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라한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교황을 응시했다.
그녀는 새하얀 신관복 대신 어둠 속에 자연히 섞여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칙칙한 색의 로브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오늘 이스엘이 조각가 엘임을 모두에게 알릴 계획이라는 것을 듣고 찾아와봤지요.”
라한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 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게 분명하니, 멀리서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본래 리안테는 연회장에 공식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귀족들의 입에 발린 아첨이나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연회장은 그녀에겐 달갑지 않은 장소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혹시라도 만일의 불상사가 생기면 지체 않고 연회장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지금 이스엘 블리샤는 신전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적대심을 가진 이들이 해를 끼치기라도 할까 봐 멀리서 유심히 지켜보았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엘의 곁에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이가 셋이나 있었다.
가족인 블리샤 백작과 레오뿐만이 아니라, 카녹스 대공까지 말이다.
특히 카녹스 대공은 연회 내내 이스엘의 곁에 쓸데없는 날파리가 달라붙지 않도록 철저하게 차단하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리안테가 입술을 열었다.
“이스엘이 이름을 알리는 것이 불안합니까, 카녹스 대공?”
정확히 정곡을 찌르는 교황의 말에 라한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내보였다.
“그러는 성하께서는 이 상황이 만족스러우신 모양이군요.”
“글쎄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신전의 입장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공표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도 했다.
이스엘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닉스 여신의 축복을 담는 조각가 엘이 신전의 편에 선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라한 엘 카녹스는, 리안테가 계획에서 지워내고 싶은 단 하나의 불순물이었다.
리안테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이렇게 그대를 부른 것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라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며칠 전만 해도 라한은 그녀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아마 이스엘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베어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교황이 저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라한이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리안테가 물었다.
“이스엘 블리샤와 진정 혼인을 할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이야기해두지요. 카녹스 대공.”
“…….”
“당신은 이스엘과 혼인해선 안 됩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단단했다.
절대 허물 수 없을 벽을 세우듯 반대 의사를 밝히는 리안테의 모습에 라한은 하, 하고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건 성하께서 결정하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아니요. 결정까진 아니어도, 제가 관여할 수밖에 없는 문제예요.”
지긋한 시선은 라한의 눈동자를 꿰뚫을 듯 훑고 있었다.
무언가의 흔적을 찾는 집요한 시선에 라한이 미간을 찌푸렸을 즈음, 그녀가 다시금 물어왔다.
“당신은, 당신이 타고난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
라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척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척추에서부터 기묘한 기시감이 피어올랐다.
거울 너머에서 스스로를 응시하던 주홍빛의 눈동자가 생생히 떠오른다.
한참 전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덮어두었던 진실이 스멀스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라한, 괜찮다. 이건 그냥 형식적인 신탁일 뿐이잖니.
괜찮다는 말은 라한에게 향한 것이 아니듯, 라한의 어깨에 얹힌 어머니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척 어린 나이에도 라한은 그 말이 거짓말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카녹스 대공작가문은 예로부터 카르뮈스 신을 모셔왔다.
신탁을 받으러 카르뮈스 신전에 들렀을 때, 라한은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했다.
성력이라곤 전혀 없는 그였지만, 선명히 귓가를 파고드는 신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가 남자의 것이었는지 여자의 것이었는지, 부드러웠는지 거칠었는지는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라한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한순간에 묵직하게 변해갔다.
하지만 리안테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당신이 가지고 태어난 저주는 파멸 그 자체입니다.”
라한은 놀라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는 잠자코 리안테의 입에서 이어져 나올 말을 기다렸다.
“교황으로서, 당신처럼 부정한 존재를 이스엘 곁에 두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이스엘은 하인들이 마차에 마지막 짐 가방을 싣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이스엘을 배웅하기 위해 백작과 저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하나같이 울상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 이스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스엘은 교류단이 제국에 머무르는 두 달 동안 그들과 함께 베리타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기로 되어 있었다.
블리샤 백작 저택과 베리타스 아카데미는 수도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어서 거리가 꽤 멀었기에, 매일매일 통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달이긴 하지만 집을 떠나 있을 딸에 대한 걱정으로 블리샤 백작은 밤까지 지새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특별 기사단이 교류단의 호위임무를 맡기로 하여 레오가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스엘, 건강 조심하도록 해라. 이제 날씨가 더 추워질 테니 이불 꼭 여미고 자는 것을 잊지 말고…….”
