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17화 (117/130)

# 117

외전2

이스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자화상 조각이라니?

이스엘은 단 한 번도 그런 걸 조각한 적이 없었을 뿐더러, 그런 의뢰를 다른 조각가에게 맡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유리 상자 안에 담긴 조각상은 이스엘의 얼굴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꼭 닮아있었다.

또한 얼핏 보면 조각가 엘의 작품이라 믿을 수 있을 만큼 비슷한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하지만 조각가 엘 본인으로서, 이스엘은 그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스엘은 곡면과 직면을 적절히 섞어 생기와 구조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보통 섬세함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표현력은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자칭 이스엘의 자화상이라는 조각상은 눈썹 뼈와 광대 등 곡면이 도드라지는 부분에 정제되지 못한 망치질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스엘의 다른 조각상들과 몹시 흡사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누가 조각했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마음을 먹고 흉내를 낸 티가 났다.

게다가 상인이 설명하는 조각상의 치유능력이라는 것도 그랬다.

이스엘의 조각상에 아무리 에닉스 여신의 힘이 깃들었다 해도, 흉터를 지워주지는 않았다.

회복하는 데에 뚜렷한 도움을 준다는 것이지, 상처를 아예 사라지게 만들 순 없었다.

이스엘이 라한에게 속삭였다.

“라한, 저건…….”

“그대의 작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라한의 말을 들은 이스엘은 조금 놀라서 질문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라한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그대의 조각기법과 조금 다른 듯해서…….”

차마 이스엘이 여태 조각한 작품들을 모두 수집하고 있다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이스엘은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절 사칭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이스엘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라한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가만히 앞을 응시하던 라한이 고개를 숙여 이스엘에게 속삭였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

이스엘이 의아히 눈을 깜박이자, 라한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이스엘에게서 뭐라고 답이 나오기도 전에, 라한이 이스엘을 데리고서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섰다.

***

월든 세이즈는 로스카 제국과 에카르 제국을 왕래하며 물건을 파는 상인이었다.

그는 원가가 저렴한 특산지에서 물건을 사서,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배의 가격으로 팔곤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에카르 제국의 수도 카르펨에 들르게 되었다.

조각가 엘이 베리타스 아카데미에 세운 조각상 덕에, 카르펨에는 이전보다 배는 많은 방문객들이 방문했다.

바로 조각상에 담겨있다는 신성력의 기운을 얻고 가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말은 곧 상인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뜻이었다.

월든 역시 그것을 노리고 카르펨에 들른 것이었다.

베리타스 아카데미는 여전히 휴교 상태였으나,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주말이든 평일이든 끊기는 법이 없었다.

월든은 다른 상인들처럼 그곳에서 가판대를 설치하고 물건을 팔다가, 한 소년과 만나게 되었다.

소년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카데미에 조각상을 보러 왔다.

그 정도 봤으면 지루할 만도 한데, 볼 때마다 눈을 빛내는 것이 참 이상하다 생각했다.

알고 보니 소년은 조각가 엘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소년은 늙은 스승 아래에서 조각을 배우는 견습 조각가였다.

그는 우연찮게 조각가 엘의 조각상을 보고, 그녀의 조각기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후 제막식 때 조각가 엘의 실물과 마주하고 나서는 더욱더 그녀를 우상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조각한 조각상들을 구경한 월든은 묘안을 떠올렸다.

에카르 제국은 예술의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은 나라였지만, 조각가 엘이 등장하면서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벌써부터 수도 카르펨에 사립 예술 아카데미를 세우겠다는 귀족들도 나타났다.

조각가 엘의 조각상은 이제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수도 카르펨에서야 사기를 치기가 어렵겠지만, 조금만 떨어진 곳으로 가도 진품과 가품의 차이를 모를 것이었다.

월든은 소년과 작은 계약을 했다.

마음껏 조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테니, 조각가 엘과 비슷하게 조각을 해 함께 팔아보자는 것이었다.

소년은 나이답게 멍청하고 순수했다.

