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에닉스 여신을 상징하는 상아 지팡이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워져 있었다.
그 지팡이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여신의 등 뒤에는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실오라기 같은 햇빛줄기들이 깃털 사이사이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마치 여신이 천천히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활짝 펼쳐질 것 같은 날개 아래에서 죄를 지은 인간들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모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여신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은은한 미소와 달리, 화재로 목숨을 잃은 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을 향해 내리뜬 눈은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다.
에닉스 여신 특유의 강인함과 온화함이 아니라, 비통함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처연한 모습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물방울이 여신의 뺨을 따라 흐르고 있는 듯했다.
생명이라곤 없는 돌조각임에도, 여신의 애달픔은 모두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것은 상처를 보드랍게 어루만지는 손길과도 같이, 모두의 뇌리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리안테는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린 채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분명 시야에 담기고 있을 조각상이 무슨 모양인지는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장소에 들어섰을 때부터 묵직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신성력이었다. 우물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것만 같은 신성력은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그리고 장막이 걷히는 순간, 그녀는 그것이 일부분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했다가 까맣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온몸을 뒤흔들며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벌써 억겁의 강을 건너 여신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각상이 뿜어내는 것은 으뜸가는 신성력으로 교황 자리에 올라선 리안테에게도 버거운 힘이었다.
리안테의 뒤에 서 있던 신관들은 휘몰아치는 신성력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하나둘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풀썩, 하고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에도 리안테는 돌아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잠긴 듯했다.
난생처음으로 여신의 힘을 느꼈던, 순수한 어린아이일 적에 치른 정화의 의식처럼 말이다.
그때의 리안테는 지금과 무척 달랐다.
괴짜인 점은 그대로였으나, 신을 모신다는 것에 매순간 기뻐하고 영광스러워했다.
자신의 존재는 절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가 모시는 신의 뜻을 널리 전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코앞에 있던 절대적인 명제를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단순하고도 큼직한 깨달음이 발끝과 손끝까지 퍼져나갔다.
햇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조각상과, 그 너머의 폐허를 바라보던 리안테가 침묵에 감싸인 군중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군중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각이나 예술에 무지한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눈앞의 조각상은 그런 기준들을 훨씬 넘어선 걸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세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모두가 덩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전체를 떠내려 보낼 것 같은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환호가 향하는 인물은 연단 위에 서있는 작은 여인, 바로 이스엘이었다.
이스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 속에서 뭉클한 감각이 벅차올랐다.
달아오른 그녀의 눈시울을 차가운 공기가 어루만지듯 식혔다.
제국력 712년, 겨울을 코앞에 둔 날이었다.
하늘 위를 유유히 맴도는 하얀 송골매가, 위대한 조각가 엘의 탄생을 알렸다.
***
제막식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교황 리안테는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이스엘과 라한을 불렀다.
그들은 성기사들이 간이로 지어둔 천막으로 정중히 안내받았다.
천막 안에 들어서자, 풋풋하고 싱그러운 차 내음이 그들을 반겼다.
잘 준비된 티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있던 리안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황 성하.”
이스엘과 라한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리안테는 고개를 끄덕이곤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옆에 시립하고 있던 시종들이 둘 몫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따스한 김이 잔 위로 몽글몽글 올라와 시야를 살짝 가렸다.
이스엘은 찻잔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리안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아한 얼굴은 왜인지 몰라도 조금 지쳐있는 듯했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리안테의 눈매가 힘없이 깜박였다.
금방 빚어낸 도자기처럼 완벽한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의 리안테는 몹시 나약해 보였다.
손으로 톡 하고 건들면 파삭 깨어질 것처럼 말이다.
한참 동안 아슬아슬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안테가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이스엘은 예의를 잊고 되물었다.
“네……?”
그녀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지금 리안테는 이스엘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절대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심이 가득 담긴 사과를 말이다.
“영애의 조각상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리안테는 이전에 그랬듯 이스엘이라고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를 확실히 지켜 영애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은연중에 느껴지던 미묘한 위압감이 깔끔하게 사라져있었다.
이스엘을 곧게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아니었다.
이스엘은 익숙지 않은 기분을 다스리며 다시 물었다.
“성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리안테는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제 오만으로 그동안 영애께 많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
“저는 그저 여신을 모시는 수많은 종들 중 하나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자조하는 듯한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렇기에 더욱 잔잔히 와 닿았다.
“저에게도, 교황청에도 당신을 제약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스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안테는 이스엘에게 신전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일도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다시금 미안하다고 말하며, 그녀는 입매를 끌어올렸다.
교황의 권위를 모두 발치에 내려놓은, 차분하고도 말끔한 미소였다.
그걸 보는 이스엘은 처음으로 리안테와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리안테와 이스엘은 도란도란 조각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안테는 이스엘의 조각상에 대해 순순한 궁금증과 호기심만을 내보였고, 이스엘은 살짝 신이 나서 열심히 대답을 했다.
훈훈한 분위기에 라한 역시도 딱딱하게 굳혔던 얼굴을 풀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한참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리안테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에 끼워진 약혼반지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이스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막식이 끝나고 나면, 결혼식 날짜를 제대로 잡기로 라한과 약속했었다.
아직까지 와 닿지는 않지만, 드디어 두 사람이 온전한 부부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두 분의 혼인을 제가 반대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앞으로 제가 할 말은…….”
리안테가 말꼬리를 살짝 흐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한의 눈매가 살짝 좁혀들었다.
그녀가 꺼내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예감한 탓이었다.
“다만, 이스엘 그대를 염려하는 마음에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진지하게 다문 입술에 이스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리안테가 무릎 위에 손을 겹쳐 모았다.
이스엘의 질문에 대답하기 직전, 리안테의 시선이 라한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신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탁?
이스엘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
모든 에카르 제국민이 어릴 적에 신탁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스엘도 알고 있었다.
기도실에서 세례를 받은 후, 신관들은 내려진 신탁을 양피지에 적은 후 그것을 말아 신단 위의 항아리에 보관한다.
인생을 좌우한다는 신탁이지만, 보통은 무난한 내용들이 내려오기 마련이었다.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덕담, 행동을 조심히 하라거나 성실하게 삶을 살아나가라는 조언 등 말이다.
신탁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스엘도 어렸을 적 에닉스 대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들었다.
이스엘의 운명이 담긴 양피지 두루마기도 분명 대신전의 항아리에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이스엘에게, 리안테가 말을 이었다.
“카녹스 대공께서 받으신 신탁은, 저주에 가까운 신탁이었습니다.”
저주라는 말에 이스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교황 리안테가 지난번 난데없이 저택에 찾아와 던졌던 기묘한 질문이 다시금 그녀의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당신도 그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그때엔 너무나도 막연하기만 해서, 그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혔던 질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라한의 신탁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스엘의 시선이 자연히 라한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라한은 이스엘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리안테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공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영애께선 모르셨겠지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라한의 손등 위로 선명한 핏대가 돋아났다.
리안테는 곧장 말을 이었다.
“이스엘, 그리고 카녹스 대공.”
연인답게 닮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스엘과 라한을 향해 리안테가 말했다.
“두 사람이 함께 카르뮈스 대신전에 다녀오도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