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98화 (98/130)

# 98

레커스 교수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는 순간 이스엘은 흠칫 몸을 굳혔다.

공기가 정체되어 있는 방 안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바람이 옆구리를 타고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레커스 교수가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스엘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시온을 돌아보았다.

이스엘과 눈을 마주친 시온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교수님께서 부탁하셔서 만든 자리입니다.”

“교수님께서요?”

가만히 지켜보던 레커스가 자신의 옆에 있는 의자를 살짝 뒤로 빼낸 후, 이스엘에게 권했다.

“우선은 앉으시지요, 영애.”

이스엘은 얼떨결에 그가 말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모두가 착석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곧바로 찻잔에 뜨거운 차를 따라주었다.

세 개의 찻잔 위로 하얀 김이 나란히 피어올랐다.

찻잔을 기울이려던 레커스 교수가 문득 문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스엘의 호위 기사들이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정자세로 서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도 빠짐없이 레커스 교수를 향하고 있었다.

레커스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제가 태자 전하께 부탁을 드린 것은, 영애와 꼭 한 번은 에카르 제국 예술계의 미래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이스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베리타스-에레니움 협약으로 두 제국이 화합을 이룬 것은 무척 대단한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앞으로도 에카르 제국의 예술계는 점차 발전해 나가겠지요.”

술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모난 곳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에카르 제국은 제게 타국이라곤 하나,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무척 우려가 됩니다.”

시온은 레커스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커스 교수는 정말로 시온에게 블리샤 백작영애와 예술계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부탁했다.

시온은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참 전부터 에카르 제국의 예술계에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에카르 제국을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예술문화의 진화를 빼놓을 수 없었다. 제국이 가장 취약한 분야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시온이 생각했을 때, 레커스 교수는 그 빼어난 조각 실력에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레커스 교수와 이스엘이 뜻을 함께한다면, 에카르 제국의 예술계에도 봄이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시온은 믿고 있었다.

또한 레커스와 친분을 쌓으면서, 이스엘이 조금 더 많은 예술가들과 마주쳤으면 하는 염원도 분명 있었다.

시온은 이스엘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하며, 한 가지를 굳게 결심했다.

바로 이스엘이 조각가로서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게끔 단단한 받침대가 되어주자는 것이었다.

시온이 레커스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스엘을 초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스엘이 레커스의 말을 경청하며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말인데, 한때 로스카 제국에 예술이 발달하기 전에……. 아.”

설명을 이어나가던 레커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이스엘이 왜 그러냐고 묻자, 레커스 교수는 곤란하다는 듯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밖으로 퍼져나가면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그러면서도 방을 지키고 서있는 기사들에게로 은근하게 시선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시온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기사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얼굴을 한 기사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스르륵 닫혔다.

그때까지 여유롭게 웃고 있던 레커스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입꼬리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스엘.”

이름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어있었으나, 이스엘은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혹시 최근에, 보낸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

이스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교수님께서…… 어떻게 아세요?”

세레스, 라한 그리고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이스엘은 들었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다기들이 부딪히며 나는 달각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듯 둔탁했다.

질문을 했음에도, 레커스는 이스엘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레커스는 그저 옅은 미소를 유지하고, 그대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참다못한 시온이 그에게 몸을 기울여 물었다.

“레커스 교수님,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레커스가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려, 조금 식어버린 차를 입에 머금었다.

쌉싸름한 잎차의 맛을 음미하며 그가 시온을 향해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모르셔도 되는 일입니다.”

타이르는 듯 나긋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온은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선과 달리, 레커스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새까만 호수의 표면과도 같았다.

시온은 이런 눈을 한 남자를 알지 못했다.

마치 낯선 타인의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완벽하게 체감함과 동시에 입 끝을 간질이는 찻물의 맛이 이상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오른쪽 귀가 듣는 소리와 왼쪽 귀가 듣는 소리가 어긋나며 기괴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이명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현기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돌았다.

시온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이스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스……엘! 안……!”

혀와 성대가 뻣뻣하게 굳어, 이지러진 발음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겨우 내뻗은 손이 이스엘의 찻잔을 테이블 밖으로 쳐냈다.

푹신한 카펫 위에 얼룩을 남기며 찻잔이 데굴데굴 굴렀고, 그 옆으론 정신을 잃은 시온의 몸이 풀썩 하고 쓰러졌다.

레커스는 축 늘어진 시온의 몸뚱아리를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찬 후,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시온의 노력이 무상하게도, 이스엘은 이미 찻잔을 반이나 비운 후였다.

