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대공의 등장에 테오도르도, 기사도 모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 각하.”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 기사는 그제야 자신의 앞을 막아선 훤칠한 남성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하였다.
그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질문했다.
“카녹스…… 대공 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는 라한의 모습에 기사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로스카 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에게 꼭 블리샤 백작영애와 직접 만나 서신을 전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 당부와 함께 하르시스 황제는 넌지시 충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블리샤 백작영애에게 카녹스 대공이라는 약혼자가 있는데, 그와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대문 앞에서 만나버렸으니,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주의하라고만 했을 뿐이지, 막상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미친개를 조심하라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셨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그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카녹스 대공에게서 흘러나오는 선명한 살기에 목이 조이는 느낌이었다.
기사는 카녹스 대공의 기세에 압도되어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집사 테오도르가 먼저 그를 대공에게 소개했다.
“로스카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사신이라고 합니다, 대공 각하.”
“알고 있습니다.”
라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는 한 줄기 희망을 찾은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작영애를 뵐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안 된다고 답했을 텐데요.”
단단한 목소리는 마치 철벽과 같았다.
“하, 하지만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꼭 직접 만나서 전해드려야…….”
사신은 예상하지 않았던 답변에 안절부절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문장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라한이 곧장 기사의 말을 잘랐다.
“이곳은 로스카 제국이 아닌 에카르 제국입니다. 제가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날카롭다 못해 날이 선 듯한 말투에 기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사는 황제의 사신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타국이라곤 하나,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기억은 없었다.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히는 와중에도 뭐라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은 명백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절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카르 제국의 황제가 곳곳에 파견했던 기사단과 병사들을 한곳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극비정보가 로스카 제국의 황궁까지 흘러들어왔다.
두 제국이 맞붙으면, 어마어마한 손해가 발생할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싸움이 될 것이고, 그 끝은 로스카 제국의 패배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스엘 블리샤는 당장이라도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이 살얼음판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를 쥔 여인이었다.
조각가 엘을 꼭 설득해야만 했다.
그것이 기사가 머나먼 로스카 제국에서부터 지고 온 사명이었다.
기사는 살짝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애를 직접 뵈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굳센 의지가 깃든 눈이 빛을 냈다.
내내 무감정한 얼굴로 기사를 바라보고 있던 라한의 눈썹이 살짝 들려올라갔다.
“돌아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예.”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이때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현관을 가득 채웠다.
“……!”
라한은 푸른 불꽃이 이는 듯한 서늘한 눈동자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기사가 어찌할 줄 모르고 당혹해하고 있는 와중에, 정문 쪽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방금 막 멈춰 선 새하얀 마차 쪽을 향해 돌아갔다.
기사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라한과 테오도르는 처음 보는 마차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로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인물이었다.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오는 그의 뒤를 한껏 각이 잡힌 성기사들이 따랐다.
그들이 저택의 대문 앞까지 도달하는 데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드를 쓰고 있던 이는 좌중을 한 번 훑어보곤, 후드를 뒤로 젖혔다.
갑갑한 후드 속에 갇혀있던 진갈색의 긴 머리가 어깨를 따라 굽이쳐 흘러내렸다.
“저택이 몹시 소란스럽군요.”
간결한 평을 내뱉으며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는 여인은 바로 교황 리안테였다.
라한과 리안테의 눈길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이스엘의 병문안을 위해 찾아왔는데, 그녀는 어디에 있죠?”
친우를 대하듯 허물없이 이름을 부르는 리안테의 모습에 라한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영애는 지금 안정을 취하고 있어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라한은 막무가내로 구는 교황의 태도에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리안테는 오히려 라한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됩니다.”
리안테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라한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하게 좁혀들었다가, 다시 제 크기를 되찾았다.
“그래요?”
꼬리가 산뜻하게 올라가는 물음이었다.
어느새 리안테의 눈매가 장난꾸러기의 그것처럼 둥글게 휘어져있었다.
라한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묵직하게 숨을 가득 들이마신 리안테가,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이스엘!!!!”
***
오늘따라 창밖이 유독 소란스러운 듯했다.
오전에 테오도르에게 들었던 말도 신경이 쓰이고 해서, 이스엘은 계속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헤리스에게 손님이라도 왔느냐며 물어보려다 관두었다.
헤리스나 알렉이나, 내내 자신과 함께 이 방에 갇혀있었음을 뒤늦게 떠올린 탓이었다.
이스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자리를 비웠던 라한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침대에 가만히 누워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스엘!!!!”
방 안에 있는데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이스엘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급히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연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여인이, 이스엘이 있는 창문 쪽을 올려다보며 반갑게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대체……?
혼란스러워 하던 이스엘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옷장에서 카디건을 꺼내들었다.
“아가씨?!”
알렉과 헤리스가 놀라 그녀를 쫓았으나, 이스엘은 망설임 없이 카디건을 걸치곤 문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문 앞에 서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스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스엘의 몸에 손을 댔다가, 후에 카녹스 대공 각하에게 무슨 화를 입을까 무서워 차마 그녀를 막지 못했다.
결국 이스엘은 일곱이 넘는 기사들을 뒤꽁무니에 졸졸 매단 채 저택의 현관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게 얼마 만에 뛰어보는 것인지 몰랐다.
관절과 다리 근육을 움직이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이스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곳엔 난처한 얼굴로 이스엘을 바라보는 테오도르가 있었다.
테오도르 옆에는 특이한 복색을 한 기사가 서있었는데, 그는 왜인지 몰라도 이스엘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당당한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리안테가 이스엘을 향해 반가이 인사를 했다.
“이스엘. 몸은 괜찮으신가요?”
여인의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성량으로 이스엘을 불렀던 이는 다름 아닌 리안테였다.
이스엘은 살짝 아연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교황 성하…….”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이스엘은 라한과 눈을 마주쳤다.
“이스엘.”
라한이 급하게 이스엘에게 다가왔다.
그는 살짝 비틀거리는 이스엘을 바로 부축하며 말했다.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잖습니까, 어찌…….”
이스엘을 걱정하면서도, 라한은 이스엘의 어깨 너머에 멍청히 서있는 기사들을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금이 저릿한 시선에 기사들이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무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던지라 몹시 억울했지만, 지금은 고개를 푹 수그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라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이스엘을 밖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들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응접실 한쪽 소파에는 이스엘과 라한이,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는 로스카 제국의 황제가 보낸 사신과 에닉스 교단을 이끄는 교황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블리샤 백작영애.”
기사가 조심스럽게 이스엘을 부르자, 리안테와 라한의 매서운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꽂혀들었다.
실처럼 가늘게 유지되고 있던 응접실의 잔잔한 공기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치달았다.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테오도르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아났다.
전쟁 같은 오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