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26화 (126/130)

# 126

외전11

라한이 이스엘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습니까? 무엇이든 좋으니까 모두 말해보세요.”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황궁의 요리사를 납치해오라 해도 기꺼이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스엘은 몰랐겠지만, 라한은 이미 황궁의 요리사를 납치할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스엘이 자신의 입으로 뭔가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옆에 서있던 케일런이 당장 품속에서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들고 이스엘의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스엘의 입에서 나온 메뉴는 그들이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로미렌스에서 라한과 함께 마셨던 술…….”

“……?!”

라한과 집사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하지만 이스엘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을 담근 과일이요.”

이스엘이 말한 과일은 루신 열매로, 진한 주홍빛 과육으로 유명한 로미렌스의 특산품이었다.

습하고 더운 환경에서만 열매가 맺혀서, 수도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과일이었다.

하지만 카녹스 대공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충분한 재력과 집착을 가진 남자였다.

이스엘이 먹고 싶다고 말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라한은 수도의 과일시장을 모두 뒤집어 열매를 바구니째로 구해왔다.

수도에 있는 루신 열매란 열매는 죄다 모아온 것 같았다.

껍질을 제거하고 깔끔하게 자른 열매가 이스엘의 앞으로 대령되었다.

“이스엘, 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라한은 조금이라도 속이 불편해지면 곧바로 치우게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덧붙였다.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왠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루신 열매 특유의 진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있음에도, 전혀 역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콤한 향에 기대라도 하는 듯, 입 안에 군침이 도는 것 같았다.

이스엘은 포크로 과육을 찍어 한 입 맛보았다.

뭔가를 이렇게 씹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오물오물 과육을 씹을 때마다 상큼하면서도 진한 즙이 흘러나와 입 안을 적셨다.

이스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너무…… 맛있어요.”

라한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스엘은 무사히 한 조각을 씹어 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녀가 구역질 없이 즐겁게 음식을 삼키는 모습에 라한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려고 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집사 케일런과 시종들 역시 라한과 마찬가지였다.

라한이 이스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하였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

이스엘이 입덧으로 고생하는 내내 퀭했던 라한의 얼굴에 며칠 만에 생기가 감돌았다.

수도에 있는 루신 열매들을 죄다 사들이는 것으론 부족했는지, 라한은 아예 로미렌스에서 루신 나무들을 뽑아다가 통째로 옮겨오도록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저택의 뒷마당에는 갑작스레 과일나무 밭이 생겨났다.

라한은 새로 정원사들을 고용하여 나무들에 열매가 잘 맺힐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일 것을 명령했다.

갑작스레 고용된 정원사들은 당황했다.

-저, 대공 각하……. 이 나무는 적정 습기와 온도에서만 열매가 맺히는데요.

그들의 조심스러운 반박에, 라한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뭐가 문제지?

어안이 벙벙한 정원사들을 멍청하다는 듯 바라보며, 라한이 덧붙였다.

-유리온실을 지으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저택의 뒷마당에는 오로지 루신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값비싼 유리온실이 지어졌다.

일꾼들이 아침마다 끙끙거리며 온실의 유리창을 닦아내는 모습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이스엘이 라한에게 물었다.

“라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하지만 라한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이스엘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라한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푹신한 소파로 이끌었다.

이스엘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히고, 그녀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루신 열매로 만든 잼을 얹은 타르트 접시가 올려져있었다.

“조금 더 드셔보시겠습니까?”

이스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한이 포크로 타르트를 떠서 이스엘의 입가로 가져다대었다.

이젠 입덧 때문에 고생하지도 않고, 몸도 많이 회복되었는데 라한의 과보호는 여전했다.

그는 이스엘이 손 하나 꿈쩍하지 않아도 되도록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살폈다.

라한이 뺨에 다정히 키스하면서, 루신 열매 이외에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무엇이든 말해달라고 속삭였다.

이제는 입덧이 많이 나아져서, 향신료가 강하지 않은 음식들은 대부분 먹을 수 있었다.

이스엘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늘어갈수록, 라한은 더욱 기뻐했다.

주방의 요리사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호화스러운 요리들을 만들어 이스엘에게 바쳤다.

단백질을 포함해서 영양이 풍부한 음식들을 먹고, 달게 자고, 그러고 나면 또 식사를 하고…….

말 그대로 먹고 자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포동포동 살이 찌겠어요.”

이스엘의 투정 아닌 투정에 라한이 작게 웃었다.

‘포동포동’이라고 발음하는 이스엘의 입술이 앙증맞았다.

이렇게 귀여운 아내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니, 가끔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라한은 고개를 숙여 이스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습니다.”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는 그는 오히려 이스엘이 정말 그렇게 포동포동해졌으면 하는 것 같았다.

이스엘은 루신 잼이 올라간 바삭바삭한 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과일은 향을 맡기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지곤 했는데, 이 열매만큼은 달랐다.

