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꽂혀드는 무시무시한 시선을 굳세게 이겨내고, 기사는 자신이 로스카 제국의 황제 폐하가 보낸 사신임을 밝혔다.
이스엘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기사가 황급히 건네는 서신을 받곤,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던 이스엘은 황제의 서신을 모두 읽고 나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서신은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황제는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난 것에 제국을 대표하여 사과를 건네고 싶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했다.
이스엘의 건강이 염려된다는 것, 그리고 빠른 쾌유를 위해 먼 타국에서 기원하고 있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문장들에는 이스엘과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의 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애틋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본론은 그것이 아닌 듯했다.
뒤의 필기체는 앞의 것보다 훨씬 꾹꾹 힘주어 눌러 쓴 티가 났다.
이스엘은 빠르게 나머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에카르 제국, 전쟁 그리고 억울한 영혼들…….
펜촉에 힘을 준 탓에 활자가 살짝 번져 있기까지 한 단어들은 절절한 부탁을 담고 있었다.
부탁은 간단했다.
목덜미 끝까지 임박해있는 전쟁을 이스엘이 막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스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가자, 옆에 앉아있던 라한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싸늘히 가라앉았다.
그가 무릎에 놓여있는 이스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스엘이 편지를 모두 읽었음을 눈치챈 기사가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는 영애의 답신을 꼭, 직접 전해받길 원하셨습니다.”
“로스카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을 하다니 무척 의외로군요.”
리안테는 기사가 입을 떼길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리안테 아니스는 교황청을 이끄는 주인이었다.
그녀의 눈엔 로스카 제국에서 조각가 이스엘을 빼앗아 가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걸 눈 뜨고 내버려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릴 수 없는 적대심이 리안테의 동공 속에서 일렁였다.
리안테가 이스엘을 향해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스엘, 이런 서신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다니요?”
“지금은 오직 건강을 되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세요.”
리안테가 방금 한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녀의 상태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사이에 여윈 것을 보니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여신의 축복을 지니고 태어난 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스엘에게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근감이 들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에닉스 여신의 따스한 손길이 자연히 떠올랐다.
여신은 늘 리안테에게 한탄하듯 말을 던지곤 했다.
나의 종은 이렇게도 욕심이 많아,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했는데, 이스엘과 만나게 된 이후로 차차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빨리 병문안을 왔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이스엘.”
리안테는 눈썹을 잔뜩 모으며, 며칠간 신경 쓸 일들이 있어서 조금 바빴다고 덧붙였다.
신경 쓸 일이라는 말이 곧 로스카 제국에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는 일과 관련된 것임을, 이스엘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리안테가 이야기를 이었다.
“로스카 제국 출신의 교수가 당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일은, 에닉스 교단에 선전포고를 한 행위나 다름없어요.”
그녀 옆에 앉아있던 사신의 어깨가 티가 날 정도로 굳어 들어갔다.
이스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스엘은 그리 똑똑하지도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는 아니었다.
“성하께서 왜 그리 생각하고 계신지 잘 모르겠어요.”
이스엘의 차분한 목소리에 리안테가 입술을 벌렸다.
그녀는 이스엘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스엘, 그러니까…….”
아이에게 말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찬찬히 설명을 이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스엘이 그녀의 서두를 끊었다.
“저는 에닉스 교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
“신관도, 신도도 아닌 단순한 에카르 제국의 제국민일 뿐이에요.”
“하지만 이스엘!”
리안테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저는 신전의 소유물이 아닌데, 성하께선 그걸 착각하고 계신 것 같아요.”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허를 찔린 리안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만 벙긋거리는 리안테를 바라보며 이스엘은 눈을 또렷하게 떴다.
“더 이상은 다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작은 목소리였으나,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굳게 다문 이스엘의 입술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아파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간단한 발상이었으나,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사건들의 중심을 꿰뚫는 문제였다.
이스엘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그곳에 조각상을 세우고 싶어요.”
“……!”
아카데미를 휩쓴 폭풍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할퀴어놓고 지나갔다.
그것은 이스엘도 마찬가지였다.
죄 없는 영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을 생각하면 묵직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러와 욱신거렸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혹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황제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수많은 선택지들이 시간을 거슬러, 이스엘을 잔뜩 괴롭혔다.
