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외전14
“예……?”
라한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스엘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스엘은 정말 라한에게 옷을 벗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옷을…… 말입니까?”
“네.”
이스엘이 부탁하는 것이라면, 온 대륙을 뒤집어야 하는 일이어도 해낼 라한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부탁을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한은 살짝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유를 물어도 되겠냐고 질문했다.
이스엘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해주었다.
“카르뮈스 신의 상체를 조각해야 하는데, 잘 상상이 가질 않아서요.”
그녀는 상반신의 근육을 참고할 대상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라한은 그때서야 이스엘의 기묘한 부탁을 이해했다.
라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이스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꺼려지시면 다른 이에게 부탁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한은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아닙니다.”
“네?”
다른 이에게 부탁한다니, 상상만 해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에 라한은 이스엘의 손을 붙들곤 말했다.
“꼭, 제 몸을 참고해주십시오.”
그러더니 그가 이스엘의 손을 잡고 작업실 옆에 딸려있는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처음엔 당황하더니, 어째서인지 갑자기 이스엘보다 더욱 열을 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방 안에는 이스엘이 쉴 수 있도록 폭신한 침대와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라한은 여러 가지 도구들이 놓인 탁자에 걸터앉은 채, 제복의 목 단추부터 풀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작은 방 안에 단추가 풀려나가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라한이 제복의 촘촘한 단추와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자, 숨겨져 있던 그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핏줄이 연하게 돋아난 목덜미, 그리고 모양이 예쁜 쇄골 아래에 가슴근육이 견실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이스엘은 호기심과 학구열로 불타는 눈에 라한의 상체를 담았다.
라한에게 다가간 그녀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떡 벌어진 대흉근에 가져다댔다.
옅은 구릿빛 피부 위에, 이스엘의 하얀 손이 톡 하고 닿았다.
라한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앗, 미안해요. 손이 차갑죠?”
“아닙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라한은 아랫배에서부터 치미는 욕망에 침을 꼴깍 삼켰다.
집중해있는 이스엘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지금 당장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키스하고픈 욕구가 서로 살을 뜯어가며 싸우고 있었다.
그런 라한의 상태를 모르는 이스엘은 근육들의 틈을 따라 그리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근육들이 피부 아래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스엘은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결국 라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입술을 열었다.
“이스엘, 계속 그렇게 만지면…….”
“네?”
근육에만 꽂혀있던 이스엘의 집요한 시선이 올라왔다.
금안과 연녹색 눈동자가 공중에서 마주쳤다.
이스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라한의 말갛던 눈 위로 어느새 홧홧한 열기가 오르고,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이스엘은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두 사람뿐인 작은 방이었다.
풀어헤쳐진 라한의 옷, 그리고 그의 몸을 쓰다듬고 있는 제 손.
제삼자가 지켜보았더라면 야릇해서 눈을 가리고 말았을 상황이었다.
이스엘의 얼굴이 서서히 잘 익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죄, 죄송해요.”
당황하여 손을 떼려는데, 라한이 그런 이스엘의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순식간에 둘 사이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콩콩 심장이 뛰는데, 라한이 이스엘의 허리를 잡아 천천히 제게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틈 하나 없이 딱 붙었다.
“억울합니다.”
“무엇이요?”
“저만 이렇게…….”
라한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입술이 곧바로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대에게 안달하는 것 같아서…….”
그 속삭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라한이 이스엘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황궁으로 출근하는 아침마다 로엘을 안은 채 하는 배웅 키스와 달리, 진득하면서 질척한 입맞춤이었다.
이스엘은 눈을 내리감고 익숙하게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라한이 탁자에서 내려오더니, 이스엘의 가벼운 몸을 들어올렸다.
이스엘을 침대에 앉히고, 라한이 천천히 그녀의 상체를 뒤로 밀었다.
내내 맞대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을 즈음, 등 뒤에 푹신한 침구가 닿아왔다.
이스엘이 살짝 거칠어진 숨을 토해내며 라한을 불렀다.
“라한…….”
라한은 이스엘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옮겼다.
열기가 가득한 입술이 도장을 찍듯 이스엘의 턱선을 따라 내려와, 백옥 같은 목덜미까지 이르렀다.
이스엘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아직 끝맺지 못한 조각 작업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라한이 이스엘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다대었다.
“이렇게 하면, 더 잘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손바닥 아래에서 라한의 심장이 맥동하고 있었다.
움직임에 맞추어 울렁이는 근육들이 피부를 따라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스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라한은…… 가끔 보면, 짓궂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스엘의 핀잔 아닌 핀잔에 라한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아침햇살 같은 입맞춤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에게 키스하며, 라한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을 풀어 내렸다.
사르륵, 건조한 소리와 함께 옷자락들이 하나둘씩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결국 이스엘은 작업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던져두고, 라한의 어깨를 껴안았다.
며칠을 미루고 미루었던 카르뮈스 신의 조각 작업은 결국 하루 더 미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후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라한이 몸을 던져가며 참고 자료를 제공한 덕에, 이스엘은 전례 없이 훌륭한 조각상을 완성하게 되었다.
천장까지 이를 것 같은 뾰족한 창을 한 손에 든 카르뮈스 조각상은 금방이라도 생명을 부여받아 신전을 뛰쳐나갈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이 감탄을 하며 어떻게 그렇게 역동적인 근육을 표현할 수 있었냐고 물을 때마다, 이스엘은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조금만 안 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면 그사이에 한 뼘은 커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작아서 바스러질까 봐 라한이 로엘을 안기 두려워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은 채 이스엘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이스엘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삭막했던 저택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요즘 저택에는 웃음소리와 활기가 넘쳐났다.
