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눈을 깜빡한 사이, 무언가 큼직한 것이 휘리릭 하고 쌩하니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
이스엘은 자신이 대화의 흐름을 놓치고 만 것인가 싶어서 라한에게 되물었다.
“결혼식장이요……?”
라한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이스엘이 눈을 재차 깜박이는데, 라한이 설명을 덧붙였다.
“질 좋은 대리석을 구하느라 조금 힘들었지만, 북대륙에서 새로 발견된 석재광산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라한은 공수해온 대리석이 얼마나 특별하고 아름다운지 말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밀가루처럼 고와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눈 결정이 박힌 듯 빛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리석 대문 위에는 황금으로 장식을 새겨 넣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 라한은 이미 황제 테르반을 협박하여 황실 소유인 바르뮬 광산에서만 나오는 최고급 황금을 얻어놓았다.
그는 결혼식장 내부에 세울 기둥 개수까지 모두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바깥의 정원은 남부에서 가져온 꽃과 나무들로 다음 주 안에 모두 조성될 예정이라고 이야기하는 라한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스엘은 잠자코 라한의 말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대체 언제 이 모든 걸 다 준비하신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걸로 봐선 대리석 건물은 이미 거의 완공된 상태인 듯했다.
저 정도 규모의 건물을 하루아침에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스엘이 묻자, 라한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실은 이스엘이 라한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부터 진행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간 혹 이스엘에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엘이 한참 말이 없자, 라한은 곧장 초조해졌다.
심장이 쿵, 쿵, 하고 불안하게 박동했다.
“이스엘?”
“……죄송해요.”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에 라한의 입매가 딱딱한 석상처럼 굳어졌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걸까?
설마…….
라한은 약혼반지가 끼워진 자신의 손에 힘주어 주먹을 쥐곤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다듬지 못한 초조함과 불안이 말꼬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이스엘은 눈썹을 잔뜩 모으고 답했다.
“제가 알아봤어야 하는 것인데, 늘 라한에게 의지하기만 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에 라한은 잠시 얼어있었다.
뒤늦게야 이스엘의 사과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깨달은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스엘.”
콩콩 뛰던 심장이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라한은 이스엘의 두 손을 잡아 올렸다.
자그마한 손이 그의 것에 폭 감싸였다.
이스엘의 보드라운 손등을 어루만지며 라한이 말했다.
“다 제가 원해서 한 것입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앞으로는 제가 준비에 힘쓸게요!”
결심한 듯 반짝이는 연녹색 눈동자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우리의 결혼식이니까요. 저도 돕고 싶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을 해준 것만으로도 라한은 감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착 가라앉았던 기분이 두둥실 떠올라 하늘 위로 날아갈 것 같았다.
라한은 자신의 입꼬리가 어디까지 올라가있는지도 모르고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아직도 꿈만 같아요.”
라한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이스엘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제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고…….”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이스엘.”
라한이 이스엘의 턱을 잡아 살짝 들어올렸다.
“꿈이 아닙니다.”
이게 꿈이라면, 라한은 꿈의 신을 찾아가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이스엘은 라한의 머릿속을 짐작하지 못하고 그저 환히 미소했다.
가만히 있질 못하는 심장이 날뛰는 것을 그대로 느끼며, 두 사람은 마주한 채 웃었다.
좁지 않은 마차 안이 몽글몽글한 기운으로 가득 들어찼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이내 아카데미에 도착하였다.
미리 도착해있던 성기사들과 황실 기사들이 아카데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렬로 선 기사들이 이스엘과 라한을 향해 일제히 인사했다.
이스엘을 위해 마련된 간이 작업실은 불타버린 기숙사의 바로 옆에 지어졌다.
신전 쪽에서는 폐허를 모두 정리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이스엘이 그것을 막았다.
그렇게 하면 물론 보기에는 깔끔하겠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스엘이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을 지워내는 게 아니었다.
한 번 생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새살이 돋고 딱지가 떨어진다고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스엘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평생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몇 번이나 악몽을 꾸고, 피부를 뜯을 것 같던 열기의 기억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스엘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상처일 테다.
이스엘은 작업실의 중앙에 세워져있는 큼지막한 석재를 올려다보았다.
성인 남성의 키를 거뜬히 넘는 크기의 대리석이었다.
이스엘의 곁에 있던 라한은 벌써부터 걱정으로 얼굴이 흐려졌다.
“이스엘, 괜찮겠습니까?”
“네. 물론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스엘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에 차 보였다.
