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넓은 복도를 따라 마르젤 공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메아리가 잦아들고 침묵이 찾아올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마르젤 공자의 행동에 당황하여 얼어붙은 것이었다.
개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이스엘이었다.
이스엘의 눈꺼풀이 찬찬히 깜박였다.
공자가 얼마나 힘차게 외쳤는지, 아직도 고막이 먹먹했다.
마르젤 공자는 허리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상체를 숙인 자세 그대로 미동이 없었다.
이스엘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르젤 공자?”
그가 다시 소리를 지르면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 귀 건강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허리를 숙인 마르젤 공자에게서는 작은 목소리가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그러니까 무엇이요?”
“이때까지 영애께 무례하게 행동한 점을……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스엘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심하게 행동했는데도……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황한 이스엘이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렸다.
마르젤 공자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엘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특히 저번에 마르젤 공자가 자신의 조언을 거절했을 때는, 살짝 민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사과를 해야 할 만큼 무례하게 굴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조금 과한 오지랖을 부렸다고 후회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스엘의 정체가 조각가 엘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녀를 우러러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엘은 그 사실을 아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스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괜찮아요, 공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
“그리고 공자를 구한 일은……. 제가 아닌 누구라도 당연히 그렇게 행동했을 거예요.”
악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긋한 목소리에 마르젤 공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애.”
이스엘을 바라보는 마르젤 공자의 눈은 감동에 벅차 반짝거렸다.
존경과 경애가 담긴 눈빛은 열렬하기까지 했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다시는 영애께 민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럴 것까지는…….”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꼭 저를 불러주십시오!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충직한 신하처럼 대답하는 그는 정말 진심인 듯했다.
이스엘이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라 하면 꿇어 보일 수도 있을 것처럼 말이다.
“아, 아니…….”
마르젤 공자는 당황하여 눈을 깜박이는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구해준 이스엘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기 위해, 마르젤 공자는 날밤을 새워가며 고민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사과는 점차 늦어졌다.
이러다간 정말 안 되겠다 싶어 급하게 그녀의 방 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큰 은혜를 입고도 며칠 동안이나 인사 한마디 하지 않은 저를 나무랄 줄 알았는데, 이스엘은 달랐다.
누구나 당연히 하였을 행동이라며 겸손하게 손을 내젓는 이스엘의 등 뒤에서 한 쌍의 흰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마르젤 공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이스엘을 예찬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나중에는 조금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공자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정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차분한 이스엘의 목소리에 공자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 그런! 아닙니다, 영애는……!”
그에게서 또 다른 낯부끄러운 말들이 튀어나오기 전에, 이스엘이 마르젤 공자의 말을 잘라냈다.
“그래도 앞으로는 강의 시간에도 반갑게 인사해주시겠지요?”
이스엘이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하자, 마르젤 공자의 얼굴이 머리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입술을 벙긋벙긋하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무, 물론입니다, 영애.”
그는 그때서야 자신이 이스엘의 시간을 너무 빼앗았다는 걸 알고, 또 한바탕 사과를 했다.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연신 숙여 보이다가 사라지는 마르젤 공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이스엘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센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음속에 걸려 있던 가시가 빠진 것처럼 후련했다.
훨씬 상쾌한 표정이 된 이스엘에게 알렉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아가씨, 입구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응.”
이스엘은 정신을 차리고 발을 내딛었다.
알렉과 헤리스, 그리고 두 명의 황실 기사들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뒤따랐다.
인간 갑옷으로 둘러싸여 걸어가는 기분이 묘했다.
그들이 마차 앞에 당도한 바로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스엘을 불렀다.
“블리샤 백작 영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기사들이 몸을 흠칫 굳히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스엘의 앞에 나타난 이는, 그들이 차마 막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스엘을 부른 청년이 연푸른 눈동자를 시원하게 접어 보였다.
이스엘이 고개를 숙이며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
시온이었다.
기사들이 숨을 들이켜며 얼른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까딱여 그들의 인사에 화답한 시온의 시선이 외출복을 입고 있는 이스엘에게로 돌아왔다.
“외출하시는 겁니까?”
“네. 주말을 맞아 집에 다녀오려고요.”
“그러셨군요.”
시온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마차와 이스엘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많이 급하신 것이 아니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야기요?”
이스엘은 의아해져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예.”
답하는 시온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평상시에는 늘 웃음기 가득했던 눈매는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고, 이스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묵직한 근엄함까지 전해져왔다.
시온과는 함께 강의에 참관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이런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가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은 가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사소한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얼마간 고민하던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시온은 안도한 듯 곧바로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시온은 이곳에서 나누기엔 조금 무게가 있는 주제이니, 자신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자 제안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벨에게 잠시 방에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였다.
출발이 늦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벨은 잔뜩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종종걸음으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이스엘과 시온은 네 기사들과 함께 시온이 지내고 있는 방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찬찬히 그곳으로 걸어가던 중, 시온이 이스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라한 형님…… 아니, 카녹스 대공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블리샤 백작 영애가 어디에 있든, 그 곁에 카녹스 대공이 서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아카데미 학생들이 알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온이 이스엘에게 말을 걸기라도 할라치면 사납게 노려보며 방해하던 시선이 오늘은 부재했다.
시온의 질문에 이스엘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다.
“아……. 대공 각하께서는 아침 일찍 보고를 받고 잠시 외출하셨어요.”
이스엘의 대답에 시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라한의 외출에 대해 이스엘은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했지만, 시온은 아니었다.
아무리 약혼자라 해도 저건 좀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이스엘을 싸고돌던 라한이었다.
그런 그가 이스엘의 옆을 비우다니, 라한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스엘과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보다도, 염려가 먼저 시온을 찾아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옅은 걱정이 어린 시온의 시선이 이스엘 뒤를 지키고 있는 두 황실 기사에게로 향했다.
라한이 이스엘에게 붙여둔 이들은 특별기사단 내에서도 정예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라한에게 단단히 당부를 들었는지, 그들은 인적이 드문 건물에 들어서고 나서도 경계를 느슨히 하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두 사람은 고급스러운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서있던 황실 기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문을 열어주었다.
그 어떤 기숙사 방보다도 호화스러운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천장에 달린 자그마한 은빛 샹들리에가 거실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티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테이블 위엔 이미 티타임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바삭하게 구운 다과들이 옥빛 접시 위에 놓여있었고, 금세공이 들어간 찻잔들이 샹들리에 빛을 반사했다.
하지만 이스엘의 시선을 이끈 것은 방의 화려함도,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다기들도 아니었다.
티테이블 앞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이스엘이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레커스 교수님?”
“블리샤 백작 영애.”
레커스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스엘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처럼, 그의 입매가 매끈하게 올라갔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캄캄한 밤하늘처럼 짙은 눈이 이스엘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