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마르젤 공자가 공포에 얼어붙어 아무 해명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스엘이 라한을 말렸다.
“라한, 정말 사고였어요.”
이스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강의실 밖에 대기하던 기사들도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반응하지 못했다.
라한의 시선이 이스엘의 얼굴로 향했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스엘은 그때서야 라한의 눈이 잘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스엘의 팔을 붙잡고 있는 손도 마찬가지였다.
아…….
라한은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강의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쓰러지는 돌기둥을 붙잡은 자신을 보고 그는 몹시 놀랐던 것이다.
사고를 막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그만 라한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라한은 잠시 이스엘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우선은…… 의원에게 가야겠습니다.”
이스엘은 라한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데, 바짝 긴장했던 여파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스엘이 무게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라한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품어 지탱하였다.
그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이스엘을 안아들곤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 뒤에 남겨진 학생들과 레커스 교수의 시선이 따끔하게 박혀들었다.
의원이 있는 의무실로 향하는 길 내내, 라한은 자물쇠로 입을 걸어 잠그기라도 한 듯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스엘은 잘게 흔들리는 품속에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라한이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 신전에서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마치…… 상처라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스엘도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묵묵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의무실에 도착하자, 책상 앞에서 졸고 있던 의원이 고개를 들어 의무실을 찾은 손님을 확인했다.
의원은 몽롱한 눈을 끔벅이다가,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실 의무실이 잘 구비되어 있어도, 학생들이 이곳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베리타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모두 귀한 가문 출신의 자제들이었다.
몸이 좋지 않거나 다치면 주치의를 아카데미로 부르면 그만이었다.
노의원이 베리타스 아카데미에서 일한 것은 벌써 햇수로만 십 년이 다 되어갔다.
그쯤 되면 기억이 퇴색할 법도 한데, 눈앞의 인물은 잊을 수 없는 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부터 여러 귀족들을 패서 의무실로 보내곤 했던 라한 엘 카녹스였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컨대, 노의원이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제일 바빴던 시기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라한이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의무실을 찾는 환자가 뚝 끊겼다.
그런데 이제는 카녹스 대공이 된 그가, 여인을 품에 안고 의무실에 들이닥친 것이다.
카녹스 대공은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인을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으로 의원을 노려보았다.
당장 진료를 하라는 눈빛이었다.
노의원은 무시무시한 눈길을 피하며 이스엘에게 물었다.
“어,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손을 조금 쓸린 것 같아서요.”
의원은 곧장 이스엘의 손을 살폈다.
여린 피부가 거친 석재 표면에 쓸려 마찰력을 견디지 못하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옅은 피가 올라오는 생채기를 확인한 의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원의 손끝이 붉게 달아오른 환부를 스치는 순간, 따끔한 고통이 팔을 관통했다.
이스엘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앗…….”
이스엘의 바로 뒤에 서있던 라한이 의원을 노려보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느낌에 의원이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노의원은 그때부터 잔뜩 긴장한 채 이스엘의 손바닥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여인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카녹스 대공이 당장 제 목을 치기라도 할 것 같아서 노의원의 이마 위로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뚝뚝 흘렀다.
연고를 고르게 바르고, 깨끗한 천을 덧댄 후 붕대를 감았다.
그는 손바닥의 생채기를 제외하곤, 별 이상이 없다고 진단했다.
골절이나 인대파열을 입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물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의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시금 안아들려는 라한에게 이스엘은 손을 붕붕 내저으며 괜찮다고 사절했다.
별달리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니 강의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실 아까도 라한에게 안긴 모습을 보여 살짝 민망했다.
고작 손이 쓸렸을 뿐이었는데…….
그때는 라한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별로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처럼 대놓고 화가 난 표정은 아닌 듯했으나, 여전히 굳어있는 입매가 신경이 쓰였다.
그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이스엘은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렸다.
결국 복도를 잠식한 침묵을 깨낸 것은 미묘한 표정으로 이스엘을 내려다보던 라한이었다.
“왜 그러셨던 겁니까?”
귓바퀴를 타고 도는 낮은 목소리에 이스엘은 눈을 찬찬히 깜박였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말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이스엘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 무척 작았다.
“하지만…… 제가 막지 않았더라면 학생이 크게 다쳤을 거예요.”
