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이스엘은 몸을 흠칫 굳히며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끌어당겨지는 감각이 뒷골에 선연했다.
어지럽게 번지는 시야를 또렷이 하려고 애를 쓰며,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그때,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스엘?”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이스엘에게 익숙했다.
이스엘은 여전히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한.”
그를 부르는 순간에 딱 맞추어 흐릿하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라한은 눈썹을 잔뜩 모으고 이스엘을 살피고 있었다.
이스엘은 자신의 어깨가 어느새 도톰한 담요로 덮여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 라한이 그녀를 위해 둘러준 것이리라.
그가 이스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꿈……?
이스엘은 그제야 자신이 안락의자 위에서 깜박 잠들어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흐릿한 안개가 끼어 있던 머릿속이 점차 개운해져갔다.
자신을 향해 내뻗었던 하얗고 가냘픈 팔,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던 금빛의 머리카락,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귓가에 퍼지던 목소리…….
무의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려던 기억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로 조금 전에 꾼 꿈이었으나, 마치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힘겨웠다.
아직도 답을 기다리고 있는 라한에게 이스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좋지 않은 꿈은 아니었다.
“이상한…… 꿈이었어요.”
분명 꿈이었을 텐데, 그 순간엔 모든 감각이 현실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달빛을 머금은 푸른 눈을 곱게 접으며, 여인은 이스엘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마치 위로라도 하듯 따스한 음성이 이스엘을 폭 감쌌다.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그것만큼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애달픈 눈빛과 은은한 미소만큼은 선명히 뇌리에 남아있었다.
가만히 라한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스엘이 환히 웃었다.
잠기운이 완전히 가신 듯한 눈이었다.
의아한 얼굴을 한 라한을 내버려두고,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이태까지 머뭇거렸던 것이 거짓인 듯, 망치를 쥐는 이스엘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모호한 선을 그리고 있는 에닉스 여신의 얼굴에 이스엘은 끌을 가져다 대었다.
캉!
끌이 대리석을 파고드는 소리가 다시금 작업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스엘이 조각상을 완성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스엘이 조각상을 완성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황궁과 신전으로 전달되었다.
그 소식에 황제와 교황 모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작업실이 세워지고 이 주도 채 지나기 전에 조각상을 완성한 것이다.
작업실 앞을 기웃거리던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랐을 만큼 이른 날짜였다.
황실과 신전은 함께 계획하고 있던 제막식 날짜를 한참 앞당겨야 했다.
대망의 제막식 날, 귀족이나 평민 가릴 것 없이 온 수도의 제국민들이 모두 아카데미로 모여들었다.
제막식에 황제와 황태자뿐 아니라, 교황 리안테와 고위 신관들 역시 참석할 계획임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천막으로 가려진 조각상과 연단 앞을 사람들이 빼곡히 메우고 있을 것이 눈앞에 훤했다.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군중의 떠들썩한 소리가 이곳까지 전해져 올 정도였다.
이스엘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구름 하나 없이 화창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지, 코끝에 닿는 공기가 한층 서늘했다.
이스엘을 알아보고 몰려들 사람들을 우려해, 라한과 이스엘을 태운 마차는 제막식장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이스엘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준 라한이 그녀에게 물었다.
“긴장되십니까?”
이스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라한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요.”
라한이 다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데,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블리샤 백작영애.”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시온이었다.
이스엘이 이쪽으로 올 것을 어찌 알았는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황태자 전하.”
이스엘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보는 시온의 얼굴은 무척 해쓱해져있었다.
생기가 돌던 뺨은 창백했고, 눈시울은 몇 밤이나 새운 것처럼 퀭했다.
청량미가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굴에 내려앉은 침울한 표정이 어두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큰 외상 없이 잘 회복했다 들었는데, 혹시 아직도 건강이 좋지 않으신 걸까?
이스엘은 걱정스럽게 시온의 얼굴을 살폈다.
이스엘과 눈을 마주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온은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묵직한 사과를 건네며,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일국의 황태자가 백작영애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시온이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전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조심스러운 이스엘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온이 턱을 들어올렸다.
눈앞의 이스엘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용서는 고사하고 냉랭한 말로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당황한 시온이 말을 꺼냈다.
“저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겪으시지 않았습니까.”
끔찍한 일이라는 말에 이르러선 시온의 눈가가 통증이라도 느끼듯 움칠거렸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레커스 교수가 이스엘을 납치했던 일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차를 마시고 쓰러진 후,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레커스 교수가 시온의 차에 탄 것은 몸과 정신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약물이었다.
의원은 치사량을 넘지 않은 덕에 건강에는 해가 가지 않았다며 정말 다행이라고 고했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시온은 곧바로 블리샤 백작영애의 안위부터 캐물었다.
레커스 교수가 이스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해 듣고, 그는 며칠 동안이나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레커스 교수가 이스엘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시온이었다.
에레니움 아카데미에 있는 내내, 레커스 교수는 시온에게 무척 훌륭한 스승이자 친구였다.
그 상냥한 얼굴과 행동들이 모두 다 가면이었다니…….
배신감도 무척 컸지만, 그보다 몇 배는 거대한 죄책감이 시온을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스엘을 지옥의 아가리로 인도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만 아니었어도, 이스엘이 그런 일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할 도리 없이 이를 악무는데, 바로 앞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스엘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진심만이 담겨있었다.
시온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영애께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빚을 졌습니다.”
이스엘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이 빚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시온의 연청색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머지않아 황제가 될 황태자의 약속이었다.
이스엘은 미래의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이었다.
더 이상 시온을 말리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이스엘이 옅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 역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수척해 있던 얼굴에 며칠 만에야 떠오른 맑은 미소였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내내 가만히 옆에 서서 지켜보던 라한이 말을 꺼냈다.
“이스엘, 제막식에 늦겠습니다.”
다정한 목소리에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 역시 제막식에 참석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세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다.
라한은 이스엘이 알렉과 헤리스에게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어디에 계시는지 전해 듣는 틈을 타, 시온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라한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잊지 않겠다는 그 약속, 꼭 지키도록 하십시오.”
“…….”
“이름이 아닌, 전하의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서릿발이 불 듯 서늘한 목소리였다.
가까이에서 풍겨 나오는 살기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시온은 굳게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할 것입니다.”
라한을 마주하는 시온의 두 눈에는 단단한 결심이 서려있었다.
***
검은 장막으로 덮은 조각상은 우뚝,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일렬로 줄지어 선 악단이 뿔 나팔을 불었다.
장엄하고 묵직한 나팔 소리가 머리 위를 가득 메워나갔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교황이 줄지어 연단에 마련된 좌석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이스엘이 카녹스 대공과 함께 연단 위에 올랐다.
이스엘의 모습을 알아본 제국민들이 그녀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기원하는 황제와 교황의 축사가 이어졌다.
공개의 순간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모든 군중들이 숨을 죽이고 앞을 응시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공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이 꽉 들어찬 듯했다.
조각상 옆에 서있던 기사들이 신호를 받고 손을 움직였다.
그들이 밧줄을 잡아당기자, 검은 장막이 물결을 치며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찬란한 햇빛을 받는 대리석 조각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