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24화 (124/130)

# 124

외전9

이스엘과 라한을 태운 마차가 교황령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성벽을 통과하였다.

굳이 신분 패를 보이지 않아도, 카녹스 대공작가문의 문장이 찍혀있는 마차를 본 성기사들이 알아서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성기사 중 하나가 급히 그들의 방문 소식을 대신전에 알리기 위해 뛰어갔다.

천천히 굴러가던 마차의 바퀴는 대신전 앞에 당도하자 완전히 멈추었다.

이스엘은 라한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땅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교황령의 땅을 밟는 순간 묵직하고도 고요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웅장한 대신전 앞에는 이미 그들을 마중 나온 신관과 성기사들이 기다리고 서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신관은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거친 숨을 고르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놀란 이스엘이 덩달아 고개를 숙이자, 신관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마치 교황을 대하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는 송구하단 표정으로 이스엘에게 말을 걸었다.

“바로 교황 성하께 안내하겠습니다.”

이스엘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과 라한이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전 내부에 들어서자,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단번에 꽂혀들었다.

이스엘은 잘 체감하지 못했지만, 교황령 내에서 그녀의 유명세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다.

신자들이 이스엘의 얼굴을 알아보곤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다가오다가도, 곧바로 꽂혀드는 라한의 서늘한 눈빛에 질려서 도망가기 일쑤였다.

이스엘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뭉쳐 있던 사람들 무리가 반으로 갈라져 집무실로 향하는 길을 터주었다.

마치 투명한 카펫이 깔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의자에 앉아있던 리안테가 일어나며 이스엘과 라한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이스엘.”

“교황 성하.”

리안테는 여상한 얼굴 표정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지만, 이스엘이 신전을 방문해준 것이 내심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리안테의 푸른 눈은 예전보다 훨씬 맑아진 느낌이었다.

이스엘을 바라보던 그녀의 푸른 눈이 일순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것을 갈무리하고 이스엘과 라한에게 자리를 권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자마자, 시종이 곧바로 따뜻한 차를 내왔다.

진한 차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맞은편에 앉은 리안테가 이스엘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이스엘은 품에 소중히 안아들고 있던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작은 선물을 사왔어요.”

“……!”

“변변치 않지만, 성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요.”

잠시 말을 잃고 크게 뜬 눈만 깜빡이고 있던 리안테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풀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이스엘의 흔쾌한 답에 리안테가 포장지의 리본을 풀었다.

보드라운 실크 천이 펼쳐지며, 그 속에 담겨있던 물건이 드러났다.

그것은 은빛의 실로 촘촘하게 짜인 팔찌였다.

팔찌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겼다.

중앙에 매달린 작은 유리구슬 안에는 말린 분홍빛의 약초가 담겨있었다.

부드럽게 코로 스며드는 향은 그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리안테는 이 약초를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에 효력이 있다는 해담초였다.

온난한 기온에선 자라지 않는 특성 때문에 수도에서는 재배할 수 없어 구하기가 힘든 약초였다.

선물을 건네받는 것은 리안테에게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각국의 고위 귀족들이 교황청에 잘 보이기 위해 값비싼 선물들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물론 리안테는 그것들에 손도 대지 않고 죄다 돌려보냈다.

조금은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을 텐데, 그 부분만큼은 철벽을 세웠다.

하지만 이 선물은 달랐다.

리안테는 이것을 골라 제게 선물한 이스엘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황의 자리에 앉은 이후로, 리안테는 수많은 이들의 기대와 욕심을 진 채 살아왔다.

선망에 가득 찬 시선이 부담스러워 신경통에 시달릴 때가 잦았다.

그것에 대해선 측근에 있는 신관들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리안테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치미는 따스한 감정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물끄러미 팔찌만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이스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역시…… 너무 보잘것없는 선물이지요?”

리안테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항상 나긋한 목소리의 톤에서 살짝 벗어날 정도로 격한 부정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스엘.”

이 팔찌뿐이 아니라, 모든 것이요.

그녀가 작게 덧붙이자, 이스엘이 맑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간간이 신전에 들르겠다고 하자, 리안테는 더욱더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문득 리안테가 말을 멈추었다.

“성하?”

“사실은…….”

한참 이스엘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고르던 리안테가 조심스럽게 서두를 꺼냈다.

“염치 불고하고, 이스엘 그대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이스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라한은 표정을 굳혔다.

리안테에게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대신전 옆의 공터에 새로운 신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새로운 신전이라는 말에 라한과 이스엘 모두가 놀랐다.

