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외전8
은은한 향의 차가 담긴 찻잔을 기울이던 세레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완 여우라니…….”
새어나오듯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엘의 무릎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던 여우가 쫑긋 귀를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보통 예민한 청력이 아닌 듯했다.
아직 새끼라서 그런지 주둥아리가 강아지처럼 뭉툭했다.
복슬복슬한 꼬리와 살짝 끝이 뾰족한 귀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강아지라 해도 믿을 법했다.
이스엘은 작게 웃으며 여우의 정수리를 살살 어루만져주었다.
동그랗고 말간 눈으로 세레스를 바라보던 여우는 이스엘의 손길을 느끼자마자 눈을 감곤 그릉그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다.
세레스가 아는 여우는 본래 독립심이 강하고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이었다.
애완동물로 키우기 위해 교육을 해도 도망가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레스는 지금 그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여우를 목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직 성체가 아닌 어린 새끼라고 하나, 여우는 이스엘을 마치 났을 때부터 봐온 어미처럼 따르고 있었다.
배를 내보이며 뭉툭하고 작은 앞발로 이스엘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둥,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여우의 탈을 쓴 강아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수도로 돌아온 뒤 질이 좋은 고기를 먹고 포동포동 살을 찌운 덕에, 여우의 황금빛 털에는 윤기가 좔좔 흘렀다.
여우의 털은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머금을 때마다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영롱한 빛을 냈다.
붉은 털을 가진 평범한 여우들과는 다른 희귀한 종인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세레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갸르릉거리며 배를 긁는 이스엘의 손을 한껏 즐기고 있던 여우가 갑자기 몸을 뒤집었다.
컁! 하는 앙칼진 소리와 함께 여우가 손을 물려 들기에 세레스는 황급히 손을 빼냈다.
여우가 수염을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다 자라지 않아 이빨이 아직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칫 잘못하면 손에 상처를 입을 뻔했다.
덩달아 놀랐던 이스엘이 곧바로 여우의 콧잔등을 가볍게 손끝으로 톡 하고 밀며 꾸짖었다.
“그러면 안 돼!”
이스엘의 꾸중에 여우는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귀를 바짝 젖혔다.
끼잉끼잉…….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 보이던 놈은 어디 갔단 말인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끙끙거리며 이스엘의 손에 제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여우의 모습에 세레스는 기함했다.
하지만 이스엘에겐 익숙한 일인 듯했다.
이스엘은 몇 번이나 여우에게 사람을 물어선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다.
그 소리를 알아듣긴 한 것인지 이스엘의 손을 자그마한 혀로 핥으며 애교를 부리는 여우를 보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죄송해요, 스승님. 괜찮으세요?”
“어……. 난 괜찮아.”
세레스는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시는 저 작고 영악한 여우를 건드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세레스였다.
“그나저나 저택에서 생활하는 건 좀 적응이 됐어?”
“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이스엘의 얼굴은 그늘 하나 없이 맑았다.
일평생을 블리샤 저택에서 지내왔던 이스엘이라,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했던 세레스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이 얼마나 지극정성일지 생각하면 사실 당치도 않은 걱정이었다.
“여행은 어땠어?”
“무척 즐거웠어요!”
여행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스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세레스에게 대륙을 가로지르면서 보았던 수많은 절경들과, 로미렌스에서 처음 마주한 바다에 대해 감탄을 늘어놓았다.
한참 이야기보따리를 풀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이스엘이 아,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이스엘은 차 시중을 들기 위해 서있던 집사 케일런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케일런. 혹시 준비해둔 물건을 가져와 줄 수 있겠어요?”
곧장 고개를 끄덕인 케일런이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종은 곧바로 방을 빠져나가더니, 무언가를 소중히 양손으로 들고 들어왔다.
보드라운 실크 천으로 포장되어 있는 판판한 물건이었다.
시종이 그것을 세레스에게 내밀었다.
얼결에 물건을 건네받은 세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게 무엇이냐 묻는 시선을 던졌다.
이스엘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선물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포장을 풀어보아도 되냐 묻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 세레스는 천의 매듭을 풀었다.
천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캔버스였다.
캔버스 위의 그림을 확인한 세레스의 눈이 커졌다.
이스엘에게 언젠가 이야기했던 서대륙의 기법으로 그린 명화였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께는 과실주를, 그리고 세레스를 위해서는 로미렌스에서 눈여겨보았던 그림을 선물로 사왔던 것이다.