고용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일이 없었고, 기사들은 아기 도련님의 귀여운 입꼬리가 봉긋 올라갈 때마다 심장을 움켜쥐며 행복해했다.
로엘에게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신기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아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로엘을 보면 한눈에 사랑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아이는 손이 많이 가고, 시끄럽고, 방해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세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로엘이 세레스를 보고 방긋 웃자마자 표정이 녹아내렸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한참 바닥에서 장난을 치고 있던 로엘이 엉거주춤 바닥에서 일어났다.
로엘이 처음 홀로 걸음마를 내딛었을 때, 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최근에는 혼자서도 곧잘 걸어서, 시종들은 눈높이에 닿는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는 둥 로엘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엄마! 이거!”
아장아장 걸어온 로엘의 손에 들린 것은 이스엘이 어릴 적에 조각했던 다람쥐 조각상이었다.
이스엘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어디에서 찾았니?”
로엘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우웅, 루!”
저 멀리 있던 루가 오도도 달려 이스엘의 앞에 도착했다.
혀를 쏙 내밀고 머리를 갸우뚱하는 모습에, 이스엘은 방긋 웃으며 루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는 꽤 몸집이 자란 여우가 곧장 하얀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렸다.
아마 구석에 떨어져있던 조각상을 루가 가지고 논 모양이다.
다람쥐 조각상에 나있는 잔 이빨자국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로엘은 이스엘이 하듯 똑같이 루를 쓰다듬어주었다.
루는 로엘의 아주 소중한 친구였다.
둘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로엘이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로엘을 보던 이스엘은 루에게도 아기를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전까지는 혹시 몰라 격리해두었던 것이다.
라한은 루가 아기를 물거나 해칠까 봐 몹시 염려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스엘이 로엘을 뱃속에 임신하고 있을 때에도, 루는 깊은 애착을 보였다.
아기가 태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루가 먼저였다.
루는 로엘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스엘은 루를 품에 안고, 로엘에게로 다가갔다.
인형들을 가지고 놀고 있던 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엘. 인사하렴. 이 아이는 루라고 해.
-루우?
이스엘의 품에 안겨있던 루가 로엘을 향해 뭉툭한 주둥아리를 내밀었다.
로엘과 루가 가까워지는 순간, 곁에서 지켜보던 라한의 몸이 흠칫 굳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까만 코를 로엘에게 들이밀고 냄새를 맡던 루가 귀를 쫑긋거렸다.
아기에게서 익숙한 향을 발견한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로엘은 처음으로 보는 여우에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뻗었다.
이스엘의 손길이 아니면 도망치거나 물기 일쑤였는데, 루는 로엘의 조금 억센 손길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에 멈추지 않고, 혀를 내밀어 로엘의 손끝을 핥아주기까지 했다.
축축한 혀가 손을 간질이는 느낌에 로엘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더니, 두 팔을 벌려 여우를 감싸 안았다.
이스엘은 가슴 가득 퍼지는 따스한 감정에 로엘과 루를 동시에 끌어안았다.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렴.
그렇게 친해진 로엘과 루는 서로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루는 절대 로엘에겐 발톱이나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마치 본능적으로, 로엘이 이스엘의 소중한 아기임을 아는 듯했다.
로엘과 루가 장난을 치며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다.
그때, 단정한 노크소리와 함께 거실 문이 열렸다.
집사 케일런이었다.
“대공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케일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서는 라한의 모습에 이스엘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라한!”
라한이 다급하게 다가와 이스엘을 껴안아들었다.
아빠의 등장에 고개를 팟 들었던 로엘이 후우에엥, 하고 울음 섞인 소리를 냈다.
“엄마아…….”
라한의 품에 안겨있던 이스엘이 곧장 고개를 돌렸다.
“로엘?”
이스엘의 시선이 돌아오자, 로엘이 팔을 휘휘 저으며 자신도 안아달라고 시위를 했다.
이스엘은 웃음을 터트리며 로엘을 안아주었다.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 로엘은 이렇게 자주 칭얼대곤 했다.
다른 때엔 울지도 않고 얌전한데, 라한이 이스엘만 안고 있으면 유독 우는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스엘을 빼앗긴 처지가 된 라한은 요즘 불만이 가득했다.
지금도 한껏 서운한 얼굴로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엘은 웃으며 로엘에게 속삭였다.
“로엘. ‘다녀오셨어요, 아빠,’ 해야지.”
“우웅…….”
로엘은 이스엘의 품에 안긴 채 엄지를 쪽쪽 빨았다.
“다녀오셔써요, 아빠아.”
이스엘이 시킨 대로 또박또박 말하려는 로엘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약간 얄미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한은 로엘의 뺨을 톡톡 건들곤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나 불퉁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엄마는 내 거라니까.”
“아냐아. 엄마는 내 거야.”
“아니다.”
“아니야아!”
똑 닮은 부자가 이스엘을 두고 다툼 아닌 다툼을 하고 있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던 케일런이 이스엘에게 하얀 서신을 하나 건네었다.
“이게 뭐예요?”
“청첩장입니다.”
라한에게 로엘을 넘겨주고, 이스엘은 금실로 장식되어있는 청첩장을 펼쳤다.
결혼식을 올리며 축복받을 연인의 이름이 유려한 필체로 나란히 쓰여있었다.
레오 블리샤, 그리고 셀린느 롯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