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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116화 (외전) (116/130)

# 116

외전1

옅은 잠에 빠져있던 이스엘은 갑자기 몸이 덜컹이는 느낌에 깨어났다.

바퀴가 돌에 걸려 마차가 흔들렸던 모양이었다.

잠이 든 이스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던 라한이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이스엘?”

이스엘은 몽롱한 잠기운을 쫓으며 눈을 깜박였다.

“여긴…?”

“도착했습니다.”

라한의 말에 이스엘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빽빽한 나무들로만 가득했던 창밖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푹신한 흙길이 아니라 돌로 포장되어 있는 도로 위는 많은 마차와 말들로 북적였다.

도시의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큼직한 나무 팻말에 ‘로미렌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것이 보였다.

로미렌스는 에카르 제국 남부에 위치한 유명한 항구도시였다.

카녹스 공작령의 성에서 노닥거리며 이틀간 푹 쉰 이스엘과 라한은 본격적인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향한 곳은 에카르 제국의 남부였다.

로완 강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함께 가자고 약속했던 바다를 보기 위함이었다.

이스엘이 바다를 보러 남부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 때, 라한은 살짝 저어하는 듯했다.

제국을 반으로 횡단하는 무척 긴 여정이었다.

이스엘에게 고된 여행이 될까 봐 염려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이스엘은 크고 작은 도시들에 들러서 관광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오히려 앞장서서 라한을 이끌고 다닐 정도였다.

저택에 갇히듯 생활했던 이스엘에겐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성을 출발한 지 사흘째에 이르러서, 드디어 목적지인 로미렌스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이스엘은 창문을 열고 얼굴을 살짝 밖으로 내밀었다.

남쪽에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점차 온난해지더니, 이젠 두터운 외투 없이도 거뜬할 정도로 공기가 따스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끄트머리에는 옅은 소금기가 묻어있었다.

항상 맡던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냄새에 이스엘이 눈을 반짝였다.

그림으로나 봤던 바다를 처음으로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라한과 이스엘을 태운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길이 끊긴 곳에 멈춰 섰다.

이 이후부터는 마차에서 내려 직접 걸어야 한다고 했다.

라한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이스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면서, 오랜 여행으로 살짝 지쳐있던 몸이 일순 가벼워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두 사람은 여행 내내 그랬던 것처럼 손을 꼭 잡고 해안림 사이를 걸어갔다.

점점 공기에서 나는 소금냄새가 진해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바다가 나타날 것 같았다.

그리고 숲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앞에 푸르른 세상이 펼쳐졌다.

이스엘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눈을 크게 떴다.

해안림 속에서는 메아리의 흔적처럼 들려오던 파도소리가 한 번에 몰아쳤다.

온 시야에 가득 찬 바다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끝도 없이 수평선을 가득 채운 바다는 여태 이스엘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크고 작은 파도들로 일렁이는 수면 위로는 햇빛이 보석가루처럼 부서져 반짝였다.

이스엘이 말을 잇지도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있자, 라한이 앞장서서 그녀를 이끌었다.

이스엘은 얼떨결에 모래사장 위로 발을 내딛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비틀거렸다.

라한이 곧장 어깨를 감싸 안아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질 뻔했다.

고운 모래에 신발이 푹푹 빠져서, 마치 사각거리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감촉이 기묘했다.

두 사람은 파도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의 코앞에 서자, 마치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해안으로 몰려온 파도가 끝내 하얗게 부서지고 말았다.

이스엘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너무 아름다워요…….”

라한이 이스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태 했던 걱정이 모두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리는데도 이스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을 얕은 물에 담근 채 소녀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발가락을 간질이고 황급히 후퇴하는 모래 섞인 파도에서는 청량한 향기가 났다.

발을 꼼지락거리며 참방거리던 이스엘이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굽혔다.

“라한! 이거 봐요!”

이스엘이 맨발인 그대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손바닥을 펼쳤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작은 손바닥 위에는 물감을 섞기라도 한 것처럼 은은한 금빛이 감도는 조개껍질이 올려져있었다.

“라한의 눈동자와 꼭 닮은 빛이에요.”

하지만 라한의 시선은 조개껍질이 아닌, 이스엘의 얼굴에 고정되어있었다.

이스엘은 온 바다를 환하게 밝힐 것만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가슴이 요동을 쳤다.

이스엘에게 뭐라고 답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것보다도 급한 일이 있었다.

라한은 결국 충동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이스엘의 입가에 가볍게 뽀뽀를 남겼다.

