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교황 리안테는 창밖의 광경을 응시하였다.
그녀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공간은 뾰족하게 솟은 교황청의 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었다.
온 사방이 침묵에 삼켜진 새벽이었다.
새벽 풍경을 내다보던 리안테의 시선이 손에 들린 두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로 돌아왔다.
하나는 지난날에 건네받은 두루마리였고, 하나는 에닉스 대신전의 신탁 항아리에 십수 년 동안 보관되어있던 것이었다.
바로 이스엘 블리샤의 신탁이 담긴 양피지였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 양피지 위에는 반듯한 글씨체로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구원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이스엘의 신탁도 그러고 보면 다른 평범한 신탁과 달리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부정적이지 않은 내용이라, 당시에 신탁을 받은 신관은 그저 넘긴 듯했다.
하지만…….
리안테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빳빳한 양피지에는 카녹스 대공이 카르뮈스 대신전에서 받아온 새로운 신탁이 적혀있었다.
원래 한 번 내려진 신탁은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안테가 라한에게 카르뮈스 신전에 다녀오라고 한 것은, 일말의 직감 때문이었다.
그럴 리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꼭 그럴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이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리안테가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한 끝에 펼친 양피지에는, 짤막한 말이 쓰여 있었다.
[영원과도 같던 기다림은 끝이 났다.]
마치 본디 하나였던 것을 반으로 쪼개기라도 한 것처럼 꼭 들어맞는 신탁이었다.
리안테는 신탁을 건네며 말갛게 웃어 보이던 이스엘의 얼굴을 떠올렸다.
라한은 그런 이스엘의 곁을 지키고 선 채, 맑은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맑은 물로 씻어 내린 듯 또렷한 그 눈동자를 본 순간, 리안테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애초에 라한에게 주어진 신탁은 저주가 아니었다.
신조차도 단언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그리고 라한의 운명은 이스엘과 만나는 순간,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언젠가 에닉스 신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리안테는 손에 쥔 양피지들을 한데 모아 실로 동여맸다.
카르뮈스 신을 상징하는 검은 실과 에닉스 신을 상징하는 하얀 실이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얽혀들었다.
그와 동시에, 손을 꼭 부여잡고 돌아가던 연인의 뒷모습이 잔상처럼 리안테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앞으로 이스엘과 라한 두 사람의 미래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두 사람이 붙잡은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장막이 걷히면서, 아침이 찾아들고 있었다.
라한과 이스엘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듯 환하게 밝아오는 창공을 바라보며, 리안테는 미소를 지었다.
***
마차에서 내린 세레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텅 빈 들판이었던 곳에,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이 자리해있었다.
얼마 전에 수도변의 부지를 매입할 것이라고 했던 라한의 말이 기억났다.
만약 세레스의 추측이 옳다면, 이 부지와 이 건물은 죄다 오늘의 결혼식을 위해 라한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결혼식장 앞에는 어디서 공수해왔는지 모를 겨울 꽃들로 정원이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다단분수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꽃향기가 코끝을 달콤하게 간질여왔다.
구석구석 세심한 정성이 가득 들어있는 정원을 거닐고 있자면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레스는 정원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보다도, 이 모든 것에 라한이 쏟아 부었을 금화의 개수를 헤아리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라한이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결혼식장을 꾸민 이유는 딱 하나였다.
세레스와 같은 하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사랑하는 연인인 이스엘을 위한 것이었다.
세레스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정원을 지나쳐,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두 개의 층일 거라 짐작할 법한 높이였는데, 식장 내부는 모두 한 층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세레스는 턱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높다랗게 뻗은 대리석 기둥들이 오목한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대리석 기둥의 발끝에서 머리까지, 가정의 평화와 영원을 상징하는 올리브 잎사귀가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갔다.
식장의 곳곳에는 생생한 꽃장식이 놓여있었다.
남부지방의 꽃밭들을 그대로 옮겨놓았나 싶을 정도로 종류가 많고 아름다웠다.
특히 계단 위의 연단에는 흰 백합과 분홍빛의 엘살도르 장미가 뒤덮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분위기를 풍겨내는 예식장의 모습에 입장하는 하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끊이지를 않았다.
식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자리는 대부분 차있었다.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에 세레스는 긴장하여 고개를 숙이려다가,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황제와 황태자를 발견하곤 숨을 멈추었다.
정말이지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세레스가 엉거주춤 객석에 앉자마자, 앞의 악단이 노래를 연주했다.
연단 위에 등장한 것은 새하얀 예복을 갖춰 입은 교황 리안테였다.
교황이 직접 결혼식의 주례를 서다니, 전에 없을 이례적인 가문의 영광으로 길이 남을 만한 일이었다.
하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교황을 향해 예를 표했다.
