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제국력 688년, 라한 카녹스가 세상의 빛을 보았다.
손이 귀한 카녹스 대공작 가문에서 드물게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저택을 가득 채운 것은 흥겨운 공기가 아닌 서늘한 분위기였다.
그것은 라한의 눈동자 색 때문이었다.
선명한 붉은 기가 도는 주홍빛 눈동자는 모두에게 기피의 대상이었다.
흔치 않은 색이기도 했지만, 에카르 제국인들이 붉은 눈을 악마의 상징이라고 여기고 있는 탓도 있었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라한을 낳은 친부모 역시 라한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저택 안에서, 어린 공자는 마치 불순물과도 같은 취급을 받으며 방에 박혀 지냈다.
그런 기묘한 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새 라한이 신탁을 받을 나이가 되었다.
예로부터 카녹스 대공작 가문은 카르뮈스 신을 모셔왔기에, 늘 카르뮈스 대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
라한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라도 하듯 냉랭한 기운을 풍기던 공간을 떠올렸다.
신탁을 받기 위해 기도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라한은 자신의 어깨 위를 짓누르는 저주의 기운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낙인이라도 찍히듯 저주의 신탁을 받고 나온 이후, 라한은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물론 선대 카녹스 대공작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그런 신탁을 받은 것을 비밀로 했다.
따라서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대공작과 대공작부인 그리고 몇몇 고용인들뿐이었다.
신탁 같은 것은 믿을 만한 게 안 된다며 라한을 쓰다듬는 대공작부인의 손은 거짓된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라한을 껴안고 강박적으로 속삭이곤 했다.
그런 말들을 늘 들으면서도, 라한은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들의 씨앗이 자신에게 심겨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천천히, 하지만 차근차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가 망가져갔다.
이유 모를 사건 사고들이 잇따랐고, 저택의 고용인들은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갔다.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 되어주었던 엘이 사라지고 나서, 라한은 생명의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체처럼 삶을 살아갔다.
탈피를 하듯 주홍빛 눈동자는 금빛으로 변모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이 특유의 순한 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라한의 눈은 날이 가면 갈수록 날카롭고 흉흉해지기만 했다.
나름 금슬이 나쁘지 않던 부모님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라한이 성인이 되기 직전에 카녹스 대공은 전쟁터에서, 대공작부인은 마차전복사고로 연이어 목숨을 잃었다.
거의 동시에 양친을 잃었음에도, 라한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미 그때, 라한은 자신의 숙명을 완전히 받아들인 듯했다.
묵묵히 양친의 장례를 치르는 라한의 물기 없는 얼굴에, 친척들은 수군거리며 저주받은 신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게 진짜였어.
-제 부모를 죽이고도 저런 뻔뻔한 얼굴이라니.
-역시…….
그들이 뭐라고 하건, 라한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대공작 직위를 계승했다. 가문에서도, 제국에서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공작 자리에 오르고 나서, 라한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카르뮈스 대신전에 정기적으로 지급하던 지원금을 끊는 것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잘라내기라도 하듯, 그는 다시는 카르뮈스 대신전에 들르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 리안테가 카르뮈스 대신전에 다녀오라고 했을 때, 라한은 눈썹을 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안테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곳에서 새로운 신탁을 받도록 하세요.
새로운 신탁이라고?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라한과 달리, 이스엘은 한참 뒤에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라한은 흠칫 몸을 굳혔다.
자신이 저주받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은 이스엘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라한은 일부러 이스엘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어떠한 감정이 담겨있을지 몰라 두려웠던 것이다.
엘은 라한의 주홍빛 눈동자를 보고도 꺼려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사이 그녀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봐 무서웠다.
다른 이들이 경멸 혹은 공포가 담긴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은 괜찮았다.
익숙해져있기도 했고,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라한이 신경 쓰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이스엘마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카르뮈스 대신전으로 향하는 마차 속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
이스엘은 흘깃 라한을 쳐다보았다.
라한은 신전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의 금안은 마치 아스라한 과거의 바닥을 훑는 듯 깊게 침전해있었다.
이스엘은 가만히 라한을 응시하다가, 용기를 내어 그의 손끝을 감싸 쥐었다.
