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외전3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갔다.
여러 도시를 돌면서 사기를 쳐왔지만, 단 한 번도 발각당한 적이 없었다.
이건 조각가 엘 본인이 등장하지 않고서야 절대 들킬 리가 없는 사기였다.
월든은 경련하는 입매를 겨우 유지하며 반박했다.
“이분이 조각가 엘이라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저 닮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여인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화상 조각의 얼굴과 꼭 닮아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월든은 자신에게 닥친 이 불행한 운명이 현실이라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바락바락 우기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조각가 엘처럼 대단한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겠소!”
쥐죽은 듯 조용한 침묵으로 휩싸여있던 사람들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퍼져나갔다.
조각가 엘이 카녹스 대공과 혼인했다는 소식은 온 제국에 이미 퍼져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월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월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다.
가만히 월든을 지켜보던 여인이 입술을 움직였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뭘 가리키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조각가 엘이 맞아요.”
낭랑한 목소리가 웅성거림을 모두 내리누르고, 모두의 귓가에 선명히 꽂혀들었다.
“그리고 저 조각상은 제 작품이 아니에요.”
흔들림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여인이 식은땀을 흘리는 월든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월든은 흠칫 몸을 굳혔다.
강물처럼 맑은 눈과 마주하고 있자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반사작용처럼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나, 남의 장사에 훼방 놓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썩 꺼지시오!”
월든이 언성을 높이자마자,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흑발의 남자가 로브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좌판 위로 던졌다.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뒤로 칼 두 자루가 교차되어 있는 붉은 문장이 새겨진 명패였다.
그 명패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제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술렁거리던 군중들이 죄다 숨을 집어삼켰다.
제국 내에서 카녹스 대공작가문의 명패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카녹스 대공작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의 옆에 서있는 여인이 조각가 엘이라는 뜻이었다.
남자, 아니 카녹스 대공이 입술을 열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서리가 빗발치는 듯한 눈빛이 월든을 꿰뚫었다.
월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벌겋게 얼굴을 물들인 월든의 동공이 처참하게 흔들렸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뒤늦게 신고를 받은 경비대원들이 도착해, 상인을 연행해갔다.
하지만 그를 연행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기를 친 상인도 문제지만, 이스엘의 작품인 양 조각상을 꾸며낸 조각가가 누군지도 알아내야 했다.
다행히도 경비대원들에게 끌려간 상인이 그자가 머무르고 있는 곳을 곧바로 실토했다.
상인은 자신도 속은 것이라며, 스스로가 무고하다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조금이라도 형을 가벼이 받으려는 마지막 발버둥이겠지만, 제대로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다.
라한은 이스엘에게 자신이 다녀올 테니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자신도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결국 라한과 이스엘은 경비대원들과 함께 조각가 엘을 사칭한 자가 머무르고 있다는 허름한 여관으로 향했다.
낡은 나무문을 두드리자, 끼이익 하고 경첩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체구가 작은 소년이었다.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소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고 꾀죄죄했다.
방문객들의 얼굴을 확인한 소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헉…!”
소년은 파르라니 얼굴이 질려선 이스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못 한 인물을 목격해 큰 충격을 받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경비대원들이 조사를 나왔다고 말하자, 소년은 딱딱하게 굳은 팔을 움직여 그들을 방으로 들였다.
경비대원들이 가져온 유리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를 감싸고 있는 벨벳 천을 풀어내기도 전인데, 소년의 눈은 가련할 정도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속에 담겨있는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얼굴이었다.
천을 풀어 옆으로 치운 이스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소년에게 질문을 했다.
“이 조각상을 만든 게 당신인가요?”
소년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소년의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던 이스엘이 다시금 입술을 움직이려는 찰나, 갑자기 소년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소년은 인간 카펫이라도 될 기세로 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처박고 죄송하다는 말만 외쳤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이스엘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들바들 떨리는 앙상한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착잡한 마음에 눈썹을 모은 이스엘이 소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이러지 말아요.”
그것은 추궁하거나 혼을 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스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
“우선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을래요?”
소년은 수도 카르펨 출신의 고아였다.
거리를 떠돌던 그는 작은 화방의 조각가에게 거두어졌고, 그 이후론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견습 조각가가 되었다고 했다.
소년이 상인 월든과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월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물이 엎질러진 후였다.
그가 협박을 하는 바람에 소년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조각에만 열중해야 했다.
월든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매번 깨트렸고, 소년은 도망쳐서 신고를 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내 소년은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꼼질댔다.
작은 손은 고된 조각 작업 후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탓에 물집이 잡히고 잔뜩 터있었다.
소년이 여태까지 얼마나 혹사당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이스엘이 고사리 같은 손을 향해 조심스럽게 팔을 뻗자, 소년이 화들짝 놀라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말간 눈동자에는 습관과도 같은 공포가 깃들어있었다.
이스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소년의 거친 손등 위를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나랑 약속을 하나 해줄래요?”
약속이라는 말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스엘이 방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조각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거칠고 아직 기교가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개성이 살아있는 조각상이었다.
이스엘을 그대로 흉내 낸 유리 상자 속의 모방품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저 조각들도 무척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일로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아요.”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이스엘의 얼굴만 올려다보았다.
이스엘 뒤에 서있던 경비대원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라한은 이스엘의 말에 숨은 의미를 곧바로 눈치챘다.
라한은 뒤로 돌아 경비대원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예? 하지만 저 소년은요?”
멍청하게 되묻는 경비대원을 향해 곧장 싸늘한 시선이 쏘아졌다.
히익 하고 몸을 떤 경비대원들이 삐걱대며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스엘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소년의 어깨를 다정히 도닥여준 후, 라한과 함께 방을 떠났다.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닫힌 문을 바라보던 소년의 눈에서 뒤늦게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따뜻한 물로 노곤한 몸의 피로를 푼 후, 이스엘은 폭신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포근한 이불에 감싸이자,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마의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스엘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어서, 아직도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여태 수많은 사기를 쳐온 상인은 로미렌스 성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아마 이번 일로 수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것이었다.
한편 조각가 엘의 이름을 사칭한 다른 공범자는 끝내 찾지 못한 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에 알려진 이야기였고, 제대로 된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이스엘과 라한 그리고 이름 모를 소년 세 사람뿐이었다.
만약 소년을 그대로 연행되게 내버려두었다면, 보나마나 상인이 뒤집어씌운 누명에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영 어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스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 누워있던 라한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라한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로라도 하듯 귓가를 간질였다.
이스엘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라한은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콤한 눈으로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엘이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라한이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뺨과 코끝 그리고 턱을 따라 이어지는 간지러운 뽀뽀에 이스엘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말해보세요.”
이스엘은 결국 라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소년이 마음에 걸려서요.”
이스엘의 뺨을 쓰다듬던 라한이 일순 손을 멈추었다.
“저렇게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이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요. 아카데미에 보내기는 어려울까요?”
라한은 말없이 이스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 한 명을 아카데미에 보내주는 것 정도야 카녹스 대공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연락해두겠습니다.”
라한이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이스엘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잠시 그런 이스엘을 내려다보던 라한이 다시 입을 맞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대신…….”
“……?”
말을 흐린 라한이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곤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 소년 이야기는 그만하면 안 됩니까?”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라한은 이스엘이 말을 더 잇기도 전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이스엘에게 말했다.
“그냥…… 신혼여행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