언뜻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선물로 사들고 온 이스엘이 어여뻤다.
그는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씩 웃었다.
세레스와 이스엘은 따스한 차가 담겨있던 찻잔을 모두 비우고 나서도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레스는 어느새 저물려고 하는 해를 보곤,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스엘은 세레스를 현관 앞까지 배웅하였다.
“참, 전에 작업하던 것은 그대로 보관해두었으니 언제든지 찾아와.”
황궁의 일에 휘말리기 전, 호메스 신의 조각상을 조각하던 이스엘이었다.
이스엘의 안색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요즘 저택의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세레스가 먼저 말을 꺼내준 것이었다.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말하는데,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침 일찍 입궁했던 라한이 돌아온 것이었다.
이스엘은 곧바로 라한의 마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스엘이 기다리고 있는 현관으로 다가오는 라한의 발걸음은 꽤 조급했다.
성큼성큼 현관을 넘어선 라한이 그를 반기는 이스엘의 허리를 가볍게 껴안았다.
“다녀왔습니다. 이스엘.”
“일찍 돌아오셨네요.”
이스엘의 말에 라한이 가만히 웃었다.
조금 긴 신혼여행을 다녀온 탓에 특별기사단의 업무가 무척 쌓여있었지만, 라한은 그것을 다른 기사에게 떠넘기고 퇴근한 차였다.
억울해도 상대가 신혼을 즐기는 카녹스 대공인 것을 어떡하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라한은 찔리는 기색 하나 없이 이스엘에게 천연덕스럽게 답하였다.
“예. 다행히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라한 때문에 밤늦게 까지 초과 근무를 하게 생긴 기사가 들었더라면 억울한 눈물을 쏟았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길 없는 이스엘은 그러냐며 수긍할 뿐이었다.
“아참, 스승님이 와계셨어요.”
라한의 시선이 빠르게 옆에 멀뚱히 서있던 세레스에게로 향했다.
세레스는 제게 꽂히는 눈길에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그렇군.”
오랜만이라는 말에 답하면서도, 라한의 얼굴엔 별로 달갑지 않다는 기색이 떠올라있었다.
라한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스엘, 조만간 신전에 들러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맞아요.”
이스엘은 여행을 다녀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선물을 사왔는데, 그중엔 교황 리안테를 위한 선물도 들어 있었다.
리안테는 이스엘에게 앞으로 굳이 정기적으로 신전에 들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그렇게 모든 것을 끊어내고 싶진 않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힘은 에닉스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늘은 신전에 들렀다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게 어떨까요?”
라한의 제안에 이스엘이 방긋 웃었다.
“좋아요!”
이스엘은 세레스에게 함께 시내로 나가는 마차를 타면 되겠다며 말했다.
그에 라한의 입매 끝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스엘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스엘이 떠나간 현관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직까지 안 가고 있었군.”
다정한 기색을 쏙 뺀 무뚝뚝한 말투였다.
방금까지 이스엘을 향해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남자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세레스는 그제야 이스엘의 무릎 위에서 애교를 부리는 새끼 여우에게서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뭐가 그리 익숙한가 싶었더니.
이스엘 앞에서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그 외의 사람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이 라한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여우가 라한을 조금 낯설어한다고 걱정하던 이스엘의 고민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건 낯설어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경계일 터였다.
“동족이라는 걸 알아봤구만…….”
세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라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대낮부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요즘 장사가 잘 안 되나 보지?”
신경을 살살 긁는 말투였다.
이게 원래 라한의 모습이었다.
세레스는 대번 미간을 좁히고 응대했다.
“덕분에 요즘 아주 손님이 끊일 새가 없으니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
“그래?”
라한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거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래 가게를 비우면 큰일 나겠네. 빈둥거리지 말고 얼른 가보는 게 어때?”
그러니까 이스엘과 자신의 신혼을 방해하지 말고 썩 꺼지란 말이었다.
세레스는 기가 차 웃으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안 그래도 가볼 거거든?”
나라고 네놈이 이스엘에게 샐샐거리는 걸 보고픈 줄 아냐며 쏘아붙인 세레스는 그 길로 현관문을 나섰다.
뒤늦게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이스엘은 사라진 세레스에 의아해했다.
라한은 당황하지 않고 설명해주었다.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가보겠다고 양해를 구하더군요.”
“그래요?”
입술에 침하나 바르지 않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이스엘은 별 의심 없이 아쉽다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