그와 동시에, 결혼식의 주인공인 라한 역시 연단 위로 올라왔다.
그는 푸른빛이 도는 검은 예복에, 붉은 망토 차림을 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굳은 입가와 눈썹에서 그가 긴장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물론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봐온 세레스뿐이었지만 말이다.
신랑이 제 자리에 서자, 곧바로 연이어서 오르간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식장 안을 울렸다.
장엄하게 늘어지는 음악소리는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곡이었다.
양옆에 선 성기사들이 대리석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찬란한 햇빛이 들어와 회랑을 비추었다.
사뿐한 걸음걸이와 함께 신부가 입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확 몰렸다.
좌중에 탄식소리가 울려 퍼졌다.
블리샤 백작과 팔짱을 끼고, 연두색과 푸른 꽃들로 장식된 부케를 손에 든 이스엘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투명한 듯 투명하지 않은 레이스들로 겹겹이 이루어진 순백의 드레스자락이 길게 바닥을 끌었다.
목을 드러낸 웨딩드레스는 뽀얀 피부 위에서 더욱더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꿀이 흐르는 듯한 금발을 올려 묶고, 그 위에는 에메랄드가 박힌 티아라가 반듯하게 놓였다.
옅은 홍조가 떠오른 뺨과 연녹색 눈동자에선 생기가 흘러 넘쳤다.
모든 것이 땅으로 고개를 수그리는 계절임에도, 그녀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봄이 머무르고 있었다.
봄의 요정을 형상화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사뿐히 걸음을 내딛는 이스엘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답고 고귀해 보였다.
박수를 치며 신부를 환영하는 모두의 입가에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이스엘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회랑을 따라 걸어 나갔다.
연단까지 길쭉하게 이어진 회랑은 길면서도 짧았다.
붉은 카펫이 향하는 끝에는 금실 자수로 장식된 예복을 갖춰 입은 카녹스 대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끝까지 다다르자, 이스엘이 고개를 들어 라한을 바라보았다.
라한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오로지 이스엘만을 담고 있었다.
그의 귓불이 살짝 달아오른 것을 보고, 이스엘은 작게 미소 지었다.
따스하면서도 몽글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워나갔다.
블리샤 백작이 이스엘의 손을 라한에게로 건네주었다.
“이스엘을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 각하.”
백작의 얼굴은 결연하게 굳어있었다.
그에 라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이스엘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려 화사하게 웃었다.
“감사해요, 아버지.”
“…….”
“사랑해요.”
이스엘이 블리샤 백작을 살짝 껴안았다.
백작은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차오르는 기분에 턱을 단단히 굳혔다가, 제 딸을 껴안았다.
“나도 사랑한다. 이스엘.”
블리샤 백작은 감격과 기쁨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이스엘의 손을 라한에게로 넘겼다.
이스엘은 라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흰 장갑을 사이에 두고도, 따뜻한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라한이 살짝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쥐어왔다.
그 알맞은 악력이 주는 묘한 안정감은 이제 이스엘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스엘을 따스히 바라보며 라한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라한과 헤르바트 숲속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언제나 저를 반겨주던 소년의 찬란한 미소와, 눈부신 하루하루가 마치 잔상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은 자라나 어른이 되었고, 어느새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리안테가 손을 맞잡은 이스엘과 라한을 번갈아 쳐다본 후, 입술을 열었다.
“그대, 라한 엘 카녹스는 이스엘 블리샤를 부인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예.”
“그대, 이스엘 블리샤는 라한 엘 카녹스를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이스엘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한없이 작은 음절이었지만 그것은 큰 고동이 되어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어린 신관이 결혼반지가 올려진 푸른 쿠션을 들고 다가왔고, 두 사람은 서로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리안테가 싱긋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들에게 축복의 의미를 담은 성수를 뿌렸다.
그리고 두 팔을 펼치고 선언했다.
“신 에닉스의 미천한 종으로서, 두 사람을 부부로 공표하는 바입니다.”
리안테의 목소리가 높다란 천장을 타고 올라갔다.
고결한 부부의 탄생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시동들이 라한과 이스엘의 머리 위로 색색의 꽃잎들을 흩뿌렸다.
식장이 떠나갈 듯한 축복과 환호 속에서, 이스엘과 라한은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라한이 이스엘의 손을 맞잡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삼키듯, 라한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가 입술을 열었다.
“영원히, 그리고 끝없이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이스엘.”
이스엘에게만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몸을 사로잡았다.
눈매를 휘며 미소하는 라한의 얼굴이 너무나도 찬란해서, 이스엘은 눈을 재차 깜박였다.
이스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해요, 라한.”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담는 그 눈빛이야말로, 모든 것을 증명했다.
라한이 이스엘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영원을 약속하는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