제 말대로 하다 보면 인기를 얻어 언젠가 조각가 엘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월든의 이야기를 듣고 혹하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에카르 제국과 로스카 제국을 전전하며 판 조각상 값은 월든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쉬이 믿으려 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월든은 하나의 꼼수를 써먹어야 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앞에서 충격적인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월든은 손바닥을 삭삭 비비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 조각상에 깃든 치유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는 군중을 둘러보는 척하면서 혹시 흉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곳곳에서 슬금슬금 손이 올라왔다.

하지만 월든이 고를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미리 말을 맞춰둔 한패인 사내였다.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팔을 걷어 흉터를 보여주었다.

그의 팔뚝에는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이르는 길쭉한 자상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그럴 듯해 보였지만, 그 흉터는 사실 찰흙과 물감으로 꾸며낸 것이었다.

월든은 번지르르한 말들로 조각상이 얼마나 효력이 있고, 어떤 상처들을 치유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였다.

그리고 유리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조각상을 밝은 곳에 보이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조각상에 꽂힌 사이, 월든과 사내는 빠르게 팔을 미리 준비해둔 뜨거운 수건으로 닦아냈다.

사내는 다른 이들처럼 조각상을 보는 척하다가, 경악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흉터가…… 사라졌어!”

당장 극단에서 섭외하러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였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사내의 팔을 들여다보았다.

놀라서 입을 벌리는 사람들과, 다시금 조각상을 확인하는 이들은 조각상이 정말 조각가 엘의 작품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월든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내뻗었다.

“자, 이 조각상의 주인이 되실 분은 누구실까요?”

야시장의 좌판가게에 나오는 고급 물건들은 그 자리에서 경매로 가격을 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월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격을 외치기 시작했다.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낙찰 가격은 점점 더 높이 솟구쳤다.

월든은 벌써부터 큼직한 돈을 만질 생각에 신이 나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저쪽 분이 오천 그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그때 흥분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어두운 로브를 걸친 사내가 말없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좌판 위에 던졌다.

좌판 위에 떨어진 것은 금빛 자수로 섬세하게 장식된 돈 주머니였다.

한눈에 봐도 귀족이나 대부호가 들고 다닐 법한 값비싼 물건이었다.

월든은 놀라서 주머니를 내놓은 사내를 응시하였다.

흑발의 사내는 무척 장신이어서, 덩치가 있는 월든조차 올려다봐야 하는 눈높이였다.

준수한 남자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월든은 자신을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는 냉랭한 금색 눈동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가만히 월든을 응시하던 사내가 모양 좋은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사겠다.”

낮은 목소리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솔솔 풍겼다.

하지만 이곳은 명백히 경매시장이었다.

사겠다고 돈주머니를 던진다 해서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월든은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선은 신사 분께서도 가격을 제시해주셔야…….”

“이만 그랑.”

“……예?”

월든이 멍청하게 되묻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 주머니 안에 든 금화가 총 이만 그랑이다.”

월든은 충격을 받은 눈으로 주머니와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이만 그랑이면, 앞으로는 이토록 힘겹게 사기를 치지 않아도 족히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 큰 돈이었다.

보통 대부호가 아닌 모양이었다.

월든은 솟구치는 광대를 주체하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 보는 안목이 높으시군요!”

이만 그랑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사람들이 모두 질린 표정을 하였다.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월든은 곧바로 포장해서 드리겠다며 돈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가 그를 제지하고 말했다.

“하나면 확인하고 지불하도록 하지.”

“확인이라뇨?”

“그 조각상이 진짜 조각가 엘의 것인지를 말이다.”

“물론 진품이지요! 아까 흉터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월든은 애써 밝은 얼굴을 지어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을 목도하는 순간, 척추뼈를 따라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월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아나는 와중에, 사내가 말을 꺼냈다.

“그것 말고, 확실하게 진품인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월든이 말을 흐리는데, 사내의 등 뒤에서 작은 체구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꿀을 머금은 듯 굽이치는 금발 머리, 그리고 또렷하게 뜬 연녹색 눈동자.

월든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유리 상자 속에 있는 조각상의 얼굴과 여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욕심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한계까지 커졌다.

입을 틀어막은 월든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싸늘한 눈으로 그런 월든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바로 조각가 엘 본인이 확인하는 방법이지.”

쿠궁, 월든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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