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외전6
“뭐……?!”
손이 미끄러졌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기엔, 용병이 서있던 곳이 과녁과 한참은 떨어진 쪽이었다.
명백한 고의였다.
라한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사내의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었다.
웬 놈팡이가 자신에게 칼을 던지는데 용병 자존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용병이 거친 숨을 씨근덕대며 발을 내딛으려는데 사회자가 그를 뜯어말렸다.
일단은 시합을 진행해야 하니 진정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그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거칠게 말했다.
“쳇! 던지는 폼을 보니 과녁을 건드리지도 못하겠구만!”
사내는 라한을 도발하여 방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계속해서 입을 놀려댔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기분 나쁜 말을 던져도 라한은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
단검이나 곡도를 쓰는 것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용병들에게나 흔한 일이었다.
기사들은 단검을 쓸 일이 많지 않았다.
결투나 전쟁에 나가도 제 목숨과도 같은 검과 함께했으면 했지, 단검은 조잡하고 열등한 무기로 여기는 경우가 일쑤였다.
손에 익은 검을 쓰지 못하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라한은 달랐다.
전쟁터의 최전방에서 날뛰던 시절, 라한의 손에는 자신의 검이 들려있는 일이 더 드물었다.
그는 검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이라면 그저 손에 쥐고 휘둘렀다.
가끔 그것은 단검일 때도 있었고, 큼직한 철퇴일 때도 있었다.
그런 다년간의 경험 덕분에, 처음 만져보는 단검인데도 수년은 함께한 애검처럼 손에 착 감도는 느낌이었다.
사회자가 신호를 주자 라한이 비스듬하게 선 채 단검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탁, 하고 손바닥에 묵직하게 떨어지는 칼자루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단검을 틀어 쥔 라한은 망설임 없이 과녁을 향해 던졌다.
푹!
단검이 나무과녁을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과녁에 집중되었다.
손잡이가 뭉툭한 단검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과녁의 정중앙에 박혀있었다.
와아아!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환호를 양껏 즐기기도 전에 라한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연달아 던진 단검은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과녁의 중앙을 파고들었다.
바로 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정확도에 용병과 사회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우승 후보의 등장에 흥이 돋아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쳐댔다.
“다,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회자가 빠르게 진행을 하기 위해 손짓하자, 일꾼 서너 명이 무언가가 담긴 수레를 낑낑대며 끌고 나왔다.
수레 위를 뒤덮고 있던 천막을 들어내자, 크기 순서대로 놓인 무게추들이 모습을 보였다.
어린아이의 주먹 정도 되는 크기부터, 성인남성의 머리 두 배는 되는 것까지 다양했다.
잿빛의 반질반질한 원형 추에는 각각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이건 북 대륙의 탄광에서만 채굴되는 리네트석으로 만든 무게추입니다.”
이스엘의 눈이 커졌다.
리네트석에 대해서는 그녀도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석상 조각을 실습하기 전에, 스승님에게 각 지역에서 나는 돌들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 수업을 받았던 것이다.
리네트석은 특수한 온도와 압력이 주어져야만 만들어지는 암석으로, 발굴되는 곳이 많지 않았다.
흑요석처럼 검은색을 띠지만, 흑요석이 반짝이는 검은빛이라면 리네트석은 마치 먹구름처럼 탁한 잿빛이었다.
그리고 밀도가 무척 높고 제멋대로 금이 가서, 조각 작업을 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은 석재였다.
방금 도착한 구경꾼들을 위해서 사회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여도, 같은 크기인 돌의 배는 넘는 무게를 자랑하지요.”
용병은 이미 제일 무거운 추를 들어 올려 사람들을 기함하게 했다.
그는 큼직하게 심호흡을 하더니, 제일 크기가 큰 추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보였다.
이번엔 라한의 차례였다.
라한은 망설이지 않고 용병이 내려놓았던 추를 집더니, 한 손으로 그것을 들어올렸다.
묵직한 추를 한 손만으로 거뜬히 들어 올리는 라한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와아아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용병이었다.
힘을 쓰는 일에선 단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던 그였다.
용병이 자존심이 팍 꺾인 얼굴로 소리쳤다.
“한 손으로 드는 것쯤이야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더니 사회자가 말리기도 전에 추를 집어 드는 것이 아닌가.
드러난 팔 근육에서 혈관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엄청난 기합소리와 함께 그도 한 손으로 추를 드는 것에 성공했다.
경쟁의식을 돋우는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
열렬한 환호에 흥분한 용병은 들어 올린 추를 이리저리 흔들며 자신의 힘을 과시해댔다.
그리고 그러던 중 그는 추의 손잡이를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추가 용병이 휘두르던 방향 그대로 군중 속을 향해 날아갔다.
불안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이스엘은 숨을 멈추었다.
큼직한 추가 이스엘 바로 옆에 서있는 여인의 머리로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천천히 각인되었다.
저 정도 크기의 리네트석에 깔린다면, 누구든 그대로 즉사하고 말리라.
사고를 이어나갈 틈도 없었다.
이스엘의 몸이 곧바로 움직였다.
“카르뮈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새끼손가락의 반지가 웅, 하고 진동했다.