하지만 이스엘은 슬픔 속에 빠져있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스엘은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서, 모든 상처받은 여린 마음들을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것은 이스엘 나름대로의 속죄였다.
에닉스 여신이 자신에게 이런 힘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축복받은 존재임을 알게 된 이후로부터, 이스엘은 한참 동안이나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있고 나서, 이스엘은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정말로 제 조각상에 여신의 축복이 깃들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스엘의 발언에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틈을 노려, 이스엘이 말을 한마디 더 덧붙였다.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전 에카르 제국을 떠나겠어요.”
충격적인 그녀의 선언에 응접실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이스엘의 옆에 있는 라한도 마찬가지였다.
리안테는 사색이 되어 소리까지 질렀다.
“이스엘!”
하지만 이스엘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려고 조각을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엘이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카녹스 대공 각하와 함께, 이런 끔찍한 일에 휘말리지 않는 곳에서 숨어 사는 것이 나을 거예요.”
리안테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변해갔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스엘의 굳건한 의지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리안테는 힘없는 목소리로 아카데미 쪽에 이스엘이 작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겠다고 답했다.
이스엘은 신경 써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곤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
“로스카 제국의 황제 폐하께 말을 전해주세요.”
“……?”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기사의 얼굴이 등이 켜진 듯 환한 화색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건, 황제 폐하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예?”
“그래야만 하는 것이고,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녀린 어깨와 유약한 눈매를 한 백작영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블리샤 백작영애에게서는 마치 단단한 돌과 같은 온전함이 느껴졌다.
기사는 진중한 얼굴이 되어 황제 폐하께 그리 전하겠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과 사신이 모두 돌아가고 나니, 저택이 한층 잠잠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먼 곳에서 해가 저물면서,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이스엘은 텅 빈 정원들의 곳곳에 스미는 석양빛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듯 보았다.
그러다 말고 곁에 서있던 라한에게 말을 꺼냈다.
“너무 제멋대로 굴어서 죄송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스엘.”
“제 생각만 하고…… 라한에게는 의견도 묻지 않았잖아요.”
라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잠시 이스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속삭이듯 그녀를 불렀다.
“이스엘.”
“네?”
이스엘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라한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이스엘은 숨을 멈추었다.
코가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선 라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가 절 놓고 가겠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쫓아갈 겁니다.”
자칫 잘못 들으면 무섭게도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이는 라한의 눈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라한이 손끝으로 홍조를 띤 이스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디로 가든, 저는 그대 곁을 지킬 거니까요.”
라한의 숨결이 이스엘의 입술을 간질였다.
이스엘은 환히 미소하며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이스엘을 마주 안으며, 라한은 마음속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추가했다.
이스엘의 말을 듣고 보니, 왜 진작 이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는지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스엘과 함께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친다.
사랑스러운 그녀 주변에 꼬이는 날파리들을 한 번에, 그리고 영구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명쾌한 방안이었다.
***
교황에게 그랬듯이, 이스엘은 라한과 함께 에카르 황궁을 방문하여 황제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미 리안테에게 서신을 받은 황제는 결국 이스엘에게 설득당했다.
황제 테르반도, 보복만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 이는 아니었다.
황실과 신전 측에서는 이스엘이 방해받지 않고 안전히 작업할 수 있도록 폐허가 된 공간을 정리하고, 석재를 조달하여 작업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작업공간이 대충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스엘은 라한과 함께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이었다.
마차 창문 밖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바람들이 열린 창문을 통해 도망치듯 마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뺨에 닿는 상쾌한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이스엘은 바람결을 만끽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짧은 붓으로 물감을 콕콕 찍어놓은 듯 색색의 코스모스가 들판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감상하던 이스엘의 눈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큼직한 건축물이 들어왔다.
저번에 아카데미로 향할 때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이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저런 건물이 세워졌지?
햇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대리석들 때문에, 건물은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라한, 저길 보세요. 이런 한적한 곳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요.”
신이 난 듯 통통 튀는 이스엘의 말투에 라한이 눈과 입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낮고도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네. 무척 아름다운데…….”
눈을 깜빡이는 이스엘의 대답이 살짝 늘어졌다.
라한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이 무해한 미소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그가 이런 미소를 지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지?
하지만 이스엘이 기억을 되돌리기도 전에, 라한이 나서서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요?”
라한이 이스엘의 손끝을 살짝 쥐며 쑥스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저곳은 우리의 결혼식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