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99화 (99/130)

# 99

꽁꽁 묶인 몸은 점점 더 깊은 진흙 같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 속에 잠겨있었을까, 멀고 먼 곳에서 무언가가 수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헐적인 소음은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해져갔다.

이스엘은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노력했다.

비몽사몽 가운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스엘.”

멀지 않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미성에, 현실감이 신경 사이를 스며들었다.

이스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

급히 눈을 뜬 바람에 눈앞의 시야가 어지럽게 쏟아들어져 왔다.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에, 현기증이 다시금 머리를 뒤흔들어놓았다.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있는데도 세상이 온통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눈꺼풀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나서야 시야가 돌아왔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이스엘의 시선이 질문을 던진 남자에게로 향했다.

레커스 티리안이었다.

이스엘을 마주한 채 안락의자에 느슨히 몸을 기대앉은 남자는 손으로 무언가를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로 쪼개진 작은 돌조각이었다.

톡, 토독…….

의식이 없는 중에 시계 초침 소리처럼 귓가를 간질이던 바로 그 소리였다.

돌조각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빠르게 레커스의 손바닥 위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몽롱한 정신이 점차 명료해졌다.

“이게 무슨…….”

그녀의 목소리는 한참 가라앉아있었다.

레커스는 허공에 돌을 던지던 것을 멈추었다.

그가 몸을 고쳐 앉아 자세를 바르게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하십니까?”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조각에 대한 강의를 할 때처럼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가 당신을 납치한 겁니다. 이스엘.”

“……!”

이스엘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차를 마시던 중, 먼저 쓰러진 것은 시온이었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이스엘에게 경고를 하려던 시온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 바닥을 굴렀다.

이스엘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입술을 움직였다.

“황태자 전하는 어디에 계신 거죠?”

레커스가 미소를 거두며 답했다.

“전하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계실 겁니다. 태자 전하의 찻잔에는 보다 강력한 약을 탔으니까요.”

서늘하게 표정을 가라앉힌 이 남자가 레커스 교수와 동일 인물이라니.

이스엘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가 힘들었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지만, 마치 영혼이 바뀐 듯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냈던 신원미상의 인물은 레커스였다.

이스엘이 자신이 조각가 엘임을 밝혔을 때, 레커스가 놀라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이스엘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질문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말이 없는 이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커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생각보다 그리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

“…….”

“당신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리는 걸 몇 번이고 상상했는데 말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며, 레커스가 싱긋 미소했다.

두렵지 않은 게 아니었다.

발끝이 말리고, 금방이라도 숨이 찰 것처럼 무서웠다.

이전의 이스엘이었다면 제대로 된 사고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제 그녀는 잘 알았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생각을 해, 이스엘.

그녀는 곁눈질로 공간을 쓱 훑었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처럼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방을 밝히고 있는 것은 벽에 걸린 은촛대의 불빛뿐이었다.

온 사방에서 느글거리는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빛이 들지 않고 기름 냄새로 꽉 찬 공간이라는 것 외에, 이스엘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이스엘은 불안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알렉과 헤리스든,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기사들이든 누군가 올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이스엘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레커스와 눈을 마주쳤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이스엘은 최대한 자연스레 목소리를 꾸몄지만, 말꼬리가 잘게 흔들리는 것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레커스가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이스엘이 앉아있는 의자로 다가왔다.

이스엘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의자에서 일어서 도망을 치려고 했으나, 몸이 제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약기운이 아직 남아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전에 이스엘의 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양손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카르뮈스 반지도 보이지 않았다.

허전한 손가락을 보는 순간, 눈앞이 절망으로 깜깜하게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반지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바짝 가까이 다가온 레커스 교수가 고개를 숙여 이스엘을 내려다보았다.

“이스엘, 그대는 천재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이스엘의 몸이 긴장으로 바짝 수축했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자, 레커스가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전 제가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조각상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레커스가 눈을 내리감았다가, 다시금 떴다.

방금까지만 해도 유하게 처져있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이스엘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위태로울 정도로 날이 서있었다.

레커스는 자신의 뱃속에서 넘실거리는 모든 욕망과 광기들을 이스엘에게 쏟아 붓고 싶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노라고 탓하고 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끌어안고, 보듬어주고 싶기도 했다.

레커스는 이스엘의 앞에 마치 청혼을 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처음 편지를 보냈을 때는……. 그냥 제 존재만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던 겁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당신을 이토록 경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당신과 처음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레커스의 몸과 마음을 물들인 감정은 그 정도로는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레커스 스스로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내리지 못했다.

방치해둔 상처가 썩어 피부가 괴사하듯, 질척한 감정은 점차 레커스를 좀먹어갔다.

레커스가 꽁꽁 묶여 창백하게 질려있는 이스엘의 손에 자신의 손끝을 올려놓았다.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을 만지듯,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경건했다.

“이스엘. 저는 당신의 재능이 미치도록 부럽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재능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레커스의 손끝이 이스엘의 약혼반지까지 이르렀다.

남색의 눈동자에 순간 보이지 않는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약혼반지를 따라 덧그리며, 레커스가 속삭였다.

“당신의 재능도, 당신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체념이라도 한 것 같은 레커스의 목소리에 이스엘은 숨을 죽였다.

이스엘은 레커스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과 대화나 하자고 이렇게 묶어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스엘은 용기를 내 그를 불렀다.

“레커스 교수님.”

“…….”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진 모르겠지만,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고자 꺼낸 말이었다.

“그러니 제발 침착하시고…….”

하지만 레커스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이스엘의 말을 끊어냈다.

“이스엘 당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커스는 벽 선반에 놓여있던 은촛대를 집어 들었다.

불꽃이 흔들리면서, 레커스의 그림자가 벽지 위에서 일렁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기름 냄새가 다시금 코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스엘은 숨을 급히 들이켰다.

레커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비명에 가까운 이스엘의 다급한 외침은 이미 늦었다.

레커스는 망설이지 않고 은촛대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초들이 카펫 위를 뒹굴자마자,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레커스가 미리 기름을 부어놓은 듯, 새빨간 화염은 벽의 둘레를 따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용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에 당장이라도 피부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덮쳐오는데도, 이스엘은 손이 묶인 탓에 입가를 가릴 수도 없었다.

레커스가 비틀거리며 이스엘에게 다가왔다.

그가 어떻게든 화염에서 벗어나려는 이스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는데도 레커스는 여유롭기만 했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스엘.”

억센 손아귀가 이스엘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지랑이로 시야가 일렁이는 가운데, 높이 치켜든 레커스의 손에 망치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사랑합니다.”

절절한 고백을 하며, 레커스가 그 언제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레커스의 손이 있는 힘껏 망치를 내려찍으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온 세상이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희뿌연 연기와 불길 너머 아스라이, 누군가의 형체가 비쳐보였다.

이 악몽 같은 공간에서 눈을 뜬 직후부터, 이스엘이 마음속으로 그리고 그려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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