그녀의 입매 끝에는 아직도 흐릿한 슬픔이 묻어있었으나, 라한은 일부러 그것을 모르는 척했다.
라한도 이 일이 이스엘에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반대 없이 이스엘을 지켜보기만 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스엘은 작은 바구니에 넣어온 자신의 도구들을 주섬주섬 꺼내었다.
“어떤 걸 조각하실 겁니까?”
라한의 담담한 질문에 이스엘은 물끄러미 석재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거대한 석재를 조각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떤 것을 조각 속에 담아내든 간에, 이스엘에게는 큰 도전이 될 것이었다.
처음으로 해보는 작업이라 그런지 손끝에는 묘한 긴장감까지 서려있었다.
세레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는 이스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실 크게 다른 것은 없어.
-……정말요?
이스엘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잘 모르긴 했지만, 분명 이전에 스승님이 조각상의 크기에 따라 작업의 강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려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면적인 회화 그림처럼 단순히 면적이 넓어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이다.
-응. 적어도…… 네게는 다르지 않을 거야.
세레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주지도 않고 씩 웃더니 그저 이스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이스엘은 눈을 살포시 내리감았다.
시야가 어둑하게 가라앉자, 마음도 덩달아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스엘은 두 손을 맞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카르뮈스.”
익숙한 신의 이름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고, 그와 동시에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서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레커스 교수에게 납치되었을 때 머리 위로 내려앉던 가벼운 손길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녀를 빛으로 이끌었던 손길 역시…….
이스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옆에 놓아두었던 망치를 쥐었다.
피부에 닿아오는 망치의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눈앞에 섬뜩한 고백을 늘어놓던 레커스 교수의 얼굴이 잔상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스엘은 도망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는 밖으로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망치와 끌을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연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
보통 조각가들은 석재 위에 목탄으로 대강의 스케치를 그려 넣은 후 작업을 하기 마련이었다.
어느 부분을 얼마나 깎아야 할지 비율을 맞추고, 구도를 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스엘은 이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망치를 집어 들었다.
사다리 위에 올라탄 이스엘은 거침없이 망치를 움직여 나갔다.
깡! 하고 끌이 대리석과 부딪치며 큼직한 조각이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망치질은 점차 속력이 붙었고, 대리석 석재는 점차 살덩이들을 잃어나갔다.
라한은 아무 말 없이 조각하는 이스엘을 지켜보았다.
조각하는 이스엘의 모습은, 또 한층 새로웠다.
연녹색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끌이 향하는 곳에 꽂혀있었다.
어찌나 집중을 하는지, 그녀를 둘러싼 작업실 내부의 공기가 바짝 긴장해있는 게 라한에게까지 느껴졌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는 라한은 죽을 지경이었다.
이스엘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가 고꾸라지기를 반복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치진 않을까 사다리를 꽉 잡고 있긴 했지만, 불안감은 채 가실 생각을 안 했다.
한참 사다리에 매달려 대리석을 깎아나가던 이스엘이 망치질을 멈춘 것은, 장장 네 시간이 흐른 뒤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리저리 각진 덩어리들을 엉망으로 쌓아놓은 것 같았다.
이스엘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더니 사다리에서 한 발씩 내려왔다.
마지막 단을 밟는 순간, 그녀가 발을 헛디뎠다.
“앗……!”
자세를 바로하기도 전에, 라한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껴안아 들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던 이스엘은 입술을 다물었다.
라한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라한,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몇 시간 내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에, 모든 근육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듯했다.
하지만 라한은 웃음을 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얼굴이…….”
“이스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스엘의 걱정 어린 말을 교묘하게 자른 라한이 그녀를 안전히 땅에 내려주며 물었다.
어, 하고 이스엘이 라한과 조각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대답했다.
“알겠어요.”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손을 보고 싶었지만, 왜인지 라한의 얼굴색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라한이 다정히 웃으며 돌가루가 묻어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털어주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이스엘은 여느 때처럼 라한과 함께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스승님이 잠시 확인하러 들르신다고 했으니,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기대감에 찬 상태로 아카데미에 도착하는데, 차창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요란하게 들썩거리는…… 마치 시장이 열렸을 때 수도 거리에서 들려올 법한 소리였다.
햇빛이 너무 눈이 부셔 가려놓았던 커튼을 젖히려는데, 마침 작업실 앞에 도달한 것인지 마차가 멈추었다.
라한은 눈썹을 모으고 마차의 문을 서서히 열었다.
문 밖에 펼쳐져있는 광경에 이스엘은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우렁찬 환호소리가 마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공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군중들이 이스엘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