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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100화 (100/130)

# 100

레커스 교수의 집은 베리타스 아카데미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차로는 한 시간이 족히 걸릴 거리였으나, 라한은 단 한순간도 말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전쟁터에 있을 때부터 생사를 함께해온 흑마가 거친 소리를 내며 푸르륵거릴 때마다 코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결국 라한과 기사들은 최단 시간보다 한참이나 빠른 기록을 경신해 아카데미에 도착하였다.

정문을 지키던 황실 기사들은 습격이라도 하듯 아카데미로 들어서는 말들에 당황했다.

그러나 가장 선두에 있는 흑마 위에 올라탄 카녹스 대공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황급히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했다.

고삐를 잡아 당겨 기숙사 앞에서 말을 멈춘 라한은 곧장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기숙사 입구의 구석에는 블리샤 백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서있었다.

아직 출발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화끈하게 달아올라있던 머리가 식어 내려갔다.

라한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스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욕을 짓씹으며 이스엘의 기숙사 방을 향해 발을 옮겼다.

계단을 한 발에 세 개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는 라한의 뒤를 기사들이 졸졸 뒤따랐다.

방까지 향하는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리고 방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라한은 얼어붙었다.

그곳에는 이스엘도, 호위 기사들도 없었다.

오로지 겁에 질린 얼굴의 벨이 있었을 뿐이었다.

라한이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추궁했다.

“이스엘은 어디에 있지?”

“아, 아가씨는 황태자 전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고 가셨는데…….”

황태자라는 말에 라한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벨은 안 그래도 너무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황태자의 숙소인 만큼, 다섯이 넘는 황실 기사들이 교대를 서가며 지키는 곳이었다.

베리타스 아카데미 내에서는 사실 그곳보다 안전한 공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완벽하게 어긋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등 뒤로 스며드는 싸늘한 기운을 떨쳐내고자, 라한은 급히 방을 나섰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기숙사 건물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당황한 목소리가 라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웬 연기가…….”

“저기, 불나는 것 아니야?”

흐릿한 하늘 위로 짙은 회색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작가나 후작가의 자제, 그리고 황태자인 시온이 머무르고 있는 건물이었다.

사고가 이어지기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라한은 건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데이먼 경과 기사들 역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 퍼져있는 매캐한 연기에, 기사들은 기침을 뱉으며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혼비백산한 시종들과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그 무리를 거슬러 달려간 그들은 단숨에 황태자의 방문 앞에 도착하였다.

단단히 닫혀있는 문 앞을,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막아섰다.

기사들이 황급히 검을 빼들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정체를 묻는 기사의 외침에 괴한들이 서로 당황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레커스 교수가 거액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방 안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도,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명령을 해둔 레커스였다.

용병들도 돌이킬 수 없게 흘러가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상태였다.

간단한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던 교수의 말이 모두 거짓임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용병들이 습격한 호위기사와 방의 주인은 제국의 황태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뿔싸, 하고 뒷목을 잡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황태자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용병들은 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레커스 교수가 제시한 액수가 그만큼 컸다.

그들 모두 삼대까지 사치를 누리고 살아도 남아돌 만큼 많은 돈이었다.

용병들이 이를 악물고, 저마다 무기를 들어 올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말없이 그들을 보고 있던 라한의 팔이 움직였다.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마찰음이 환청처럼 모두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새파란 검날이 정확하게 용병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기도 전에, 라한은 검은 고기를 썰 듯 자신에게 달려드는 용병들을 도륙해나갔다.

그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이 딱히 손을 댈 것도 없었다.

문손잡이를 부수고 방에 들어서는 라한의 눈에 기이한 이채가 돌고 있었다.

데이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카녹스 대공의 바로 옆에서 모든 모습들을 지켜봐온 자로서, 지금 라한이 어떤 상태인지 곧바로 짐작한 것이었다.

그는 반쯤 미쳐있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듯 전장을 휩쓸던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불길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방 안을 샅샅이 훑는 카녹스 대공의 얼굴은 선명한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연기로 가득한 방의 구석에는 정신을 잃은 호위기사들과 시종들이 밧줄에 묶여있었다.

그 중에는 헤리스와 알렉, 심지어는 시온도 있었다.

라한이 찾고 있는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황태자를 발견한 황실 기사들은 다급히 그를 불길이 치솟는 곳에서 대피시키느라 바빴다.

