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외전13
봄이 오긴 하는 것인지, 작은 꽃봉오리가 맺힌 나뭇가지 위에서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었다.
바람이 살랑이는 평화로운 오후, 카녹스 대공작 저택에는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어머나…….”
셀린느는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탄성을 막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이스엘이 방긋 웃으며 품속에 꼭 껴안긴 로엘을 고쳐 안았다.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요.”
크게 말했다간 아이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셀린느는 저도 모르게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있는지, 로엘은 이스엘의 목덜미에 뺨을 부비적거리다가 말고 셀린느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막만 한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하게 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아이의 뺨은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서, 만지면 분명 말랑말랑할 것 같았다.
뺨뿐이 아니었다. 마치 동그라미로 이루어져있는 생명체처럼 아이는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었다.
“마마아….”
로엘이 웅얼거렸다.
앙증맞은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걸 보던 셀린느는 홀린 것처럼 아이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로엘은 맑디맑은 눈동자를 깜박이다가, 다가오는 셀린느의 손가락을 쥐었다.
손이 어찌나 작고 앙증맞은지, 셀린느의 검지 끝을 겨우 감싸 쥐는 게 다였다.
닿은 피부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셀린느는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데, 손가락 끝을 쥔 채로 로엘이 까르륵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람쥐가 오도도 나뭇가지를 따라 달려가면 날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작은 입술이 방긋방긋 움직이는 게 현실 같지 않았다.
“공녀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정말요?”
셀린느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아기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는 셀린느를 바라보던 이스엘이 물었다.
“한번 안아보시겠어요?”
“제, 제가요?”
“네.”
이스엘은 당혹스러워하는 셀린느에게 아이를 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팔로 지탱하고, 이쪽 손으로 뒷목을 받쳐주세요. 네, 그렇게요.”
셀린느가 어색하게나마 로엘을 안아들었다.
로엘은 처음엔 불편한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스엘이 눈앞에 딸랑이를 보여주자 곧바로 장난감에 시선이 팔렸다.
로엘이 셀린느에게 안긴 채 딸랑이를 잡아보겠다고 낑낑거리는데, 문 너머에서 나긋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마님, 레오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깔끔한 기사제복 차림의 레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스엘은 반가움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라버니.”
“이스엘.”
웃으며 다가오던 레오가 소파에 앉아있는 셀린느를 발견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
셀린느 역시도 로엘을 품에 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이스엘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간질간질한 공기를 읽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멍한 얼굴로 셀린느를 보던 레오가 입술을 열었다.
“롯사 공녀…….”
이름이 불린 셀린느는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레오의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피하곤 품속의 로엘을 이스엘에게 돌려주었다.
“셀린느?”
“저, 저는 이만 급한 일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셀린느는 이스엘이나 레오가 말리기도 전에 인사를 하곤 쪼르르 도망쳐나갔다.
레오는 황망히 응접실을 떠나는 셀린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공녀에게 밉보이신 일이라도 있으세요?”
“응? 아, 아니…….”
레오는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요? 그럼 공녀께서 왜 저러실까…….”
이스엘의 말에도 레오의 어딘가 안타까운 시선은 닫힌 응접실 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스엘은 조만간 셀린느와 오라버니를 점심 오찬에 함께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품에 안겨있던 로엘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칭얼거렸다.
그러자 레오의 눈길이 곧장 자신의 조카에게로 돌아왔다.
“로엘, 잘 지냈느냐?”
로엘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레오를 반겼다.
“꺄후웅!”
갓 돌이 지난 아기인데도 불구하고, 로엘은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했다.
레오는 로엘이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은 엄마인 이스엘이었다.
레오가 로엘을 향해 손바닥을 펴서 잼잼거리자, 로엘이 곧장 그것을 따라했다.
“우리 천사 같은 로엘, 삼촌이 보고 싶진 않았니?”
조카를 향한 레오의 목소리는 타르트 위에 올라간 설탕과자처럼 한없이 달콤했다.
이스엘을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조카였다.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로엘과 이스엘을 보기 위해 매주 저택을 찾았다.
이스엘이 아이를 안고 어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온 근심이 녹아내리고,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레오를 빤히 바라보던 로엘이 입술을 벌려 오물거렸다.
“우웅!”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스엘! 방금 들었지? 로엘이 내 말에 대답을 했어!”
벌써부터 말을 알아듣다니, 신이 내린 천재가 분명하다며 열변을 토하는 레오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흥분을 참지 못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에 이스엘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나중에 로엘이 삼촌이라는 말을 하게 되면, 오열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
라한은 신전 앞을 지키고 서있는 성기사들, 그리고 알렉과 헤리스를 흘긋 바라보았다.
라한의 시선을 읽은 헤리스가 그를 향해 보고했다.
