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외전4
“아…….”
이스엘은 뒤늦게야 라한의 말을 이해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사건에 휘말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둘만의 신혼여행이 아닌가.
이스엘은 미안한 마음에 라한의 뺨에 손을 얹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미 이스엘의 손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진 라한이었지만, 그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자, 한참 머뭇거리던 이스엘이 라한의 입술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눈송이가 내려앉듯 아주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입맞춤 하나에 라한의 얼굴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피로할 때에도 이스엘의 손짓과 눈짓 하나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마는 그였다.
애초에 이스엘 앞에서 화가 난 척을 한다거나, 냉담한 얼굴을 유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며, 라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걱정으로 흐려졌던 이스엘의 얼굴도 곧바로 맑아졌다.
허리를 감싸 안은 라한이 이스엘을 가까이 끌어당겨 부드럽게 키스했다.
따스하고 말캉한 입술들이 서로 포개어졌다.
하지만 달콤한 입맞춤은 곧이어 방해를 받았다.
문 너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스엘이 노크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어트리자, 라한이 곱지 않은 시선을 문 쪽으로 보냈다.
노크를 한 사람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쟁반을 들고 있는 하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은쟁반 위에는 주홍빛 액체가 담긴 고급스러운 유리병과 한 쌍의 크리스털 잔, 그리고 싱싱한 과일들이 푸짐하게 놓여있었다.
라한이 냉랭한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하자, 하인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곳 영주님께서 조각가 엘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보낸 선물입니다.”
아까 일어난 소란으로 조각가 엘이 카녹스 대공과 함께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라한은 귀신같은 눈으로 병 아래에 깔려있는 편지를 발견하고, 이스엘이 안 보는 사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한편 이스엘은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병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면, 유리병에 담긴 것은 이곳 로미렌스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특산 과일주일 것이다.
이스엘의 상기된 얼굴을 본 라한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이스엘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라한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복숭아와 앵두로 담은 과일주는 쓴맛 없이 달달하여 이스엘의 입맛에 꼭 맞았다.
집에서 가끔 마시던 포도주와 달리 가볍게 넘어가는 맛이었다.
“맛이 나쁘지는 않군요.”
이스엘은 그의 말에 동의하며, 나중에 수도로 돌아갈 때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선물로 한 병씩 사 가야겠다고 말했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마차의 짐칸에는 돌아가서 지인들에게 나눠줄 선물상자들이 하나둘 쌓여갔다.
내일은 시내에서 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이스엘은 그곳에서 스승님을 위한 선물을 살 계획이었다.
라한은 어떤 것이 좋을까 조잘거리는 이스엘의 입가에 포도알을 가져다주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했던 이스엘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받아먹었다.
과일을 곁들여 마시니 술맛이 훨씬 좋았다.
이스엘은 라한과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계속 꼴깍꼴깍 물처럼 삼켰다.
하지만 그녀도 그리고 술을 따라주었던 라한도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로미렌스의 특산 과일주는 부드러운 맛과는 달리, 만만치 않은 도수를 자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라한…….”
라한은 이스엘을 위해서 석류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스엘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흠칫 몸을 굳혔다.
이스엘의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연녹색 눈동자는 열기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라한은 불안을 감지하고 입술을 움직였다.
“이스……엘?”
라한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스엘은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라한이 그녀를 부축하려는 찰나, 꿈을 꾸듯 몽롱한 눈을 깜빡이던 이스엘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라한은 헙, 숨을 들이켰다.
지척까지 다가온 이스엘의 도톰한 입술은 방금 먹었던 석류의 즙 때문에 빨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 더운 숨결이 흘러나와 라한의 코끝을 간질였다.
심장이 드넓은 초원을 달리는 맹수처럼 거세게 뜀박질했다.
이스엘만이 담겨있는 온 시야가 아찔했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데, 이스엘이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한.”
“예……?”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끝이 살짝 늘어지고 있었지만,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이스엘의 눈썹은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는 듯 살짝 모여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가슴의 모서리가 이리저리 접히는 듯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라한은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무엇입니까?”
뭐든지 물어도 된다고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이때까지 했던 행동들이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이스엘은 바로 질문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라한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한참 집요하게 바라보던 이스엘이 천천히 손을 뻗어 라한의 뺨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라한은 왜…….”
이스엘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라한은 긴장을 참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꿀꺽 하고 침이 마른 목을 적시는 소리가 둘 사이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왜 이렇게 잘생긴 거예요?”