하지만 라한은 그쪽에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온이 무사하다는 것은 라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불길이 시작된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한은 굳게 닫혀있는 서재의 문을 향해 돌진했다.

“각하! 위험합니다!”

데이먼의 외침을 뒤로하고, 라한은 발로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두터운 나무문은 사정을 두지 않은 발길질에 부서져 내렸다.

제일 먼저 라한을 덮친 것은 매캐한 연기였고, 그 다음은 피부를 그대로 녹여낼 듯한 열기였다.

라한은 팔을 휘둘러 시야를 가리는 연기를 헤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새빨간 화염이 방의 사방에 번져 천장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방황하던 라한의 시선이 방의 중앙에 고정되었다.

당장이라도 가슴을 뛰쳐나갈 듯 발작하던 심장이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의자에 밧줄로 꽁꽁 묶인 이스엘과, 망치를 들고 있는 레커스 교수의 모습이 그의 눈에 각인이라도 되듯 새겨졌다.

라한이 급히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레커스 교수에게서 싸늘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멈추세요.”

허공에 떠 있던 망치가 어느새 이스엘의 머리 바로 옆에 닿아있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라한이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당장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깨부수겠다는 협박이었다.

라한은 움직임을 멈추고, 앞을 노려다보았다.

꽉 매인 밧줄을 풀려고 용을 쓰느라, 이스엘의 하얀 손목은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이스엘,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처참히 떨리고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라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방을 둘러싼 불꽃이 금방이라도 이스엘을 집어삼킬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수년 전처럼, 무력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손끝이 덜덜 떨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스엘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연기를 지나치게 마신 탓인지, 나오는 것은 격한 기침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괜찮을 겁니다.”

이스엘을 대신해 대답한 것은 레커스였다.

불꽃이 비쳐 일렁이는 남색 눈은 한참 전에 죽어버린 듯, 생기가 사라져있었다.

레커스의 눈매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앞으로 계속 저와 함께일 테니까요.”

말을 덧붙인 레커스가 이스엘의 뺨에 제 손을 올렸다.

눈이 따갑고, 목이 찢어질 듯 아팠음에도 이스엘은 고개를 흔들어 그 손길을 뿌리치려 애를 썼다.

레커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당신은…….

레커스가 그녀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내던졌다.

라한이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불길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차린 레커스는 이스엘을 뒤에 내버려두곤 라한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 레커스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이었다.

하지만 레커스는 혼자서 그 길을 걸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망치를 고쳐 잡는 레커스의 손등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스엘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 뺨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지옥 불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들이 자꾸만 시야를 방해했다.

이대로라면 연기에 질식해 죽거나 불에 휩싸여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죽음의 강이 바로 저 앞에 아른거렸다.

숨이 부족해 질식할 것 같은 그 순간, 이스엘은 눈을 꾹 감았다.

신이 있다면, 그리고 진정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한 줄기 빛을 내려주어야만 했다.

무엇을 기원하는지도 모르고, 이스엘은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턱 끝에 매달려있던 눈물방울이, 기도하는 손 위로 떨어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가벼운 손길이 이스엘의 머리 위에 닿았다.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이스엘은 눈을 번쩍 떴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라한과 대치하고 있는 레커스 교수의 허리띠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실에 묶인 채 달랑거리는 그것은 바로 이스엘의 반지였다.

이스엘은 홀린 것처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카르뮈스…….”

이스엘의 속삭임과 동시에 은반지가 선명한 빛을 발했다.

반지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숨을 쉬듯 점멸을 반복했다.

한참은 먼 거리라 닿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스엘은 홀린 것처럼 반지를 향해 꽁꽁 묶인 양손을 뻗었다.

반지들이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이스엘의 손 쪽으로 움직였다. 이내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바르르 진동하는 반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가느다란 실이 끊어져버렸다.

바닥으로 추락한 반지가 튕겨 오르더니, 밧줄에 묶인 이스엘의 손 앞에 정확하게 멈추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웠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새끼손가락을 감싸는 서늘한 감촉과 함께, 익숙하면서도 낯선 힘이 차올랐다.

머릿속을 흐리던 연기들이 일순 사라진 것처럼 말끔해졌다.

이스엘이 눈을 또렷하게 떴다.

“카르뮈스!”

그녀의 외침이 연기들로 가득한 허공을 가르고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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