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외전15
꼭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한 쌍의 이름이었다.
이스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셀린느와 레오는 지난날 롯사 공작 저택에서 소박한 약혼식을 올렸다.
그 후에 결혼식 날짜를 잡고 청첩장을 만든다고 이야기하더니,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혼인을 올리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블리샤 백작가문의 피에는 둔한 곰의 피라도 흐르는 것일까.
레오는 기척을 숨긴 암살자는 그렇게 잘 찾아내면서, 셀린느가 제게 보내는 호의는 도무지 알아차리질 못했다.
참다 참다 못한 셀린느는 연회장에서 만난 레오를 외진 곳으로 불러다가 말했다.
-제가 싫으시면, 싫다고 말씀하세요.
억눌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낸 것처럼, 셀린느의 목소리는 가냘팠다.
-예……?
레오는 후두부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셀린느를 쳐다보았다.
-공녀,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셀린느는 레오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이 되었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진청색 눈동자를 보고, 레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차마 닿지는 못하고, 공중에서 굳어버렸다.
허공에 멈춘 레오의 손이 셀린느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레오 경은….
셀린느가 정성껏 물들인 다홍빛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바보예요.
바닥만 쳐다보던 셀린느가 갑자기 고개를 팟 들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레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
순식간에 끌려 내려간 레오의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레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촉을 인지하기도 전에 셀린느가 레오를 놓아주었다.
그녀 스스로도 무척 충동적으로 해버린 키스였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셀린느가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 후 셀린느는 레오를 피해 도망만 다녔다.
연회에도 잘 나오지 않고, 레오가 말을 걸라치면 곧장 죄송하다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제 가슴에서 드디어 싹트기 시작한 기묘한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레오는 눈으로만 롯사 공녀의 흔적을 좇았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오와 셀린느는 동시에 카녹스 대공작 저택으로 초대를 받았다.
함께 차를 마시자는 말에 두 사람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저택으로 찾아왔다.
아담하게 꾸며진 정원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은 레오를 발견한 셀린느는 다시금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붙잡은 것은 이스엘이었다.
얼굴을 발갛게 붉히고 고개만 내젓는데, 가만히 앉아있던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레이디 셀린느?
레오의 얼굴엔 진지함만이 가득했다.
이스엘은 다정하게 웃으며 셀린느를 티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그 후로는 쉬웠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두 사람 사이를 지켜보던 이스엘이 아, 하고 외마디 말을 꺼낸 것이었다.
-로엘에게 간식을 챙겨줄 시간인데, 깜빡했어요. 두 분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금방 다녀오겠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스엘은 그들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그러한 티타임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 약혼반지가 자리했다.
험난한 여정을 겪은 그들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린다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결혼식 당일 아침, 이스엘과 라한은 일찍부터 식에 참석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로엘도 함께였다.
라한이 특별히 맞춤 제작해준 벨벳 정장을 입고 나니, 로엘은 마치 아기왕자님처럼 보였다.
목에 두른 나비넥타이가 어색한 듯 만지작거리던 로엘이 이스엘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물었다.
“엄마, 겨론이 모야?”
“응?”
흐뭇한 얼굴로 로엘을 지켜보던 케일런이 대신 설명해주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것을 뜻한답니다. 도련님.”
로엘은 눈을 깜박이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불현듯 외쳤다.
“우웅, 그럼 나도!”
“……예?”
케일런이 당황해 도련님을 쳐다보자, 로엘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엄마랑 할래! 겨론!”
옷매무새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던 라한이, 그 말은 용케 들었는지 곧바로 로엘에게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왜애?”
어쩌려고 저려나 지켜보는데, 라한이 입매를 끌어올려 씩 미소 지었다.
“엄마는 이미 아빠와 결혼했거든.”
늦어도 한참 늦었구나, 아들아.
눈을 곱게 휘어 웃으며 짓궂게 덧붙인 말에 로엘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갔다.
로엘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이스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후에에엥, 엄마아아아!”
이스엘은 울먹이는 로엘을 다독거리며 라한에게 눈짓을 보냈다.
라한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로엘. 대신 아버지와 약속 하나 할까?”
“……무슨 약속?”
이스엘도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라한이 로엘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로엘은 열심히 경청하더니, 둘이서 새끼손가락을 걸기까지 했다.
