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90화 (90/130)

# 90

한참 동안 길 위를 달려 나가던 마차는 마침내 아카데미 정문에 멈춰 섰다.

오른손에는 횃불을,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학문의 신 베뤽스 석상이 문지기처럼 정문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베뤽스 신의 근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 아카데미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시간을 물어보니, 약속했던 시간보다 삼십 분 정도 일찍 도착해있었다.

이대로 기숙사 앞까지 마차를 탄 채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이스엘은 내려서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아카데미의 구조도 한번 둘러볼 겸, 찬찬히 걸으면서 앞으로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이스엘은 알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아카데미가 협곡 바로 근처라서 그런지, 촉촉한 공기는 차게 식어있었다.

완벽한 대칭으로 이루어진 정원 너머에 세워져있는 상아빛깔의 건물은 고풍스러우면서도 깔끔한 중도를 지키고 있는 형식이었다.

천천히 전경을 살피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이스엘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찬란한 백금발의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차분한 감색의 예복을 입고 있는 사내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알렉과 헤리스가 먼저 고개를 숙여 황족을 향한 예를 표했다.

“블리샤 백작영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스엘을 불러온 것은 바로 시온이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온이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연회장에서도 얼굴은 보았지만, 그땐 계속해서 이스엘에게로 몰려드는 귀족들 때문에 서로 인사를 나눌 틈이 없었다.

시온은 자신 또한 교류단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이스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은 미세한 떨림을 감내하고 있었으나, 이스엘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황태자 전하.”

맑은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잠시 맞잡았던 손은 금세 빠져나갔다.

허전한 손을 꽉 주먹 쥐며, 시온은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쓴 미소를 삼켜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시종 제르토가 만류하는 것을 마다하고 이곳에서 이스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며칠 만에 가까이서 마주한 이스엘은 여전히 수식어를 붙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스엘과 라한의 약혼식 이후, 시온은 환자처럼 끙끙 앓고 있었다.

그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은 조각가 엘의 정체를 아버지께 듣고 나서였다.

식사까지 거르고 마주한 조각상 앞에 서서, 시온은 한참 그것을 바라보았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슴속의 상처받은 감정이 다른 것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제대로 꽃피워내지 못했던 짝사랑의 불꽃은 아주 조용히 사그라져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그녀의 예술에 대한 경애였다.

이스엘의 조각상을 보고 있으면 탄식도 채 나오지 않을 만큼 벅찬 감동이 시온을 휘어잡았다.

베리타스-에레니움 협약이 체결 된 후, 시온은 오만 사유를 다 끌어와서 아버지를 설득했다.

자신이 에레니움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으니, 블리샤 백작 영애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황제 테르반은 살짝 한심한 듯한 눈빛으로 시온을 바라보다 그러라고 선뜻 허락해주었다.

물론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하나 내놓긴 했지만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오고 나면, 황위 계승을 준비하도록 해라.

시온은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여태 황위에서 도망치고자 열심히도 발버둥 쳐왔던 시온이었다.

에레니움 아카데미에서 유학을 한 것도 그 발버둥 의 일환이었다.

정치에는 통 흥미도 없고, 체질에 맞지 않았다.

답답한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작업을 하는 일에 무슨 매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귀족들 사이에서 눈치싸움을 하는 것도 질색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온은 외동아들이었고, 언젠가는 황위를 물려받아야만 했다.

어차피 닥칠 것이지만 최대한 계승을 미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지금 테르반이 내건 조건은 그 모든 노력들을 한 번에 무너트릴 만한 것이었다.

이전의 시온이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조건을 거부했을 것이다.

테르반은 능글맞게 웃으며 싫으면 관두라고 말했고, 시온은 한참 동안 눈을 굴리다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스엘의 곁에 조금이라도 머무를 수 있다면, 황위 계승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온은 회상에서 빠져나와, 제 앞의 이스엘을 응시했다.

“아카데미를 둘러보실 계획이시면, 제가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시온의 제안에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물론이에요.”

부드럽게 접히는 눈매 사이에서 가을이 반짝였다.

시온은 덩달아 미소했다.

이스엘이 바라봐주지 않아도, 자신을 이성으로 보는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곁을 지킬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

시온은 이스엘과 함께 정원을 거닐며 아카데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베리타스 아카데미 대신 에레니움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시온은 로스카 제국의 풍습과 문화에 익숙했다.

시온도 처음 에레니움 아카데미에 갔을 때, 다른 가치관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했다.

에카르 제국에서는 타인의 집에 방문할 때 자그마한 것이라도 좋으니 선물을 챙겨 가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스카 제국의 풍습은 그와 정반대라고 했다.

