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레오와 세레스는 밖의 인파에 무척 놀란 상태였다.
이스엘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마차를 타고 왔는데, 마부가 더는 들어갈 수 없겠다고 혀를 찼다.
놀라 밖을 내다보니, 북적북적하게 작업실 옆을 잔뜩 메운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차에서 내린 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 무리에 이리저리 이끌리다가 수완 좋은 장사꾼에게 닭꼬치를 강매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강매 당하는 현장에서 두 사람은 서로와 마주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 뵙는군요.
세레스의 말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예…….
그의 말대로 두 번째인데,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레오는 화방 여주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분명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지난번에도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레오는 그제야 자신이 여주인에게 실례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 숙여 사죄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나, 세레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이스엘에게는 어쩔 수 없이 들켰다고 하나, 그 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세레스티안 타리아임을 밝히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집사가 후작님께서 도련님 소식을 넌지시 물어왔다는 말을 전해준 차였다.
지금은 아주 조용히 지내야 할 때였다.
그 후엔 레오를 알아보는 황실 기사와 만난 덕분에, 두 사람은 어찌어찌 작업실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물론 각자 손에 나란히 닭꼬치를 든 채로 말이다.
작업실 한편에 마련된 티테이블로 두 사람을 안내하며, 이스엘이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두 분이 함께 오셨어요?”
세레스는 머쓱한 얼굴로 바로 앞에서 마주쳤다고 대답했다.
차마 닭꼬치를 강매당하다가 만났다는 걸 입 밖으로 내뱉기는 민망했던 것이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과 씨름하는 소리에 라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레오와 세레스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스엘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밖으로 향했다.
라한이 작업실을 나서자마자, 레오와 세레스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숨이 막히던 공기가 겨우 풀리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라한은 이스엘 앞에선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감출 수는 없었다.
어찌나 날을 세우고 있는지, 눈이 마주쳤을 땐 섬뜩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레오가 이스엘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 많은 사람들이 다 너를 보러 온 거야?”
“아, 그게…….”
그런 모양이에요.
이스엘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레오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자신의 여동생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 대공작 저(邸)에서 지내는 것은 불편하지 않고?”
작업을 하는 동안, 이스엘은 카녹스 대공작 저(邸)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블리샤 백작 저택이 아카데미와 거리가 멀어서 부담이 되지 않겠냐고 라한이 설득한 것이다.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답했다.
활짝 웃는 얼굴에서 진심이 묻어나와, 레오는 내내 가슴에 묻어두고 있던 불안을 살짝 내려놓았다.
처음 이스엘이 카녹스 대공작 저에서 지낸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물론 매일 아카데미의 작업실을 오고 가야 하는 이스엘의 사정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카녹스 대공이 혹시라도 선을 넘는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카녹스 대공이 그녀를 지극히 보살피는지, 사고 후 여위었던 볼에 살이 차오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스엘의 얼굴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오는, 문득 머릿속에 솟아오른 생각에 입술을 열었다.
“이스엘, 혹시…….”
“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레오가 해쓱하게 웃었다.
라한이 무기한 휴가를 내버린 덕에, 특별기사단의 모든 업무를 도맡게 된 것은 부단장인 레오였다.
작업실에 더 일찍 발걸음 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심신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라한이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럴 기미가 영 보이질 않았다.
이스엘이라면 그에게 말을 꺼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부탁을 하자니 어여쁜 여동생을 이용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아서 관두었다.
이스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레오는 찻잔을 들어 올려 입안에 차를 머금었다.
레오가 심란해하는 사이, 세레스의 눈은 이스엘이 작업 중인 조각상에 꽂혀있었다.
세레스의 시선을 눈치챈 이스엘이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손이 가는 작업은 처음이라, 많이 서투른 것 같아요.”
그녀는 세레스가 자신에게 뭔가 조언을 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세레스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스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서 저러시나 해서였다.
“…….”
세레스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른 채 이스엘과 석상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서투르다니, 대체 뭐가?