영원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닐 텐데 1년 치 걱정을 모두 늘어놓으려는 아버지의 모습에 이스엘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리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거든 곧바로 저택에 편지를 해야 한다. 물론 레오가 매일 아카데미에 들르긴 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저는 괜찮을 거예요. 벨도 함께 가고, 알렉과 헤리스도 있는걸요.”
이스엘이 환하게 웃으며 꺼낸 말에 가만히 마차 옆에 서있던 알렉과 헤리스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리샤 백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카녹스 대공 각하도 계시잖아요.”
이스엘이 덧붙인 말을 들은 백작은 복잡하고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카녹스 대공이 얼마나 이스엘을 소중히 대하는지 알고 있어 믿음이 가면서도, 영 마음을 놓는 것이 힘들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기분이 이러할까?
그런 백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엘은 밝은 얼굴로 웃어 보이곤 문이 열려있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가만히 서있던 집사 테오도르가 이스엘을 불렀다.
“아가씨.”
“테오도르?”
테오도르는 살짝 다급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스엘에게 건네었다.
“오늘 오전에 도착했던 편지인데, 정신이 없어서 전해드리는 것을 깜박했습니다.”
반지르르한 봉투를 건네받는 순간 이스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 봉투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짐작한 탓이었다.
이스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흐려지자, 백작이 그녀를 불렀다.
“이스엘……?”
이스엘은 조금 어색한 몸짓으로 편지를 등 뒤로 숨기곤 말했다.
“늦지 않으려면 이제 그만 출발해야겠어요.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 열려있는 창문 너머로 손을 내저었다.
얼떨떨한 얼굴의 블리샤 백작이 뒤늦게 손을 저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출발한 마차가 저택에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 이스엘은 드레스자락에 묻어놓았던 편지봉투를 집어 들어 살폈다.
세 번째 편지는 따스한 감색 봉투에 담겨 있었다.
앞의 두 편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발신자는 적혀있지 않았다.
이스엘은 한참 봉투를 앞뒤로 뒤집어 꼼꼼히 살피다가 숨을 들이마셨다. 봉투를 뜯는 손끝은 석연치 않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스엘은 두 번 접혀 들어있는 보드라운 편지지를 펼쳤다.
앞선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편지지는 중앙의 한 문장을 제외하곤 비어있었다.
잉크 흔적을 담아내던 이스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대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스엘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편지지를 쥐고 있던 손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종이가 살짝 구겨졌다.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다니……?
이스엘의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체자르 레시언일 리는 없었다.
레시언 공작이 일평생 부정적으로 쌓아온 재산은 모두 에카르 황실로 반환되었으며, 공작의 최측근이던 모든 이들도 직위를 압수당했다.
레시언 공작가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버리고 나서, 체자르는 에카르 황궁 지하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것은 레오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사실이니 확실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이지?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 혹은 그녀는 이스엘이 조각가 엘이라는 것을 다른 이들보다도 먼저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눈앞에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의 얼굴이 순서대로 스쳐지나갔다.
이스엘은 터무니없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마차가 시내를 스쳐지나갈 때까지도, 이스엘은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맸다.
어제까지만 해도 새로운 시작을 할 생각으로 설레던 가슴이 지금은 다른 의미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나쁜 말이 적혀있는 것은 아닌데도 사람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편지가 벌써 세 통째 이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걱정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했지만, 두 사람이 얼마나 호들갑을 떨며 걱정을 할지 염려되어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낮게 깔려 보이지 않는 연기가 서서히 이스엘의 발목을 향해 기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뿌리치려 해도 뿌리칠 수 없는 짙은 안개처럼 말이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가 돌길 위를 달리며 덜컹거렸다.
불안한 심장고동과 맞물린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스엘의 고막을 세차게 두드렸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이스엘은 왼쪽 손에 낀 약혼반지를 응시했다.
알맞은 악력으로 잡아오던 단단한 손의 감촉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라한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묵직한 신뢰감이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스엘은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라한에게 이 일에 대해 상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오래 잡고 있어서 살짝 표면이 운 편지지를 다시금 봉투에 집어넣었다.