리안테는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에닉스 신뿐이 아닌, 모든 신을 모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시간이 멎은 듯한 짧은 침묵이 문장 사이에 파고들었다.

“그곳을 장식할 석상들을, 당신이 조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네에?”

이스엘이 리안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가 뒤에 기립해있던 대신관에게 손짓을 했다.

대신관이 황급히 널찍한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었다.

그것은 신전의 조각상들을 조각해줄 조각사를 찾는 공문이었다. 공사의 규모와 기간 등이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조각사에게 주어질 막대한 포상금 역시 명시되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이스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아, 저기…….”

이스엘이 당황해하며 종이를 내려놓자, 리안테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스엘이 옆에 앉아있던 라한과 눈을 마주쳤다.

라한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부드럽게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놀랐던 심장이 차차 진정되어 갔다.

이스엘은 리안테에게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리안테는 이스엘을 닦달하지 않고, 고개를 차분히 끄덕였다.

그리고 건물이 지어지기까지 세 달 정도 걸리니, 그 전까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숙고해달라며 말을 덧붙였다.

이스엘과 라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문득 리안테가 이스엘을 불렀다.

“이스엘.”

리안테가 이스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녹스 대공작령에서 보았던 눈밭처럼 하얗디하얀 손이었다.

이스엘은 그녀의 손이 잘 만든 대리석 조각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교황이 이스엘에게 물었다.

“잠시 손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눈을 깜빡이던 이스엘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리안테가 펼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리안테는 이스엘의 손을 아주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대로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삭이는 듯한 바람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손바닥을 타고 들어오는 간질간질한 기운에 이스엘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자 이스엘 옆에 있던 라한이 곧장 리안테의 손을 쳐내려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리안테가 이스엘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서있었다.

보드라운 깃털로 간질이는 것 같던 감촉은 어느새 온기로 변해, 따스한 차를 마신 것처럼 몸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하고 낯선 감각이었다.

하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척 그리운 느낌이 나서, 다시금 리안테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한은 교황이 손을 놓아주자마자, 이스엘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가 잔뜩 경계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하지만 리안테는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저 기운을 잠시 불어넣어 드린 것뿐입니다.”

“기운이라니?”

되묻는 라한의 말을 곱게 무시하고, 리안테가 이스엘을 향해 다정하게 말하였다.

“이스엘, 주무실 때엔 꼭 본인의 조각상을 곁에 두고 쉬도록 하세요.”

이스엘은 알 수 없는 교황의 충고에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나 리안테는 머지않아 자연히 알게 될 거라며 인자한 미소를 지을 뿐,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려 하지 않았다.

단정히 다문 입매가 단호해서, 이스엘은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녀는 리안테에게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하고, 라한의 팔을 이끌어 교황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대리석 문이 천천히 닫힐 때까지도, 라한의 사나운 눈빛은 리안테에게 꽂혀있었다.

하여간 이스엘을 지극히도 아끼는 남자였다.

하긴 리안테가 이전에 이스엘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이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리안테는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오랜만에 강력한 성력을 썼더니 약한 현기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옆에 조용히 서있던 대신관 루스가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되찾는 교황을 향해 흘깃흘깃 시선을 던졌다.

라한 그리고 이스엘과 마찬가지로, 그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정확히 들었다면, 방금 교황이 읊은 기도는 보호와 축복을 담은 것이었다.

치료하기 힘든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신전을 찾으면, 신관들이 치유의 기도 대신 읊어주는 것이었다.

루스는 어쩐지 염려스러워 표정을 잔뜩 흐린 채 물었다.

“성하, 방금은 무슨……?”

“제 성력으로는 임시방편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도움이 됐겠지요.”

루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 정말입니까?”

교황을 향해 되묻는 루스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처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이요?”

“정말 이스엘 님이 불치병에 걸리신 겁니까?”

루스의 말에 리안테는 대번 눈썹을 찌푸리고 그를 꾸짖었다.

“그게 무슨 불경한 말입니까, 대신관!”

혼이 난 대신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그럼 방금 읊은 그 기도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방금 읊으신 기도는…….”

루스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곧바로 눈치챈 리안테가 짧게 혀를 찼다.

“여신의 보호와 축복이 필요한 것은 병자뿐이 아닙니다.”

“예……?”

리안테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작은 생명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지요.”

보호와 축복, 그리고 작은 생명.

혼란스러움에 찌푸려져 있던 루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져갔다.

“그 말씀은, 설마……?”

리안테는 이미 답을 찾은 듯한 루스에게 굳이 확언을 내주지 않고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카녹스 대공작가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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