이스엘은 비명을 지르며 팔로 머리를 감싸는 여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무게추가 여인을 직격하기 바로 직전, 추를 안아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쓰러질 것이라 생각해 숨을 삼켰지만, 이스엘은 선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추를 받쳐냈다.
“이스엘!”
라한의 목소리였다.
이스엘이 옆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자마자 무대 위에서 달려 내려온 것이었다.
다급히 다가온 라한이 당장 이스엘의 손에서 추를 떼어냈다.
묵직한 추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큼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라한은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스엘의 팔을 잡아 확인하는 라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되어있었다.
“라한, 전 괜찮아요.”
“……정말입니까?”
“네. 죄송해요.”
그녀는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 맞춰 카르뮈스 반지의 힘을 빌린 덕에 이스엘은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이스엘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을 여인이 거듭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사회자 역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소란이 진정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이스엘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라한이 무대 위로 올라서더니 곧장 검을 꺼내든 것이었다.
스르릉 쇳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용병은 이미 라한의 손에 멱살이 잡힌 상태였다.
목뼈를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강한 악력이 목을 죄어 숨이 모자랐다.
하지만 컥 하고 숨구멍이 막히는 고통도 일순, 라한과 눈이 마주친 용병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흉흉한 빛을 띤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뒷덜미를 따라 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휘몰아치는 금빛 폭풍을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 무슨……. 캑!”
용병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가는데도 라한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머릿속이 분노로 들끓었다.
이대로 이 쓰레기의 목숨을 끊어놓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라한!”
이스엘이 외치는 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라한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라한의 눈동자에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스엘이 보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손을 놓을 이유는 충분했다.
라한이 멱살을 틀어쥐었던 손을 놓자, 용병의 몸이 철퍼덕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는 질색하여 뒤로 기어갔다.
이스엘은 라한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런 이스엘과 눈을 마주하고, 라한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스엘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스엘은 멀리서 안도의 숨을 쉬며 그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시, 시합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사회자의 물음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용병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숨을 고르며 라한을 노려보다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러더니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이 경기를 끝내버리고 저놈을 조져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회자가 눈치를 보며 게임을 진행했다.
그 이후 여러 종류의 시합이 이어졌으나, 승부는 계속해서 갈려 판정이 애매했다.
번갈아가면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도전자들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힘찬 박수로 응원했다.
점점 더 게임이 흥미진진해지면서, 구경꾼들이 더욱 늘어났다.
사회자는 행사의 마지막으로 준비해두었던 특별 게임을 통해 승자를 가려내겠다고 선언했다.
하인들이 바퀴가 달린 테이블 두 개를 끌고 나왔다.
각 테이블 위에는 유리잔 열 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잔에는 제각각 진한 호박색을 띤 액체가 가득 담긴 상태였다.
목을 가다듬은 사회자가 궁금해 하는 군중들을 향해 말했다.
“악마의 불덩이라고도 불리는, 딜루리안주입니다!”
딜루리안주라는 말에 사람들이 모두 숨을 집어삼켰다.
딜루리안주는 다른 평범한 포도주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도수를 자랑하는 술이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마치 불을 삼킨 것 같다 하여, 악마의 불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실제로 술의 표면 위에 불을 붙이면 그대로 타오를 만큼 알코올 함량이 높았다.
술을 마시다가 여신의 곁으로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자, 에카르 제국에서는 한때 이 술의 유통을 금지하기도 했었다.
이 술을 모두 마신 후, 무대에 그어놓은 일자의 선을 따라 똑바로 걸어갈 수 있다면 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용병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다시금 떠올랐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술고래로 이름이 난 그였기에, 술을 마시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사회자의 신호에 맞추어, 두 남자는 술잔을 꺾어 마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이 고통받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이스엘은 무대 아래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도수가 높은 술이라면, 건강에도 무척 나쁠 터였다.
하지만 이스엘도 언젠가는 깨달아야 했다.
라한 엘 카녹스를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열 개의 잔을 더 빨리 비워낸 쪽은 라한이었다.
마지막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소리에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기고만장했던 용병은 일곱 번째 잔에서 사레가 들려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토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그에 비해, 라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용병이 술잔을 모두 비울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용병이 마지막 잔을 목에 털어 넣었다.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용병이 무대 위의 선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용병이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용병에게 흘깃 시선을 던진 뒤, 라한이 선을 따라 곧바르게 걸어 나갔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자세였다.
사회자가 라한의 손목을 들어 올리며 우승자를 밝혔다.
관중들이 죄다 의자에서 기립하며 박수를 치고 환호를 터트렸다.
이스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갔다.
“라한!”
쏟아지는 박수갈채 소리에 듣지 못했을 법도 한데, 라한은 곧바로 이스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스엘이 그에게 달려가 팔을 부여잡았다.
“괜찮아요?”
라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합니다.”
“정말요……?”
그 도수 높은 술을 열 잔이나 마셔놓고, 아무런 이상이 없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스엘이 걱정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자, 라한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웃었다.
이스엘의 콧잔등 위로 달콤한 뽀뽀가 내려앉았다.
라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럼요, 요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