라한은 주먹을 꾹 쥐었다.
돌기둥에 깔려 학생이 다치든 목숨을 잃든 라한에겐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차라리 그 편이 이스엘이 위험해지는 것보단 백배 나았을 것이다.
학생 한 명의 목숨이 아니라, 수백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라한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풀이 죽은 이스엘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묵직한 것에 짓눌리듯 답답함을 토로해왔다.
그녀를 추궁해 사과를 받으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실 라한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는 자신이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이 일이 벌어져서였다.
뱃속에서 죄책감과 자학심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싸워댔다.
라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이스엘을 당겨 품에 껴안았다.
“……!”
그녀의 허리 위에 두른 팔에는 평소와 달리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순식간에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이스엘이 얕은 침음을 흘렸다.
“윽…….”
귓가를 파고드는 이스엘의 신음소리에 라한은 곧장 팔의 힘을 풀었다.
조건반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를 다치게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스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도 모르는 학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반지의 힘이 있었기에 천만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스엘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상상에 척추가 웅웅 울릴 정도로 몸이 떨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듯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눈앞이 깜깜하게 물들어갔다.
그녀가 하룻밤 사이 연기처럼 사라졌던 때처럼, 막연한 공포감이 몸을 사로잡아갔다.
라한은 온몸을 뒤흔드는 끔찍한 사념들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리곤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스엘이 자신의 품속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하려는 것처럼, 라한이 다시금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
“제발…… 부탁입니다.”
고막을 타고 전해지는 라한의 목소리에는 짙은 애절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스엘에겐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신전의 지하감옥에서 자신이 무섭냐고 물었을 때와 똑 닮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라한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스엘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자, 라한이 살짝 몸을 떨어트렸다.
“이스엘.”
이름을 부르며 이목구비를 훑는 눈길은 간절했다.
이스엘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배는 힘이 센 라한이었음에도, 이런 순간에는 그가 무척 유약해 보였다.
전장을 휩쓸었다던 장군이 아닌 헤르바트 숲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자신이 라한을 감싸주고 지켜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스엘은 위로라도 하듯 라한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이스엘의 확언에 라한이 참고 있던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그가 다시금 이스엘을 품에 껴안았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작은 숨결과 온기, 그리고 익숙한 향에 쿵, 쿵, 거칠게 뛰고 있던 심장이 진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
결국 두 사람은 강의가 끝날 시각이 될 때까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강의를 내팽개친 것이 양심에 찔렸지만, 조금이라도 밀어내려 하면 라한이 눈을 축 늘어트리고 바라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라한은 이스엘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숙사의 문 앞에는 데이먼 경이 지키고 서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눈이 퀭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라한은 이스엘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잠시 기사단원들과 할 회의가 있으니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기숙사에서 대기하던 알렉과 헤리스에게 이스엘을 부탁한다고 말한 뒤 데이먼 경과 함께 복도를 빠져나갔다.
힐끔힐끔 뒤돌아보는 데이먼 경의 표정이 구조 신호를 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스엘의 손에 감긴 붕대를 발견한 벨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알렉과 헤리스 그리고 벨까지, 모두 백작님께 보고를 드려야겠다며 난리를 치는 것을 말리느라 이스엘은 진을 뺐다.
레오가 개인 임무로 이틀간 자리를 비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상처가 다 나았으면 좋겠는데…….
이스엘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맡기자, 종일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드는 것처럼 어깨가 묵직해졌다.
그때, 침대 옆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이스엘이 아카데미에 온 이후, 블리샤 백작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내왔다.
오늘도 역시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인가 싶어 편지봉투를 집어 드는데, 그 밑에 편지가 하나 더 놓여있었다.
시야에 아릿하게 박혀오는 붉은빛의 봉투는, 이때까지 받았던 기묘한 편지들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편지를 집어 드는 이스엘의 손이 잘게 떨렸다.
머릿속 한구석으로 물러나 있던 불안이 순식간에 몸집을 키워 이스엘을 집어삼켰다.
바삭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머릿골까지 울릴 지경이었다.
이스엘이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이번에도 역시, 편지지에 적힌 것은 단조로운 문장뿐이었다.
이제는 놀라지 않을 법도 하건만, 이스엘은 충격에 한참 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편지에 적힌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손은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