차례차례 불이 꺼져가듯, 온몸이 마비되어가기 시작했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잿빛으로 반전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레커스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의 한쪽 입매가 비슷하게 올라가, 일그러진 미소를 만들어냈다.

“제 편지에 답장을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 절절하기까지 한 레커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칠흑 같은 장막이 이스엘의 의식을 뒤덮었다.

***

라한이 시종을 향해 되물었다.

“……뭐라고?”

서늘한 목소리에 시종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시종이 말을 더듬으며 방금 한 말을 다시 반복했다.

“교, 교수님께서는 지금 안 계십니다.”

그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을 받아 레커스 교수의 숙소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이였다.

황궁에서 일한 연차도 꽤 되는 숙련된 시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교육 받은 것을 모두 잊을 정도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 눈앞에서 그를 추궁하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카녹스 대공이기 때문이었다.

정수리에 꽂혀드는 흉흉한 시선에 척추를 타고 선연한 공포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어디로 갔지?”

“아침 일찍 저택으로 돌아오셨다가 다시 외출하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는 저도 잘…….”

무심코 고개를 든 시종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카녹스 대공의 미간은 사납게 일그러져있었다.

아무 표정이 없어도 무서운 얼굴인데,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악마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한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가는 시종의 안위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레커스 교수로 가득 차 있었다.

라한은 이스엘에게 이상한 편지를 보내는 자가 레커스 교수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편지의 출처를 추적해보았지만, 건질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부치는 편지들은 모두 한곳에 모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편지를 놓고 갔는지 구별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나 확실히 알아낸 것은, 편지지와 봉투에 사용된 종이의 종류였다.

손끝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재질의 종이는 에카르 제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먼 경의 조사에 따르면, 그것은 로스카 제국의 남부지방에서만 생산되는 최고급 품질의 종이였다.

장인의 손으로 특별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내는 종이는 희소성이 높아, 로스카 제국 내에서도 황족 혹은 지위가 높은 귀족이나 쓸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정황이 레커스 교수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한이 레커스 교수가 범인일 것이라 확신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레커스가 이스엘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언뜻 보면 부드러워 보이는 진남색 눈동자는 마치 두터운 장막과도 같았다. 그 장막 뒤에 질척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아직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언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낼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던 중, 라한은 오늘 아침 일찍 데이먼 경에게 어떤 보고를 듣게 되었다.

지난밤에 레커스 교수의 자택에 정체 모를 장정들이 드나들었다는 것이었다.

라한은 보고를 받는 즉시, 기사들과 함께 레커스 교수가 머무르고 있는 자택으로 향했다.

주말동안은 아무 강의도 없었고, 금요일 저녁에 있던 강의가 끝나자마자 그가 자택으로 향했다는 것도 확인한 후였다.

하지만 라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빈 집에 남은 시종뿐이었다.

레커스 교수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말한 시종을 바라보던 라한의 손이 움직였다.

귀를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바짝 날이 선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서슬 퍼런 검날이 멈춰있는 자리는 시종의 목덜미 바로 앞이었다.

“…!”

라한이 고개를 숙여, 시종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 번 모른다고 말해 봐.”

깊고도 낮은 목소리가 쇠사슬처럼 목덜미를 죄여오는 느낌이었다. 온 몸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머리와 몸이 분리될지도 몰랐다.

시종은 눈을 꼭 감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 그게… 아마 아카데미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아카데미?

라한의 눈썹머리가 굵게 꿈틀거렸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이스엘의 얼굴이었다.

지금쯤 이스엘은 아카데미에서 마차를 타고 블리샤 백작 저택을 향해 출발했을 것이다.

그랬을 터였다.

순간 뒷덜미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라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종을 내버려두고, 라한이 황급히 몸을 돌려 집을 빠져나갔다.

처음엔 조금 빠른 축이던 걸음걸이는 어느새 뜀박질로 변해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지르는 사이, 어디선가 솟아난 불안한 예감이 점차 큼직하게 몸집을 키워 나갔다.

사고가 이어지기도 전에, 라한은 자신의 흑마 위에 올라탔다.

흥분해 날뛰려는 말을 고삐를 잡아 당겨 제압한 라한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은 곧장 최대의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의 맥박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마냥 고막을 두드렸다.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황급히 말에 올라탄 데이먼 경이, 라한을 뒤쫓으며 물었다.

“각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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