혹시 이 열매가 특별히 산모들의 입덧에 좋은 것인가 알아도 보았지만, 의원은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이 열매일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머릿속으로 라한과 술을 마셨던 밤의 기억들이 찾아들었다.

이스엘은 멈칫 몸을 굳혔다.

혹시…….

날짜를 생각하면 엇비슷했으니, 그날이었을 확률이 컸다.

조금씩 불러오고 있는 아랫배를 내려다보는 이스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스엘?”

“네, 네?”

“얼굴이 붉습니다. 혹시 열이…….”

라한은 당장 의원을 불러야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에요!”

“예?”

차마 당신과 보냈던 밤이 생각났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이스엘은 고개만 도리도리 내젓는 수밖에 없었다.

***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스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지, 이젠 제법 시원한 바람이 창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접어들면서, 이젠 정말 임산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배가 불러왔다.

자리에 앉아있을 때마다 배를 가만히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고 있다 보면 간혹 뱃속의 아기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을 차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 발차기를 했을 때는 라한과 함께 깜짝 놀랐는데, 이제는 그 감각에 익숙해졌다.

뱃속의 아기는 언제 이스엘을 고생시켰냐는 듯, 하루에 한 번씩 발차기를 하는 것을 제외하곤 조용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어 의원들에게 물어보면, 아무런 이상이 없고 원래 태아들마다 편차가 있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벨은 아기가 무척 얌전한 걸 보면 아기 공녀님인 것 아니냐며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마님을 닮은 공녀님이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상상만 해도 귀여울 것 같다며 벨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래?”

이스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대공 각하를 닮은 아이여도 좋을 것 같은데.”

벨은 이스엘의 말에 잠시 눈을 깜박였다.

카녹스 대공 각하를 닮은 아이…….

상상을 이어가던 벨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조금 아닌 것 같아요…….”

잘생긴 외모면 몰라도 성격은 절대 안 된다며 작게 덧붙였다.

심각한 벨의 얼굴에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카녹스 대공 저택으로 와서, 라한에 대한 오해가 조금 누그러졌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스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원래도 다정한 라한이었으나, 최근에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라한은 저택이 갑갑할까 봐 종종 그녀를 품에 쏙 안아들고 마차에 태워 수도 근방에 있는 호수로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외출을 하면 항상 황족들이 수도행진을 하듯 말 탄 기사들을 앞뒤로 두르고 다녀와야 했다.

마차가 조금이라도 흔들릴라치면 마부를 자르려고 하는 라한을 말리며 한참 웃기도 했다.

출산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라한은 아예 연차를 썼다.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을 들고 와서, 잠든 이스엘의 옆에 앉아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는 것이 라한의 일상이었다.

이스엘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라한이 옆에서 챙겨주었다.

그는 시녀들이 손을 댈 틈이 없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굴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따뜻하게 데운 물을 가져다주고, 식사를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음식의 맛을 확인해보는 것은 기본이었다.

혈액순환을 위해서 이스엘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따스하게 데운 물에 발을 씻겨주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이스엘은 카녹스 대공 각하의 시중을 받는 사람은 이 제국에 자신밖에 없을 거라며 쑥스럽게 웃곤 했다.

물론 이스엘은 몰랐다.

이스엘에겐 팔불출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다정히 구는 라한이었으나, 다른 이들은 무생물처럼 대한다는 것을 말이다.

손을 꼭 붙이고 ‘제발 마님을 쏙 빼닮은 공녀님이 태어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벨을 보며 이스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속으로 말을 걸었다.

듣고 있니, 아가야?

다정한 라한의 성격을 닮든 저를 닮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만 태어나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

이스엘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분명 침대에 기대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덧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배가 불러오면 올수록 이스엘의 수면 시간은 늘어만 갔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요즘은 점심을 먹고 나면 꼭 낮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이스엘은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몸을 뒤척이다가 멈칫했다.

언제 침대로 올라온 것인지, 이스엘의 옆에 루가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아는 건지, 루는 이렇게 자주 이스엘의 배에 귀를 꼭 붙이고 함께 잠들곤 했다.

“루, 너도 얼른 아기가 보고 싶지?”

이스엘은 잠든 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결이 보드라운 털이 이스엘의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빠져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쓰다듬고 있는데, 색색 작은 숨소리를 내며 단잠에 빠져있던 루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루……?”

루가 양쪽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스엘의 부른 배를 바라보았다.

말간 눈동자가 깜박였다.

왜 그러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엄청난 통증이 찾아들었다.

“아윽……!”

고통에 찬 신음이 튀어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님!”

배를 감싸 안은 이스엘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할 뿐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깜빡깜빡했다.

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시녀들 중 하나가 곧장 산파를 부르기 위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마에서 순식간에 땀이 솟아났다.

이스엘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진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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