아직 완성되기엔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완성된 조각상이 어떨지 상상하자, 심장이 곧장 쿵쾅거렸다.
이건 백년 혹은 천년이 흘러도 역사 속에 길이길이 남을 조각상이 될 것이었다.
팔뚝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 같았다.
이스엘에게 조금 더 일찍, 큼직한 조각을 시켜볼 것을 그랬다.
자신이 여태 그녀의 재능을 썩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세레스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이스엘에게 물었다.
“뭔가, 막힌 곳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에닉스 여신의 얼굴 때문에…….”
이스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에닉스 여신을 조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얼굴에는 손도 댈 수가 없었다.
예전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조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망치를 들면 곧장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망치를 내려놓아야 했다.
조각을 하면서 이렇게 막다른 곳에 다다른 것은 처음이라 이스엘은 무척 답답한 상태였다.
세레스는 최대한 이스엘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큰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다른 부분부터 완성해나가는 게 좋겠다.”
세레스의 말에 이스엘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와 세레스를 배웅하고 나서, 이스엘은 안락의자에 몸을 맡겼다.
하루 종일 사다리에 매달려서 조각에 열중했더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반지를 내내 끼고 있긴 했지만, 반지는 그 순간의 근력을 향상시켜줄 뿐이지 그 이후의 후유증은 책임져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엘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스엘이 고생하는 것만큼은 견디지 못하는 라한 때문이었다.
라한은 이스엘의 손에 생채기가 날 때마다 제 몸이 두 동강 난 것처럼 더 아파했다.
지금도 그런데 여기서 힘든 티까지 내면 그가 조각상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이스엘이 조각상에 열중하는 사이, 라한은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조각상 작업이 끝나는 직후에 곧바로 식을 올리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착착 진행되었는데, 마치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두기라도 한 듯했다.
라한은 군말 않고 이스엘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이스엘의 끼니를 자신의 것보다 더 착실히 챙기고, 그녀가 무리하지 않도록 항상 옆에서 보살폈다.
그런 그를 생각해서라도 얼른 조각상을 완성 짓고 싶었다.
이스엘은 안락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해결점이 보이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는데, 잠이 솔솔 몰려왔다.
며칠 동안 무리한 탓에 혹사당했던 근육들이 그녀를 수마로 이끌고 있었다.
이스엘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이다가 결국 닫혀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이대로 조금만 자고 생각하자…….
이스엘은 까무룩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간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을까, 귓가에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청량하게 울리는 소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얕은 물가에서 물장난을 하듯 찰박였다.
고막을 간질이는 규칙적인 소리에 이스엘은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아, 하고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달과, 그 달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호수였다.
보름달이 무척 커서, 수면에 드리운 달그림자가 선명하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달빛은 호수를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쳤고, 바람이 불 때마다 빛의 잔상들이 살랑살랑 물결쳤다.
신발이나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바닥에 보드라운 모래가 따스한 감촉으로 감겨들었다.
이스엘은 이곳이 어딘지 뒤늦게 깨달았다.
어렸을 때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던, 아르펜 호수였다.
선명치 않은 기억과 달리, 눈앞의 시야는 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눈물이 날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고요한 경치 속에 잠겨 있던 이스엘의 뒤에서 인기척이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하고 풀이 밟히는 소리에 이스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이스엘이 당황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스엘.
여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귓가를 타고 넘는 순간 별빛처럼 아스라이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 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인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목소리가 낮은지 혹은 높은지, 떨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습관적인 발음도 하나 없는 투명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음성은 마치 바람처럼 이스엘의 귓가와 목덜미를 천천히 쓸고 지나갔다.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이스엘은 이 온기가 무척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달빛을 온전히 받으며 한 여인이 서있었다.
허리까지 물결치며 내려오는 금빛 머리카락은 투명한 피부에 대비되어 더욱 영롱히 빛났다.
어디선가 날아온 흰 송골매가 여인의 팔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스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앞에 있는 이는, 여신 에닉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