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외전10
라한과 이스엘은 오붓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는 이스엘이 좋아하는 과일들, 저택의 요리사들이 직접 만든 수제 잼 그리고 갓 구워 김이 올라오는 빵들이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이스엘은 식당까지 따라 들어와 무릎 위에 올라오려고 하는 루의 턱을 간질여주었다.
“너도 밥을 먹어야지, 루.”
계속 이름 없이 여우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해서, 이스엘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 사이에 많이 커서 이젠 천천히 새끼의 모습을 벗고 있었다.
루는 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다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제 밥그릇이 있는 곳으로 총총 걸어갔다.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이 다가와 그릇을 이스엘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목한 그릇에는 위에 좋은 양배추와 감자를 넣고 긴 시간 끓인 수프가 담겨있었다.
지난밤 속이 불편했다는 이스엘의 말을 듣고, 라한이 요리사에게 특별히 지시한 것이었다.
눈썹을 잔뜩 모은 라한이 이스엘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아직도 속이 좋지 않으십니까?”
이스엘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말짱해요. 아마 어제 찬 주스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일 거예요.”
그래도 라한의 걱정스러운 눈길은 가시질 않았다.
이스엘은 아침 식사를 한 뒤 의원에게 검진을 받기로 하였다.
거짓말처럼 상태가 괜찮아졌지만, 지난밤 고생했을 요리사의 정성과 걱정이 습관인 라한을 생각해서라도 수프그릇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스엘이었다.
이스엘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가져다대려는 순간이었다.
고요했던 뱃속이 갑자기 요동을 치며, 구토감이 치밀었다.
“웁……!”
이스엘이 손으로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놓친 스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 위를 굴렀으나, 라한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라한이 고개를 숙인 이스엘의 어깨를 황급히 감쌌다.
“이스엘!”
하지만 이스엘은 라한의 부름에 답할 수 없었다.
다시금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이스엘의 허리가 접혔다.
***
창백한 이마에 맺혀있던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따라 옆으로 흘러내렸다.
건조하게 마른 이스엘의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흘러나오길 반복했다.
라한은 초조함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흐르는 일분일초의 시간들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식탁을 앞에 놓고 시작된 구역질은 오랜 시간 멈추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어, 위장에서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뿐이 아니라, 순식간에 열이 올라 결국 이스엘은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음식이 상했던 것도 아니고, 요리사가 이스엘이 먹지 못하는 재료를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이스엘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예민하게 반응하는 라한 때문에, 요리사들은 음식을 올릴 때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왔다.
이스엘이 몸져눕자, 온 저택에 비상이 걸렸다.
본래는 점심 즈음에 의원이 저택에 들르기로 했으나, 라한은 직접 마차를 보내 당장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끌려오다시피 저택에 도착한 의원은 곧장 이스엘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라한은 이스엘의 열을 측정하고 맥을 짚는 의원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감각에 신음을 삼켰다.
역시 어젯밤 이스엘이 속이 불편하다고 했을 때 의원을 바로 불렀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그의 발목을 부여잡고 뒤흔들었다.
라한은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하며 주먹을 꾹 눌러 쥐었다.
이스엘은 침대에 누워 색색 가쁘게 호흡을 하며 눈만 겨우 깜박이고 있었다.
이스엘이 이렇게 아픈데,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그녀 곁에서 손을 부여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스엘의 입술 사이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누군가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
루 역시 이스엘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침대 주변을 빙빙 맴돌며 불안한 울음소리를 냈다.
축 처진 귀와 꼬리가 애처로울 만도 했으나, 라한은 지금 여우에게 쏟을 관심이라곤 없었다.
라한의 온 신경은 이스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루는 집사 케일런에게 뒷덜미가 잡혀 다른 방으로 격리되었다.
한참 이스엘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의원이 끄응, 하는 침음을 내뱉었다.
라한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물었다.
“상태가 어떻지?”
서늘한 목소리에 의원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는 이스엘과 라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에 라한의 심장이 깊은 구렁텅이로 내려앉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말해라.”
라한의 눈빛이 한결 사나워지자, 의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부인께서는…….”
라한은 절벽 위에 선 사람처럼 의원의 진단만을 기다렸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저리 뜸을 들인단 말인가.
의원이 안경을 살짝 추켜올리곤 말을 끝맺었다.
“임신하셨습니다.”
이스엘과 라한이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구역질을 하는 것은 임산부들이라면 보편적으로 겪는 임신 초기의 증상이었다.
