안. 환초는 안 돼.”

“흐, 으으…….”

“그렇게 보지 마.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래? 남자는 울음에 섞인 감정을 읽어 내고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천천히 눕힌 뒤 오목한 아랫배에 큰 손을 얹어 천천히 쓸어내렸다. 언제나처럼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애가 또 들어섰대.”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얼굴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어떤 모양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헤일라는 멀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의 너머로 흐릿한 잔상이 비쳤다. 그녀의 곁에 머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언니, 레테의 망령이다. 자주 닿는 환청의 주인이기도 했다.

“임신이 잘 되는 몸이라 다행이지.”

안도가 젖어 든 목소리. 뿌듯함이 배어 있는 단단한 눈매. 저건 연기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제 손목을 긋고 죽음을 향해 내달렸음에도 아이를 품었다는 사실 하나에 저리 해맑아졌다.

그녀가 혼곤한 정신을 다듬기도 전에 리안이 츠읍, 하고 헤일라의 목덜미를 빨아 들였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은 접촉이다. 진저리가 쳐졌다.

“싫어…… 싫…….”

끔찍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젓자 베개 바스락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의 뒤에 있던 망령이 이제는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와 소곤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 이러지 마. 둘 다 떨어져.

와중에도 남자는 부지런히 헤일라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의 말이 섞여 귀 안쪽부터 머릿속이 온통 혼탁했다.

“레테…….”

저도 모르게 입에서 언니의 이름을 뱉어 내자 리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녀는 일순 리안의 눈에 자글대는 분노를 읽어 냈다. 언제나 서로를 혐오하던 언니와 리안. 언니가 죽은 뒤에도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병적으로 레테를 밀어내고 싶어 했다. 헤일라의 머릿속에서.

“그래. 레테.”

리안은 그녀의 판판한 배를 다시 뭉근히 눌렀다. 무언가를 곰곰이 그리는 얼굴이었다. 이런 순간마다 헤일라는 불안했다.

그는, 그는…… 정상이 아니니까.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아이의 이름은 그걸로 할까?”

여자의 도톰한 입술이 갈라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들은 말이 그저 질 나쁜 농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반절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는 이것이 헤일라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레테를 혐오했지만, 그 애랑 비슷한 게 생겨야 헤일라가 기운을 차릴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제 언니라면 눈이 뒤집혀 어디든 뛰어드는 여자였으니, 제 새끼라면 더하겠지. 리안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애가 떨어지지 않게 내가 더 신경 쓸게.”

“아, 아아…….”

떠나서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아이는…… 아이는 죄가 없는데. 그럼에도 기어코 인질로 전락해서 휘둘러질 게 분명하니까. 내 족쇄가 돼서 불행할 게 눈에 선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또…….

헤일라는 그의 품에서 파닥거렸다. 속에서 무언가 역류해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팔의 고통이 점점 더 심해졌음에도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다.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손쉽게 헤일라의 움직임을 봉했다.

“하지 마! 놔!”

“쉬이, 헤일라, 상처가 벌어질지도 몰라.”

그는 차분하게 팔뚝을 누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땀 때문에 눌어붙은 잔머리와 분노로 달아오른 붉은 얼굴이 조화되어 아름답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따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리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말라붙은 입술을 가르고 축축한 살덩이가 침범했다. 익숙하게 입안을 빨고 쓰다듬다가 아랫입술을 물고 자근거렸다. 피가 배어 나오자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한 리안이 게걸스럽게 그걸 빨아 먹었다. 비린 향이 미미하게 끼쳤다.

불뚝 튀어나온 남자의 하부가 바짝 마른 뱃가죽을 툭툭 건드렸다. 리안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렀다. 그가 후, 하고 헤일라의 앞머리를 불어 주고는 바지와 드로즈를 한 번에 내렸다. 길고 뭉툭한 막대가 퉁기듯 흔들리며 꺼덕거렸다.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바짝 언 게 느껴졌다. 상체를 일으키고 제 것을 손으로 느리게 훑은 남자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넣는 건 안 된다고 했거든.”

불만이 낀 음성이었다. 그녀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한 여자의 눈이 점점 공허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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