식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무슨 약속을 한 것이냐 물어도, 둘 다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스엘과 라한, 그리고 로엘이 식장으로 들어서자 하객들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카녹스 대공은 짙은 남색 제복을, 대공부인은 사파이어 빛의 드레스를, 그리고 꼬마 공자님은 푸른 벨벳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세간의 관심사를 모두 독차지하고 있는 가족은 멀리서 보아도 무척 단란해 보였다.
롯사 공작이 라한과 이스엘을 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밤갈색 머리를 멋들어지게 올린 견실한 청년이 서있었다.
공작의 소개를 받기도 전에, 청년이 앞으로 나서 이스엘에게 말을 걸었다.
“카녹스 대공작부인.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이스엘은 어렵지 않게 셀린느와 똑 닮은 이 청년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반가워요, 롯사 공자.”
셀린느의 동생이자, 곧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 지위를 계승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누님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술에 무척 조예가 깊은 듯했다.
에닉스 대신전에 들렀을 때 조각상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의 얼굴은 드디어 조각가 엘과 마주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번이나 영광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그의 눈이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반짝였다.
그가 이스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직전,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가만히 옆에 있던 로엘이었다.
“안 돼요.”
롯사 공자의 얼굴이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로엘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런, 제가 무언가 실수라도 했나요?”
“엄마는 내 거예요!”
이스엘을 보호라도 하듯 앞으로 나서서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에 롯사 공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뭇한 얼굴로 아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라한이 로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로엘은 잠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아, 하고 말을 정정했다.
“엄마는 아빠 거예요!”
“…….”
“그 다음이 나!”
라한이 뿌듯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나오기 직전 부자가 나누었던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다.
하여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 뒤로도 이스엘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이들이 끊이질 않았다.
셀린느와 레오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았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정신없이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회를 곧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공작부인.”
“다음 작품은 어떤 걸 주제로 삼으십니까?”
“혹시 초상 조각을 부탁드릴 순 없겠습니까?”
쏟아지는 질문과 부탁들에 이스엘이 곤란해 하고 있으면, 언제나 로엘이 출동했다.
로엘은 아버지와 한 약속을 아주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그렇게 로엘에게 저지당한 이들은 기분 상한 티 하나 없이 허허 웃으며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 사랑스러운 로엘에게 홀랑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멜리안 자작이 로엘과 악수를 나눈 후 흐뭇한 미소와 함께 퇴장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엘이 뒤로 돌아 라한에게 물었다.
“아빠, 나 잘했지?”
눈을 반짝이며 칭찬을 기다리는 로엘은 이 세상의 모든 귀여움이란 귀여움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래. 아주 잘하고 있다, 로엘.”
라한이 로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개선장군처럼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서있던 로엘이 헤헤, 하고 웃었다.
라한은 침착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부턴 조금 더 눈썹을 이렇게 모으고, 목소리는 더 낮게…….”
이스엘은 조언이랍시고 로엘에게 이상한 것을 지시하고 있는 라한의 팔뚝을 콕 찔렀다.
대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 타박한 것이었다.
라한이 웃음을 삼키며 사죄의 의미를 담아 이스엘의 볼에 작게 뽀뽀했다.
악단이 노래를 연주하며, 신부의 입장을 알렸다.
라한과 이스엘 그리고 로엘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자리에 착석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회랑을 걷는 셀린느는 무엇이 그리 쑥스러운지 두 뺨을 발갛게 붉히고 있었다.
하지만 처질 기미가 없는 입꼬리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문득, 불과 몇 년 전 올렸던 자신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다디단 꿈만 같아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구름에 감싸이듯 살랑거렸던 기억이 났다.
이스엘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라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모두가 신부를 바라보고 있는데, 라한은 한참 전부터 이스엘만 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항상 그랬다.
뒤를 돌아보면 늘 그곳에서, 이스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뭉클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소중히 감싸 안으며, 이스엘이 그에게 속삭였다.
“라한.”
“예?”
“사랑해요.”
“…….”
라한은 넋을 잃은 듯 이스엘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라한……?”
“이런 기습공격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기습공격……?
“사랑합니다, 이스엘.”
라한이 낮게 속삭였다.
그러자 둘 사이에 앉아있던 로엘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또! 아빠만 엄마를 독점하고!”
로엘의 투정에 이스엘과 라한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이스엘은 로엘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 라한은 말없이 로엘의 손을 잡아주었다.
세 사람의 눈동자에 행복이 깃들어있었다.
문득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과보호 아가씨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