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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115화 (완결) (115/130)

# 115

식이 마치고 나자, 하객들이 가져온 선물들을 갓 맺어진 부부에게 건네는 증정식이 있었다.

“영애, 혼인을 축하드려요.”

은장식과 꽃잎이 하나하나 세공된 다기 세트가 담긴 선물 상자를 건네는 것은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셀린느였다.

“감사합니다. 롯사 공녀.”

이스엘은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오늘의 이스엘은 정말 날개만 없는 천사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셀린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아차, 하고 부채로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이제는 카녹스 대공작부인이신데…….”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셀린느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말고. 이스엘이라고 불러주세요.”

“……!”

맑게 웃는 이스엘의 모습에 셀린느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누가 뭐래도 셀린느는 이스엘에게 좋은 사람이자,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값비싼 선물들이 끝도 없이 쌓여갔다.

황제 테르반은 조카의 혼인을 축복하며, 황궁에서만 기르는 희귀한 품종인 백마를 하사하기도 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큼직한 선물을 건네며 이스엘과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라한의 철벽보호에 부딪혀서 포기해야만 했다.

선물들은 수도에 있는 카녹스 대공작 저택으로 운반될 예정이었다.

라한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곧바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마차를 앞에 두고, 블리샤 백작과 레오가 이스엘의 손을 붙잡고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셋째는 뭔가요?”

이스엘이 물었을 때, 레오와 블리샤 백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동시에 라한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이스엘을 한 번씩 껴안고 도닥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귓속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스엘, 기억하지? 언제라도 돌아와도 된다. 알았지?”

출가를 한 여인이 친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흠이 될 법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라버니와 아버지는 그랬으면 하는 태도였다.

그럴 일이 없으리라는 걸 알지만, 이스엘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라한이 다가와 이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스엘은 라한과 함께 새하얀 마차 위에 올라탔다.

누가 보아도 방금 결혼했음을 알 수 있게끔, 화려한 마차는 색색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시동들이 까르르 웃으며 마차 위로 장미 꽃잎을 뿌렸다.

하객들의 박수와 축복을 뒤로한 채, 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도로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바로 헤르바트 숲이 펼쳐진, 카녹스 대공작령이었다.

***

느지막한 아침, 이스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포근한 이불에 감싸여있었다.

맨살에 닿는 바삭거리는 감촉의 이불이 더없이 나른하게 만들었다.

커튼 틈 사이로 흘러나온 햇빛이 이스엘의 눈시울을 간질였다.

자비 없이 파고드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자, 곧바로 이스엘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큼직한 손바닥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이스엘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바로 앞에 탄탄한 가슴팍이 놓여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살짝 잠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라한이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한 라한이, 베개에 팔을 괸 채 이스엘을 다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한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곳이 어딘지 떠올린 이스엘이었다.

언제나 눈을 뜨던 익숙한 제 침실이 아니었다.

이곳은 카녹스 대공작령의 성 안이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기포처럼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장작불이 타들어가는 소리, 흐릿한 시야 너머에서 일렁이던 촛불, 그리고 다정하게 그녀를 감싸오던 라한의 손길.

두 사람은 서로 다급한 숨결을 삼키며, 서로를 꽉 부여잡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열기에, 이스엘은 자신이 통째로 집어삼켜지는 줄로만 알았다.

몽롱하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몸의 이곳저곳이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지난밤의 흔적들이었다.

이스엘은 쑥스러우면서도 간질거리는 기분에 이불을 코끝까지 당겨 올렸다.

늘 라한에게서 풍기던 마른 꽃 향기가 났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만 같아서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자, 라한이 낮게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았던 곳이 곧바로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라한이 여전히 흰 이불에 코를 박고 있는 이스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유리공예 다루듯 조심스러운 라한의 손길과 눈빛 때문이었다.

이스엘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자, 관자놀이와 눈썹 주변에 잔 키스가 내려앉았다.

“배가 고프진 않으십니까?”

다정한 목소리는 정중하면서도 친밀했다.

라한이 귓가에 낮게 속삭일 때마다 어젯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이스엘의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였다.

이스엘은 부끄러움에 라한과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가, 솔직하게 시인했다.

“배고파요…….”

눈만 빼꼼 밖으로 내놓은 이스엘이 이불 속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은 라한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인지 몰라도 그는 이스엘이 배가 고프다고 한 사실이 무척 흐뭇한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라한이 침대 옆에 걸쳐놓은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얼마 후에, 그는 넓은 은쟁반을 손에 들고 침실로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두 사람분의 식사와 따뜻한 찻잔이 올려져있었다.