손끝을 조심스럽게 잡아오는 감촉에 라한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 감촉이 이스엘의 손이라는 것을 확인한 라한은 한참 만에야 시야를 끌어올렸다.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듯, 그는 눈썹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이스엘은 라한의 눈동자에 새겨진 불안을 읽었다.
“라한.”
“……예.”
“괜찮아요.”
“…….”
“어떤 신탁이 나오더라도, 저는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라한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이스엘은 살풋 미소 지었다.
라한의 신탁이 저주에 가까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놀란 이유는 무섭거나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스엘은 라한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에게, 그런 저주가 내려졌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항상 라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에닉스 신이든 카르뮈스 신이든, 어떤 신이 어떤 신탁을 내리건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만을 오롯이 바라보는 이 순한 눈의 주인을 사랑했다.
그 사실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스엘의 눈매가 휘며 봉긋한 곡선을 그려냈다.
라한이 멍하니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꽝꽝 얼어있던 가슴이 이스엘의 따스한 미소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라한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점차 사라져갔다.
사랑스러운 이를 향해 마주 웃으며, 그는 이스엘의 작은 손을 힘주어 꽉 맞잡았다.
“예, 이스엘.”
***
카르뮈스 대신전은 수도의 변방에 위치해있었다.
이스엘은 높은 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에닉스 대신전만큼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신전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기운은 이스엘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당기는 듯했다.
마치 그녀의 방문을 반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라한과 시선을 한번 교환하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대신전에 들어섰다.
모든 신자들이 모이는 대신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내부는 한산했다.
곳곳에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을 제외하곤 사람의 발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방문객들로 북적북적한 에닉스 대신전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이스엘은 턱을 들어 신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전의 중심에서부터 둥글게 퍼져나가듯 그려져 있는 천장화엔, 카르뮈스 신의 신화들이 모두 담겨있었다.
그중엔 한때 대륙의 땅을 모두 피로 적셨다는 대륙전쟁을 표현한 그림도 있었다.
흑마 위에 올라탄 전쟁의 영웅에게 창을 건네는 카르뮈스 신의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호기로워 보였다.
천장화를 한참 응시하는데, 누군가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이스엘과 라한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한 노인이었다.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일자로 내려오는 검은 로브와, 그의 어깨에 둘려있는 장식 띠를 확인한 이스엘이 눈을 키웠다.
백금으로 세공한 장식 띠는 각 신전의 대신관들만이 걸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녹스 대공 각하.”
부드러운 목소리가 노인의 입술을 빠져나왔다.
세월의 풍파가 그대로 담긴 얼굴엔 셀 수 없이 많은 주름이 잡혀있었으나, 갈색의 눈동자만큼은 마치 아이의 것처럼 맑고 또랑또랑했다.
라한은 노신관을 알아보고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신관은 라한이 신탁을 받는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와 동시에 라한에게 ‘엘’이라는 이름과 카르뮈스 신의 반지를 주었던 자이기도 했다.
노신관의 시선이 라한에게서 비켜가, 그의 바로 옆에 서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여인의 얼굴을 담는 신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이스엘은 멍하니 신관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스엘 블리샤입니다.”
놀란 듯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노신관은 아, 하고 입술을 벌렸다.
마치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신관은 이스엘이 무안해지기 전에 고개를 짧게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리샤 백작영애.”
노신관은 지체하지 않고 두 사람을 신전의 응접실로 이끌었다.
응접실에는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티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스엘이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맛보았다.
항상 느끼지만, 신전의 차에서는 늘 청량한 향이 났다.
그것만큼은 에닉스 대신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이스엘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그녀가 따스한 차를 음미하는 사이, 노신관의 시선은 이스엘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은반지에 머물렀다.
지그시 그것을 바라보는 신관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집요한 눈길에 라한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노신관은 곧바로 시선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이곳을 오랜만에 찾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기도를 올리기 위함입니까?
뒤잇는 질문에 라한이 눈을 깜박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스엘의 손을 부여잡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던 때가 떠오른 것이었다.
라한이 입술을 달싹이곤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제 옆에 앉은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부정하는 말에 우물처럼 깊고도 맑은 노인의 눈동자가 라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라한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새로운 신탁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묵직한 돌을 내려놓기라도 한 듯,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압도하듯 몸을 사로잡는 기운에 라한은 숨을 들이켰다.
노신관이 그런 라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매를 천천히 휘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