라한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말에 눈을 깜박였다.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져 있던 신경줄이 맥없이 풀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말 큰일이야…….”
“큰일……이라니요?”
“라한이 너무 잘생겨서 큰일이라구요…….”
하소연을 늘어놓는 이스엘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라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눈만 마주치고 있어도 심장이 쿵쾅쿵쾅…….”
작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놓곤 도닥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라한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웃음소리에 혼자서 심각한 세계에 빠져있던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웃어요? 나를 비웃는 거예요?”
순식간에 억울한 얼굴이 된 이스엘이 라한을 추궁했다.
라한은 웃음을 참아내려 애를 쓰면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닙니다, 이스엘. 제가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미 토라져버린 이스엘의 귀엔 라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라한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이스엘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고정시켰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
“그 누구보다도 그댈 사랑합니다. 이스엘.”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귓가로 흘러들어온 라한의 말들이 진득하게 온몸을 사로잡는 듯했다.
이스엘과 라한은 침묵 속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들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라한이 먼저 고개를 기울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 입술이 맞닿으면서, 불꽃이 확 터지는 감각이 퍼져나갔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처음 닿는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살짝 조급함이 느껴지는 라한의 손이 이스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작은 체구를 거뜬하게 들어 올린 그가 제 무릎 위에 이스엘을 올려놓았다.
부드러운 키스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열이 올랐다.
순식간에 산소가 부족해져 숨이 찼다.
라한은 힘겨워하는 이스엘을 달래가며 깊은 키스를 이어나갔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 잠시도 아쉽다는 듯, 둘은 다시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이스엘이 익숙함을 찾아 라한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라한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가 꺼지는 듯 폭신해졌다.
라한이 이스엘을 안아 침대에 눕힌 것이었다.
몽롱한 열기에 취해 올려다보자, 라한이 물어왔다.
“아직도…… 제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이스엘은 푸스스 흩어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낮게 웃으며 라한이 이스엘의 입매와 턱선을 따라 그리는 듯 입을 맞추었다.
소중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애틋한 입맞춤이었다.
라한의 손이 이스엘의 새틴 잠옷을 부드럽게 풀어내었다.
목덜미에 닿아오는 라한의 숨결은 이스엘 못지않게 뜨거웠다.
바짝 붙은 피부는 상대방의 체온에 점점 더 달아올랐다.
이스엘은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라한의 어깨를 껴안았다.
라한은 이스엘이 힘들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맨살 위에 키스하였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말 그대로 온몸에 차올랐다.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게끔 서로를 꽉 껴안았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라한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스엘은 눈을 감았다.
***
느지막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이스엘은 한참 동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손끝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조금 무거운 감각이 낯설었다.
그것은 아주 보편적인 숙취증세였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내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스엘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어젯밤에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 죄다 기억났던 것이다.
라한에게 잘생겨서 큰일이라고 했던 것도,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고백했던 것도, 그러다가 라한의 무릎 위에 앉았던 것도,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이스엘은 누에고치처럼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았다.
아침 식사를 직접 가져온 라한은 이불뭉치가 되어 있는 이스엘을 발견하고 낮게 웃었다.
못 볼 꼴을 보여줬다며 어쩔 줄 모르는 이스엘이 그의 눈엔 귀엽기만 했다.
그는 이불뭉치인 이스엘을 그대로 폭 감싸 안으며 물었다.
“오늘은 이대로 쉬는 건 어떻습니까?”
하지만 오늘은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해에 한 번만 열리는 축제인 만큼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고 들어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라한이 몇 번이나 권유했지만, 이스엘은 굳건하게 의지를 불태웠다.
그녀는 따스한 물에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축제를 구경할 준비를 끝마쳤다.
외투를 챙겨주는 하인에게 축제에 대해 묻자, 그가 자세히 대답하였다.
“마지막에는 연등을 바다로 띄워 보내기도 하고, 무척 풍성한 축제가 될 모양이에요.”
하인은 라한과 이스엘을 위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설명하던 그가 아, 하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경품을 두고 시합을 벌이는 행사도 있다고 하던데, 이번에 주최 측에서 제시한 우승 경품이 아주 특별한 것이라고 들었어요.”
특별한 것?
이스엘이 의아해져 눈을 깜박였지만, 하인은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한이 이스엘에게 말했다.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제가 우승을 하여 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스엘은 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 그냥 라한과 함께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을 것 같은걸요.”
하지만 이스엘은 몰랐다.
몇 시간 후, 그녀가 라한의 우승을 간절히 기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