이스엘은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베드테이블을 꺼내 설치한 라한이 그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식사는 속에 무리가 없을 법한 음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크루아상과 생과즙 주스, 그리고 산뜻한 샐러드가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먹는 아침이라니, 저택에 있을 때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혹시라도 음식을 흘리면 어찌하나.

이스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라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껏 흘리셔도 됩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오늘 아침의 라한은 조금 더 웃음이 헤펐다.

마치 웃음이 가슴 가득 차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엘도 마찬가지였다.

라한과 이스엘은 그렇게 나란히 침대에 앉아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이스엘의 입술끄트머리에 복숭아 잼이 묻자, 라한이 곧바로 그것을 입술로 훔쳐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침대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배를 채우고, 그대로 라한의 품에 기대 누워있자니 포동포동 살이 찌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둘이서 딱 붙어 서로를 만지작거리는데, 라한이 말을 꺼냈다.

“가볍게 산책이라도 나갈까요?”

라한의 제안에 이스엘은 신이 나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꽤 피곤한 채로 성에 도착한 터라,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간단히 몸을 씻고, 털이 달린 도톰한 외투를 걸쳤다.

수도의 온난한 기온에 익숙한 이스엘이 감기라도 걸릴까, 라한은 이스엘을 아주 꽁꽁 싸매었다.

보드라운 토끼털로 만든 목도리까지 하고 나자, 영락없이 털뭉치가 되어버린 이스엘이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라한이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부탁을 해오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자, 현관에 기다리고 서있던 집사 케일런이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배웅했다.

이스엘은 그의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웬만한 저택의 몇 배는 될 법한 성인데도, 이상하게 다른 고용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미리 도착해있었던 케일런에게 라한이 지시한 것이었다.

케일런은 이스엘과 라한이 머무르는 동안은 고용인들이 모두 소리 없이 왔다 갔다 하게끔 명해두었다.

지금쯤 고용인들은 어딘가에 숨어 한창 궁금증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었다.

카녹스 대공이 돌아온 것도 오랜만인데, 심지어 혼인을 하여 안주인까지 모시고 왔으니 고용인들의 호기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이스엘은 대문 밖을 나섰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지난 새벽 눈이 내렸다는 것을 라한에게 듣기야 했지만, 그래도 말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에카르 제국의 수도 카르펨은 워낙 기온이 온난해서, 눈이 내리는 일이 드물었다.

내린다고 해도 금방 녹아버리기 일쑤라,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눈이 동그래져서 총총 뛰어다니는 이스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라한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그는 헤르바트 숲의 입구 쪽으로 이스엘을 이끌었다.

눈이 내린 헤르바트 숲은 마치 하얀 솜사탕으로 만들어진 성을 보는 듯했다.

이스엘은 눈을 빛내며 숲의 전경을 구경했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헤르바트 숲이라, 다른 곳에 비해 눈이 깊게 쌓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라한은 이스엘이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지탱하고 걸어갔다.

라한은 마치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이스엘을 일관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두리번거리면서 라한의 손길에 이끌려 숲길을 걸어가던 이스엘은 잠시 멈춰 섰다.

이 길이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걸었던 길 같았다.

뒤를 돌아보며 왜 그러냐 묻는 라한에게 이스엘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한 발자국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심장 소리가 커져만 갔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헤르바트 나무들의 행렬이 끊기고, 시야가 확 트였다.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난 것은 순백의 설원이었다.

이스엘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눈으로 뒤덮여있었으나,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여긴…….”

이스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라한이 이어 대답하였다.

“……맞습니다.”

설원의 중앙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가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 들판이었다.

심장이 느릿하고 묵직하게 박동했다.

이스엘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설원으로 발을 내딛었다.

오늘 아침 라한이 신겨준 털신이 그대로 폭, 눈밭에 파묻혔다.

하지만 이스엘은 멈추지 않고 걸어 나갔다.

한참 동안 설원 위를 발자국으로 수놓던 이스엘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라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엘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찬란한 여름이 아닌, 따스한 겨울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이었다.

더 이상 어린 소년과 소녀는 이곳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한은 주문에 걸린 듯, 이스엘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들판의 중앙에서,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하늘하늘 꽃송이처럼 날리는 눈을 맞으며 라한과 이스엘은 서로를 마주한 채 섰다.

“라한.”

이스엘이 발뒤꿈치를 들어, 라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촉촉한 입술이 맞닿는 순간, 따뜻한 온기가 서로의 몸에 퍼져나갔다.

라한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어떤 그림자의 기운도 읽을 수 없는 맑은 웃음이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둘은 똑같은 생각을 담으며 입을 맞추었다.

당신을 만난 것이, 내게는 구원이었다.

과보호 아가씨,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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