“안쪽에서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라한이 신전 안쪽으로 들어섰다.
저 위에서 콩콩 하고 정이 석재에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부스스, 잔 돌조각들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스엘은 운명의 신 아실히스 조각상의 어깨에 매달려있었다.
교황 리안테는 예고했던 대로, 대신전의 바로 옆에 새로운 신전을 지었다.
이스엘이 로엘을 낳았을 때, 이미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진 신전 건물은 완공된 상태였다.
대신전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시류가 그대로 드러나 무척 세련된 건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건물의 외벽에는 각국에서 모여든 조각가들이 합작으로 신들의 탄생설화를 조각했다.
그러나 신전의 정중앙에 세울 여덟 신의 조각상만큼은 완성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미루어지기만 하였다.
조각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것을 조각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조각가 엘뿐이라고 말이다.
근심에 시달리던 교황 리안테는 결국 이스엘에게 다시금 조심스러운 부탁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스엘은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리안테의 부탁이 워낙 간절하기도 하였고, 벌써 2년이 가까워지도록 조각을 손에서 놓고 있었기에 아쉬움 역시 있었다.
라한은 이스엘이 힘겨울까 봐 걱정을 하였으나, 이스엘이 자신이 해내보이겠다 눈을 반짝이는 것을 말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조각상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대부분의 석상들은 선명하게 형체를 이뤄나가고 있었다.
라한의 시선은 이스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뚱땅뚱땅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는 이스엘이 유독 작아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이스엘이 망치질을 잠시 멈췄다.
아래를 내려다본 이스엘은 라한을 발견하고 밝게 미소 지었다.
“라한!”
라한이 손을 들자, 이스엘은 들고 있던 망치와 끌을 도구함에 내려놓더니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녀의 발이 사다리의 발판을 하나씩 짚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라한은 여차하면 그녀를 받아 안을 수 있도록 팔을 벌리고,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엘은 안전하게 땅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팔을 어정쩡하게 벌리고 서있는 라한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외마디 음성을 내뱉었다.
이스엘이 총총 걸어오더니 팔을 벌리고 있는 라한의 품에 쏙 하고 들어와 안겼다.
“……!”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어요.”
차분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따스했다.
라한은 예상치 못한 상을 받은 기분에 눈꼬리를 잔뜩 휘며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다.
“로엘은 옆의 건물에서 곤히 자고 있어요.”
이스엘은 아직 아이와 떨어지면 불안해했다.
그런 그녀를 위해 신전 측에서는 조각상을 작업하는 공간과 조금 떨어진 곳에 로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로엘은 폭신한 카펫과 요람, 그리고 인형들로 가득한 방에서 유모와 함께 놀았다.
덕분에 이스엘은 작업을 하다가도 언제든 로엘을 보러 갈 수 있었다.
라한은 이스엘의 말을 듣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로엘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은 이스엘과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엘의 뺨 이곳저곳에 잔 입맞춤을 남기던 라한이 문득 물었다.
“조각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라한이 묻자 이스엘의 얼굴이 곧장 울상이 되었다.
“안 그래도 지금 난관에 봉착한 상태였어요.”
이스엘은 요즘 들어서 어리광이 한층 는 것 같았다.
괜찮지 않아도 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이스엘이었는데, 최근에는 이렇게 품에 쏙 안겨서 칭얼거리는 일도 없잖아 있었다.
그만큼 라한을 신뢰함과 동시에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건 라한의 마음에 쏙 드는 변화이기도 했다.
이스엘이 앞으로 더욱더 자신에게 마음 편히 기대고, 투정을 늘어놓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 중 하나였다.
라한은 사랑스러운 아내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무슨 난관입니까?”
마음만 같으면 잘되었다 하고 이 기회에 조각 작업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렵다고 책임감 없이 맡은 일을 저버릴 이스엘이 아니었다.
“카르뮈스 신의 몸을 조각해야 하는데…….”
그림과 조각상에 등장하는 카르뮈스 신은 항상 상체를 반쯤 탈의한 채 묘사되었다.
몸을 보호할 갑주 따위는 필요치 않은, 전투에 대한 카르뮈스 신의 자신감과 뜨겁게 들끓는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스엘 역시도 그러한 해석에 따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엘이 단 한 번도 남성의 나체를 제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긴 했으나, 마음에 썩 차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곰곰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던 이스엘은 문득 알아차렸다.
그녀도 훌륭하게 짜인 근육을 가진 남성의 나체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훌륭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몸이었다.
이스엘의 시선이 라한의 상체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라한은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긴 이스엘을 그저 기다려주고 있었다.
“라한.”
라한의 눈썹이 왜 부르냐는 듯 들려올라갔다.
그는 앞으로 이스엘이 내뱉을 말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스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옷 좀 벗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