손님이 선물을 들고 오는 대신 그를 초대한 집 주인이 선물을 건넨다는 것이었다.

그걸 몰랐던 시절, 시온은 고가의 선물을 챙겨갔다가 오히려 면박을 당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같이 톡톡 튀는 재미난 일화들을 듣다 보니, 어느새 강의가 열리는 건물까지 도착해있었다.

전해 듣기로, 아카데미에서의 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애초에 베리타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모두 귀족이었기에, 수강 시간표가 빽빽하지 않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각자 원하는 수업을 선택하여 수강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자유 시간을 만끽하는 식이었다.

학문의 장이라기보다는 축소된 사교계에 가까운 곳이 바로 베리타스 아카데미였다.

이스엘은 조각을 다루는 강의에 참관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황제 테르반은 명목상에 불과한 담당자이니 굳이 강의실에 직접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스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식이든 간에 자신이 맡기로 한 일이었으니, 대충 해치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듣는 것은 그녀가 언제나 꿈꿔오던 것이었다.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모자랐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스엘에겐 아카데미 수업이라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한편 시온은 강의에 참관할 것이라는 이스엘의 말에 살짝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자신도 함께하겠다고 말해왔다.

이스엘은 각 학부의 강의 시간들이 적혀있는 양피지를 꺼내들어 강의실을 확인했다.

한적했던 밖과 달리, 건물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실을 찾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여유롭게 강의실로 향하다가 이스엘과 시온을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레 키웠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뒤늦게야 황급히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는 귀족 자제들은 시온 옆에 있는 이스엘에게 힐끔힐끔 시선을 던지곤 했다.

호기심과 흥미가 진하게 묻은 시선들은 결코 맑지만은 않아서 불편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실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강의실은 중앙의 널찍한 연단을 책걸상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강의가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벌써부터 의자에 착석해있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누군가가 강의실을 반으로 가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베리타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앉아있는 곳과 에레니움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앉아있는 곳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로 익숙한 이들끼리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마저도 이스엘과 시온이 강의실에 들어온 순간 멎어버렸다.

베리타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황태자 전하의 모습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려는 것을 시온이 손을 들어 괜찮다며 말렸다.

황태자인 시온이 강의실에 들어서자, 미묘한 긴장감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이스엘은 얼굴이 익숙한 에레니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가며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강의실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온 역시 자리를 권하는 귀족 자제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하고, 이스엘의 바로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마침 강의실의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복 차림의 레커스 교수가 들어섰다.

레커스 교수의 시선이 강의실 뒤편에 있는 이스엘에게 곧바로 꽂혀들었다.

이스엘이 인사의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레커스 교수가 눈을 휘며 진득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곤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레커스 티리안입니다. 두 달 동안이긴 하나, 베리타스 아카데미에서 이렇게 수업을 하게 되어 참 영광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진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짧게 감상을 밝힌 레커스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강의를 진행해 나갈 것인지 설명했다.

“오늘은 첫날이기도 하니…… 간단히 조각 작업의 과정에 대해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말에 맞추어,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큼직한 석재 조각상을 운반해왔다.

잘린 면이 거칠거칠한 하얀 대리석 석재가 강의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깃들었다.

연단 중앙에 대리석 석재를 놓고, 레커스 교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레커스 교수의 강의는 무척 유연하면서도 흥미 있게 진행되었다.

세레스에게 받았던 수업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설명이 이어졌고, 이스엘은 그것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새겼다.

레커스가 석재 조각을 할 때 어떤 점이 어려운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이스엘의 눈이 반짝였다.

“특히 석재 조각을 하다 보면, 곡면을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지요.”

목재와 달리 석재는 재료 특유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빛의 흐름,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자연스러운 곡면을 조각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훌륭한 조각가들도 난항을 겪곤 하지요.”

이스엘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것을 놀랍도록 거뜬히 해내는 천재 조각가가 있긴 합니다.”

레커스의 말에 학생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그들을 조용히 시키는 대신, 레커스 교수는 말을 덧붙였다.

“바로 조각가 엘입니다.”

레커스 교수가 고개를 돌려, 이스엘의 쪽을 바라보았다.

“블리샤 백작영애.”

레커스의 목소리에 이스엘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뒤를 돌아 자신을 응시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눈길에, 그녀는 뒤늦게 대답하였다.

“네……?”

망치와 조각 끌을 집어든 레커스 교수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내며 입술을 움직였다.

“학생들을 위해, 그대가 시범을 보여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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