의원은 임신 초기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소상하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몸이 나른하거나 약한 현기증을 느끼는 것 역시 그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말들이 라한의 한 귀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한 귀로 흘러나갔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로 변해서,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최근 간헐적인 두통이나 복통을 느낄 때가 있으셨지요?”
라한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의원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스엘이 아, 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녀의 수긍에 심장이 덜컹한 것은 라한 쪽이었다.
라한의 처참히 흔들리는 눈과 이스엘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부부를 지켜보던 의원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이스엘이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이자, 라한이 곧바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앉혀주었다.
“라한…….”
이름을 부른 것에 답하듯 단단한 손이 이스엘의 손을 감싸왔다.
“믿기지가 않아요.”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하늘 높은 곳에 붕 떠있는 것처럼 온몸에 무게감이 없었다.
이스엘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저와 라한의 아이가 이 속에 있는 걸까요?”
아래쪽을 향하던 시선이 올라왔다.
라한과 눈을 마주친 이스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시울은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눈물을 흠뻑 머금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자신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이 작은 생명의 아빠가 될 사람이었다.
라한이 이스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스엘…….”
라한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문장을 이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가득 채우는 감격스러움과 묵직한 책임감이 심장을 뻐근하게 조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꽉 껴안았다.
***
본래부터 카녹스 대공작가문은 손이 귀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린 지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임신 소식이 들려왔으니, 모두에게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에 기뻐하기도 전에, 저택 내에는 걱정스러운 기류만이 맴돌았다.
이스엘의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스엘은 의원의 진단이 끝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한순간 치솟았던 체온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초조해하던 라한에게서도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다.
이스엘은 계속되는 입덧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평상시 좋아하던 음식들은 물론이고, 향신료를 전혀 넣지 않은 묽은 수프도 겨우겨우 한 모금 삼키는 게 다였다.
의원조차 이렇게 심한 입덧은 처음 본다며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그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할 시기에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니, 안 그래도 가녀린 몸이 점점 말라만 갔다.
이스엘이 임신했다는 것과, 입덧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동시에 접한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그 즉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카녹스 대공 저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들은 블리샤 백작 저택에 있을 때 이스엘이 즐겨 먹었던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왔으나, 그 음식들도 넘길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블리샤 백작, 레오 그리고 라한은 온 힘을 다해서 이스엘이 입에 댈 수 있는 음식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물론 세 사람 중 제일 절박한 것은 라한이었다.
누가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절망을 지고 있는 사람 같아 보일 정도였다.
라한은 이스엘과 한 몸인 것처럼 같이 말라갔다.
이스엘이 식사를 못 한 이래로, 그도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보다 못한 이스엘이 꾸중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매일매일 저택에는 새로운 음식재료들과 과일들이 운반되어 왔고, 저택의 주방은 그 언제보다도 바쁘게 돌아갔다.
수도에 있는 용하다는 의원이란 의원들을 죄다 불러 내진하게 했으나,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저택 식구들의 시름이 나날이 깊어져만 가던 때였다.
주말의 느지막한 점심, 이스엘과 라한은 나란히 창가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잘 교육받은 시종이 이스엘과 라한의 앞에 다기를 세팅했다.
입덧이 시작된 이래로 향이 진한 차를 마시지 못해서, 되도록 향이 미미한 종류만 마시고 있었다.
김이 올라오는 찻물은 선명한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건 어떤 차냐고 물었다.
집사 케일런이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혈액순환에 좋은 포로그렌 잎을 우려낸 차입니다.”
구수한 향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찰랑이는 주홍빛의 찻물이 눈으로 보기에 좋았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이스엘이 문득 멈추었다.
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더니, 로미렌스에서 먹었던 과실주와 똑 닮은 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달콤했었지…….
혀를 간질이는 듯 달달하면서도 톡 쏘는 과즙 맛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이스엘은 깜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틀어막았다.
“이스엘?”
라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이스엘에게 다가왔다.
주전자를 기울이던 케일런이 익숙하다는 듯 급하게 트레이를 치워냈다.
라한은 곧장 시종에게 찻잔을 치워버리라고 명했다.
그리곤 임산부에게 좋다며 포레그렌잎 차를 추천했던 케일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스엘은 그런 라한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에요, 라한. 그게 아니라…….”
라한이 의아한 얼굴로 이스엘을 바라보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먹고 싶은 게 생겼어요.”
라한이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