이스엘이 놀라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라한의 얼굴 가득 떠오른 미소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을까, 구름 하나 없이 맑던 하늘 위로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라한은 손수건으로 이스엘의 젖은 발을 손수 닦아주곤 그녀를 등 뒤에 업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손사래를 친 이스엘이었으나, 라한의 끈질긴 권유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라한은 이스엘을 업은 채 천천히 해변을 따라 거닐었다.

이스엘은 라한의 목에 소심하게 팔을 두르고 어깨에 고개를 살그머니 기댔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미미한 진동이 등을 타고 전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파도가 철썩철썩 해안에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해가 느릿하게 저물면서 하늘이 농익은 과일 빛으로 물들었다.

바다의 수면이 그에 덩달아 주홍빛으로 일렁이는 모습을 이스엘은 두 눈에 담았다.

따스하게 온기가 전해져오는 든든한 등의 감촉, 귓가를 간질이는 저녁의 바닷바람, 난생처음 보는 바다의 일몰.

그 어느 하나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들뿐이었다.

이스엘은 조금 더 가까이 라한에게 몸을 붙이고,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라한.”

라한이 목을 울리며 웃는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너무 행복해서 꿈만 같다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알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스엘과 라한은 해가 수평선에 몸을 반쯤 담그고 나서야 마차로 돌아왔다.

하인이 미리 알아둔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히 식사를 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로미렌스는 에카르 제국의 무역 절반을 담당하는 항구도시다.

다른 대륙의 상인들이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왕래하는 곳이라, 시장이 무척 발달해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녁부터 열리는 야시장에 볼거리가 많다고 들은 라한과 이스엘은 산책 겸 구경을 나왔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한데, 야시장이 열린 거리는 낮보다도 훨씬 시끌벅적했다.

큰 대로 양옆에 좌판들이 나란히 이어져있었다.

갓 바다에서 잡아온 신선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어부들부터 시작해서 진귀한 골동품과 보석장식들을 늘어놓고 팔고 있는 타국의 상인들까지 다양했다.

라한과 이스엘은 손을 꼭 잡고 떠들썩한 활기로 가득 찬 시장을 구경했다.

사이좋게 과일꼬치를 하나씩 사먹기도 하고, 관객들이 잔뜩 몰린 서커스를 보며 탄성을 터트리기도 했다.

야시장의 중심부로 이동할수록 거리를 채운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

라한은 혹시라도 부딪히는 일이 없게끔 이스엘의 어깨를 철저히 감싸고 걸어 나갔다.

그러던 중,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좌판이 눈에 띄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된 곳에 있는 것은 붉은 벨벳 천으로 가려진 네모난 상자였다.

상인으로 보이는 자가 상자 주변을 빙빙 돌며 물건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여러분들도 소문을 들어서 아시겠지요?”

사내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구경꾼 무리에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구경하는 이들 사이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배로 커졌다.

상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은 이 중에서 이스엘과 라한 두 사람뿐인 듯 했다.

이스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상인이 벨벳 천의 끄트머리를 손에 쥐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자, 기대하십시오.”

상인의 묵직한 목소리에 군중들은 숨을 죽였다.

그가 천을 한 번에 공중으로 열어젖힘과 동시에 외쳤다.

“조각가 엘의 조각상입니다!”

…뭐라고?

낯설지 않은 이름에 이스엘과 라한은 놀라 앞을 응시했다.

투명한 유리 상자 속에는 석회재질의 반신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조각상의 하단부분에는 ‘엘’ 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코, 이스엘은 처음으로 보는 조각상이었다.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오자, 상인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 덧붙였다.

“이것은 조각가 엘의 가장 최신 작품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직접 새긴 자화상 조각이지요!”

이스엘은 기가 차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저 자는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부분의 구경꾼들이 평민이라고 해도, 상인의 말에 혹해 넘어가는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조각가 엘의 작품이 수도의 오르시안 경매장도 아닌 이런 항구도시의 작은 야시장의 좌판 위에 떡하니 나와 있음을 믿는 것은 순진한 사람들뿐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사기 아니냐는 말들이 튀어나오려 하자, 상인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소문대로 이 조각상에는 에닉스 여신의 축복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반신반의하며 몸을 돌리려던 이들의 고개가 다시금 돌아왔다.

이스엘과 라한도 눈썹을 잔뜩 모으고 상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사람들의 흥미가 극에 달한 것을 눈으로 확인한 상인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이제부터 그 치유능력을 증명해보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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